1965 ~ 1990
내 인생의 기초는 그리 튼튼하지 못했다. 1965년 8월, 경북 상주에서 태어난 가난한 소년에게 풍족함이란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단어였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서 버려진 벼 이삭을 줍던 시절도 있었지만, 진정한 허기를 채워준 것은 밥이나 고구마가 아니라 언젠가 이 가난의 기초 위에 번듯한 빌딩을 올리고 과학자가 되고 대학교수가 되어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막연한 상상이었다.
1984년, 상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서울 광진구의 K대학 건축공학과에 입학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의 나에게 건축은 거창한 신념이 있었거나 예술적 열망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저 교수라는 미지의 꿈을 꾸던 소년에게 주어진 차선책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나에게 대학 생활의 낭만은 생각도 할 수 없는 먼 곳에 있었다. 등록금이라는 당면한 과제 앞에서 나는 낮과 밤이 따로 없는 이중의 삶을 선택해야 했다.
대학 교정 본관 앞 잔디밭과 호숫가 벤치 대신 내가 마주한 것은 청량리 시장 고추 방앗간의 매캐한 공기였다. 빨간 고추를 빻으며 온몸에 붉은 가루를 뒤집어썼고, 시장 통 골목골목을 누비며 배달 자루를 나르기도 했다. 1986년, 제대 후에는 운전면허 하나에 의지해 가게의 낡은 1톤 봉고 트럭을 몰기 시작했다. 고춧가루와 부식 재료를 가득 실은 트럭은 서울과 경기도의 식당, 김치 공장을 잇는 나의 움직이는 도서실이었다.
어느 날은 경동시장에서 마늘을 잔뜩 떼다가 장위동과 월곡동의 좁디좁은 달동네 골목을 누비기도 했다. 난생처음 잡은 빨간색 핸드마이크는 왜 그리도 무겁고 뜨겁던지. 입 밖으로 차마 떨어지지 않던 “마늘 사세요”라는 말은 몇 번이나 목구멍에서 되삼 켜졌다. 하지만 눈을 질끈 감고 터뜨린 한마디, “마늘이 왔어요! 육쪽마늘, 밭 마늘이 왔어요!”라는 외침은 부끄러움을 뚫고 나온 생존의 첫 번째 절규였다. 지금 다시 하라면 아마 그때보다 훨씬 더 구성지게 팔 수 있을 것만 같다. 그 시절, 가파른 언덕길에서 마늘을 팔며 배운 것은 절실함의 힘으로 삶의 고됨을 이기고 견디는 인내와 도전이었다.
나의 대학 시절엔 방학도, 휴일도 없었다. 한 손엔 1톤 트럭의 핸들을 잡고, 다른 한 손엔 전공 서적을 든 채 틈틈이 소주 한 잔으로 고단함을 달래며 책장을 넘겼다. 그 모든 고단함과 쓸쓸함은 오로지 간절함과 절실함으로 참고 버텼다. 다행히 운은 나의 편이었고, 졸업과 동시에 꽤 상위그룹의 건설회사에 합격하며 비로소 진짜 건축인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건설 현장의 먼지가 힘들고 싫지 않으냐고? 하지만 나는 웃으며 답한다. 청량리 방앗간의 고춧가루 먼지들과 장위동 골목의 마늘 향을 견뎌온 나에게, 현장의 흙먼지는 차라리 고소한 참기름이었다고.
그때 흘린 숱한 눈물과 땀방울은 훗날 복잡하고 거대한 빌딩을 올리고 숱한 난관에 부딪혀 낙심하고 있을 때, 어떤 시련에도 나를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 주는 가장 강력한 인생의 든든한 활력소이자 영양제가 되었다.
나의 뿌리는 경북 상주 낙동이다. 낙동강 굽이치는 물줄기를 사이에 두고 의성군과 선산군이 마주 보는 그곳은, 지금이야 ‘낙단보’라는 수려한 경치를 보고 한우 소고기를 먹기 위해 외지인들이 찾아오지만, 예전엔 그저 사람 사는 냄새, 소똥 냄새 진동하는 300여 가구의 제법 큰 농촌 마을이었다. 덜덜거리는 시외버스가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상주와 대구를 오가고, 우체국과 지서(파출소)가 마을의 질서를 잡던 그곳에서 나의 유년은 강물처럼 흘렀다.
1986년,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최대의 인연을 마주했다. 1985년, 1학년을 마치고 부족한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도망치듯 자원입대를 선택했고, 짧은 군 복무를 마치고 다시 일을 시작하기 전에 며칠 동안만이라도 쉬고 싶어 고향에 들러기로 했다. 시간이 지났어도 고향은 변함이 없었지만, 복학을 앞둔 나의 마음은 또 예전과 같은 고된 생활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여유는커녕 텅 빈 대지처럼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다 우연히 초·중학교 동창인 그녀를 다시 만났다. “어, 너… 영조 아니야?” 군인 티를 갓 벗은 까칠한 얼굴의 복학 준비생과 단정한 유니폼을 입고 은행원으로 근무하던 그녀의 모습은 대조적이었다. 그녀의 환한 미소는 고단한 내 삶을 녹인 가장 따뜻한 온돌이었다. 그렇게 22년 만에 나는 그녀를 동창이 아닌 이성으로 만났다.
그 시절 연애는 요즘처럼 빛의 속도가 아니었다. 휴대폰은커녕 집전화조차 귀하던 때라, 우리의 사랑은 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와 엽서의 배달속도와 같은 속도로 진행되었다. 나는 종일 일하고 졸리는 저녁시간에도 그녀에게 보낼 편지지를 펼쳤고, 그녀는 다정한 말들로 나의 불안한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잉크가 번진 편지봉투 속에는 낙동강의 물안개 같은 그리움과, 언젠가 함께 지을 커다란 궁전에 대한 막연한 희망들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5년. 서울과 상주를 오가는 장거리 연애 끝에 1991년, 우리는 마침내 부부라는 이름으로 인생의 설계를 시작했다. 결혼 후 나는 험한 현장 생활을 하느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집에 없는 시간이 허다했고 휴일도 제대로 한 번 쉬어 본 기억이 없다. 하지만 아내는 한 번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기초가 되어주었다. 베트남의 뜨겁고 습한 밤에도, 캄보디아의 낯선 풍경 속에서도 내가 길을 잃지 않았던 건,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는 아내라는 따뜻한 안식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환갑을 넘긴 그녀는 이제 나의 가장 날카로운 독자이자 열정적인 응원군이다. 또한 서른 중반에 접어든 딸과 아들까지 합세해 “아빠가 우리 집 최고” 라며 엄지를 치켜세울 때면, 나는 수백 미터 높이의 빌딩을 완공했을 때보다 더 큰 짜릿함을 느낀다.
35년 전, 낙동강 변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그 수줍던 아가씨와 같이 그렸던 내 인생의 설계도는 한 치의 오차 없이 완벽하다. 난 이대로 쭉 우리 인생의 마천루를 완성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