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유곡동의 꿈, 나의 첫 삽
1990년 1월 대학 졸업과 동시에 신화건설에 합격하고 의기 당당하게 출근을 하였다. 본사는 마포 용강동에 있는 신화빌딩을 사옥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입사 후 처음에는 복사도 하고 팩스 심부름도 하면서 정신없는 수습사원 시간을 보냈다. 처음 입사했을때의 선배들과 동료들이 지금은 다 뿔뿔이 흩어져 소식을 모르지만 아무것도 몰랐고 순진했던 나의 직장생활 이정표가 되어주셨던 선배님들께 우선 감사드린다.
나의 건설 인생 첫 장이 펼쳐진 곳은 울산시 중구 유곡동에 짓는 신화유화공장의 사원아파트 건설 현장이었다. 신입 건축기사의 심장은 터질 듯한 의욕으로 가득했지만, 처음 마주한 현장의 공기는 차갑고도 낯설었다. 당시 건설 현장은 모든 것이 아날로그였다. 현장에서 자재 청구를 하려 하면 청구서를 일일이 수기로 작성해서 본사로 팩스를 보내면 본사에서 일괄 구매 후 현장 도착으로 구매해 주던 시절이었다.
현장의 다양한 자재나 장비의 한국어와 일본어가 혼재된 현장 용어와 낯선 영어 명칭들 사이에서 나는 평생 잊지 못할 신입의 실수를 저질렀다. 수입산 화장실 도기 자재를 신청하던 중이었는데 품목마다 똑같은 이름을 반복해 쓰기가 귀찮았던 나는, 상동(上同)을 뜻하는 영어식 표현 ‘ditto’를 칸마다 호기롭게 적어 내려갔다. 처음 접하는 자재임에도 명칭에 대한 정확한 이해없이 대충 처리한 것, 그것이 화근이었다.
공교롭게도 당시 본사 구매팀은 울산 석유화학단지 내 대규모 플랜트 공장 자재도 함께 구매 절차를 진행하고 있었다. 내 청구서를 받아 든 본사 담당자는 이 Ditto를 고가의 특수 기계 장비 명칭으로 오인했고, 하마터면 엄청난 금액의 잘못된 발주가 나갈 뻔했다. 천만다행으로 최종 발주 확정 단계에서 담당자가 현장에 재 확인을 한 덕에 대형 사고는 면했지만, "이게 지금 제정신으로 일한 거야, 야 인마, 너 미쳤어?" 그날 소장님의 불호령은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눈물이 쏙 빠지게 혼이 난 나는 현장의 기술자가 찍는 쉼표 하나, 단어 하나가 회사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는 무거운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후로 난 현장에서 발생하는 어떠한 일이라도 기술자의 잘못된 판단이나 작업지시가 협력사에게는 엄청난 손해를 입힐 수 있다는 사실을 늘 강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어떤 공정이라 할지라도 자재와 장비의 명칭을 명확히 이해하고 확인하는 결벽에 가까운 습관을 갖게 되었다.
현장은 다양한 삶의 방식이 적나라하게 부딪히는 거대한 가마솥이나 다름 없었다. 한 번은 전라남도 순천 출신의 의욕 넘치는 목수 반장님과 정면으로 충돌한 적이 있다. 당시는 거푸집을 현장에서 직접 제작해 쓰던 시절이라 자재 효율이 곧 공사비와 직결되었던 터라 합판과 각재를 제작도에 준해 수량을 산출하고 자재를 청구하기에 자칫 방심하다간 모자라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평소 나와 하하호호하며 잘 지내던 목수 반장님이 멀쩡한 새 합판과 각재를 마구 잘라 쓰는 모습이 포착된 것이다. 자재 관리를 철저히 하라는 선배 건축대리의 잔소리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였던 혈기 넘치던 나는 순간 무슨 사명감이었는지 도저히 보고 넘길 수가 없었다.
“아니 반장님, 왜 아까운 새 합판을 그렇게 마음대로 잘라씁니까? 왜 제작도 대로 안합니까?”
내 갑작스런 고함과 지적에 목수 반장은 황당하다는 듯이 톱질을 멈추고 핏대를 세우며 맞섰다.
“뭐라고? 네가 뭘 안다고 그래. 알지도 못하는 놈이 어디서 지랄이야. 내가 다 생각이 있어서 하는거지. 모르면 가만히 있어, 어디서 새파란 놈이!”라는 고함과 함께 서로 멱살잡이까지 오가는 험악한 상황이 벌어졌다.
나도 명색이 건축기사인데 오기가 생겨 덩치는 작았지만 물러설 수가 없었다. 주변에 있던 동료 목수들까지 합세하여 험악한 분위기까지 도달했으나 건축대리님의 중재로 서로 죽일놈 살림놈 하면서 씩씩거리다가 끝이 났다. 하지만 그날의 격렬한 충돌은 오히려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그날 저녁, 현장소장님이 자리를 만들고 현장 인근 식당에서 투박한 소주잔을 기울이며 우리는 극적으로 화해했다.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시작한 대화로 마음을 연 반장님은 그래도 젊은 기사가 다부진것 같다고 하면서 “한잔 합시다. 뭐 현장이 다 그런거지” 하면서 훌훌 털어 버렸다.
