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바람을 맞으며 서다, 해외 현장의 시간들_1

LG북경타워 (중국)

by 김영조

대한민국 건설의 황금기를 넘어, 나는 이제 국경을 넘어선 미지의 땅으로 나아갔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 예측 불가능한 정치·경제적 리스크 속에서 나는 맨몸으로 부딪히며 글로벌 건설인으로서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갔다. 베이징의 칼바람부터 캄보디아의 뜨거운 태양까지, 그 치열했던 기록들을 여기에 남긴다.


가족과 함께 건넌 대륙: 북경의 하늘아래, LG북경타워를 올리다 (중국)


2002년 10월, 나는 베이징 수도(首都) 공항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 시기에는 회사에서 가족동반을 허용하였기에 3년 기간의 어학연수를 한다는 생각으로 초등학교 1, 3학년을 마친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무작정 비행기에 올랐다.


아직 한중 수교 전이라 중국에 대한 막연한 경계심과 죽의 장막이라 불리던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두려움이 팽배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는 차창 밖 풍경은 나의 선입견을 산산조각 냈다. 눈앞에 펼쳐진 베이징의 역동적인 모습은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북경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우리의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교육이 얼마나 왜곡되었는지 그땐 몰랐었다. 중국의 온전한 정보가 전달되지 않았고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중국을 평가절하한 것에 미안하기도 했었다.


LG그룹은 2000년 초부터 중국을 제2의 내수 시장으로 삼는 현지화 전략을 펼쳤고, 그 결실로 베이징 비즈니스 중심지(CBD)인 창안대로(長安大路)에 랜드마크 건립을 추진했다. LG북경타워는 LG전자를 중심으로 그룹의 중국에 진출해 있는 각 계열사들의 사옥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여의도 LG트윈타워와 유사한 목적이었다.


특히 화교나 홍콩 자본이 아닌 순수 외국 기업이 베이징 중심부에 세운 최초의 건물이라는 위상을 가졌고 LG트윈타워(LG 双子座大厦 Shuāngzǐzuòdàshà, 双子座은 쌍둥이, 大厦는 빌딩 )라는 명칭으로 출발, 이후에는 건물의 외관이 립스틱을 닮았다고 하여 중국인들에게 친숙하고 세련된 립스틱 타워(口红大楼 Kǒuhóng dàlóu, 口红은 '립스틱', 大楼는 '빌딩’'을 뜻)라는 애칭을 얻으며 프리미엄 브랜드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이후 LG그룹은 2020년 2월, 이 빌딩을 싱가포르 국부펀드인 GIC에 약 1조 3,700억 원에 매각했고, 이후 건물 명칭이 The Exchange Twin Towers(汇京双子座大厦, 후이징 트윈타워)로 변경되어, 현재는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거쳐 프리미엄 오피스 및 상업 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LG북경타워 전경(사진: 작가 소장)


LG북경타워 전경(사진: 작가 소장)

LG북경타워는 지하 4층 ~ 지상 30층 철골철근콘크리트구조 (2개 동, 높이 140.5m), 연면적 148,500㎡ 규모의 오피스 빌딩으로 설계는 미국 SOM, 시공은 LG건설 및 중국국영건설사가 공동으로 시공, 2002년 6월에 착공하여 2005년 11월에 준공하였다.


주요 적용공법으로는 Slurry Wall 흙막이, MAT 기초, 코어선행(Doka ACS Form), Unit 커튼월등이 있으며, 특히 외벽에 사용한 유리는 최고급 Interpane社(독일) 에메랄드 로이(Low-E) 수입 완제품으로 북경의 중심에 짓는 LG그룹의 프리미엄 브랜드의 위상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중국어 한마디 못하던 나는 38개월 내내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중국어를 공부하고 익혔다. 우리는 그나마 중국과 같은 한자 문화였기에 문자를 보면 뜻은 어느 정도 알 수가 있어서 접근하기에 아주 낯설지는 않았지만 중국어는 사성조의 특성이 있는 의미어(意義語)인 관계로 단어나 발음을 익히기에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저녁엔 개인교습으로, 식당에선 손짓 발짓으로, 그리고 중국 건설사 직원들과의 업무 협의 및 중국어로 작성된 각종 기술서 검토등을 통해 중국어 실력은 빠르게 늘었다. 일 년 후쯤에는 중국어 회의에 통역 없이 80% 이상의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발전했고 준공 후에는 건설분야에 한해서는 통역이 가능할 수준까지 도달했다. 지금 같으면 AI가 있어서 아마도 저렇게 열정적으로 공부를 하진 않았을게다.


LG북경타워에서의 건설공사 경험은 나의 건축공사에 대한 새로운 경험치와 시야를 넓히는 훌륭한 계기였다. 엄청난 규모와 선진 제조설비를 자랑하는 철골 제작공장, 커튼월 제작공장, 석재공장들을 직접 방문해 보면서 국내의 그것들과의 스케일의 차이와 함께 나의 기술적인 안목이 한층 더 발전하였다.


화려한 초고층 건물의 모든 건축자