그날의 싸움이 전환점이 되어 그 다음 날부터 나를 만나기만 하면 합판 자르는 요령부터 못 박는 기술, 각재 수량 산출하는 요령등 합판 거푸집의 설치 원리부터 효율적인 해체 요령까지, 전공서에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것들을 아주 재미있게 들려 주었다. 오롯이 몸으로 때우고 망치질하면서 실전 경험을 통해 배운 지식과 본인의 노하우들을 수시로 말해주었고 난 재미있게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덕분에 나는 신입 건축기사 주제에 거푸집 제작도를 직접 그릴줄 도 알고, 골조 공사의 흐름을 완벽히 이해하는 기초 체력을 다질 수 있었다.
그리고, 군대에서 겪었던 전라도에 대한 좋지 않은 경험으로 항상 지역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많은 대화를 하다보니 타지인 경상도 현장에서 그가 겪는 외로움과 애환을 깊이 이해하게 되면서, 지역감정이라는 얄팍한 편견을 버리고 사람 그 자체를 먼저 보는 법도 배웠던 계기가 되었다.
첫 현장에 늘 정겨운 낭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건설업의 냉혹하고 어두운 이면을 목격하며 몸서리치던 순간도 있었다.
어느 날, 골조 협력업체가 심각한 노임 체불 사태를 일으켰다. 분노한 수십 명의 철근공들이 철근과 쇠파이프를 들고 현장 사무실을 덮쳤다. 평상시에 아주 사이가 좋고 일도 잘하는 아주 선량한 분들이었으나 자기가 일을 하고도 노임을 받지 못하자 갑자기 돌변해 버린것이다. 폭언이 오가고 사무실 집기가 날아다니는 공포 속에서, 우리 직원들은 밤늦게 중요 서류 뭉치를 품에 안고 도망치듯 사무실을 뛰쳐 나와야 했다.
당시 문제의 협력회사 사장은 그 당시는 고급 승용차였던 소나타를 타고 다니며 현장소장 앞에서는 온갖 아부 섞인 말을 늘어놓던 울산 토박이인 사람이었다. 겉으로는 번지르르하게 가끔씩 우리 직원들에게 밥도 사고, 또 명절때면 선물 보따리를 들고 와 생색을 내기도 했지만, 실상은 재하도에 재하도를 거듭하며 정작 현장에서 피땀 흘리는 작업자들에게는 임금조차 제대로 지불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다단계 하도급 구조의 가장 밑바닥에서 절규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원청 직원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책임감이 얼마나 무겁고 엄중한 것인지 가슴 깊이 새겼다. 그것은 단순히 공사를 관리하는 것을 넘어, 현장의 정의를 지켜야 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사흘이나 지나서야 그 사태가 해결되었고 우리는 그 이후 매월 공사비를 지급 할 때 현장 작업자들의 노임이 최 우선으로 지불되는지를 늘 확인하였고, 다행히 준공시까지 두번 다시 그런일이 재발하지는 않았다.
낯선 타지에서 고된 현장 생활을 버티게 해 준 것은 결국 사람이었다. 현장 근처에는 인심 좋은 울산 토박이 중년 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민가가 있었다. 마땅한 식당 하나 없던 황량한 곳에서 그곳은 우리에게 유일한 안식처였다.
서울에서 갓 내려온 삐쩍 마른 총각 기사가 안쓰러웠던지, 아주머니는 늘 밥공기에 밥을 꾹꾹 눌러 고봉밥을 담아주며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셨다.
“김 기사님, 많이 드세요. 총각 때는 든든히 먹어야 일도 잘하지.”
그때 처음 맛본 짭조름하면서도 쿰쿰한 콩잎 장아찌의 맛은 35년이 지난 지금도 혀끝에 생생한 향수로 남아있다. 그 투박하지만 따뜻했던 밥상이 없었다면, 낯선 타지에서의 모진 현장 일과를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서울 촌놈이라고 나를 유독 챙겨 주셨던 두 분이 지금도 그립다.
서울 잠실 연탄 난방 아파트가 집이었던 배원* 현장소장님은 주말이 되면 늘 항공편을 이용해서 서울 집엘 갔는데 내가 공항으로 모셔다 주곤 했다. 그때 승용차가 스쿠퍼였는데 주말만 되면 우리는 소장님 차를 가지고 경주로 김해로 여기 저기 스트레스를 풀러 신나게 돌아다녔다.
아마 소장님도 운행 거리를 보고 알았을텐데 단 한마디도 한적이 없었다. 그렇게 함께 했던 57년생 정의*, 나영*, 59년생 권세* 대리, 그리고 사무보조 직원까지. 6명의 식구가 가족처럼 서로를 보듬고 부대끼며 마침내 유곡동 현장을 성공적으로 마감했을 때, 나는 생애 첫 번째 거대한 성취감을 맛보았다.
비록 거창한 마천루는 아니었지만, 내 손길과 땀방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그곳에서 나는 비로소 학생의 티를 벗고 진짜 건설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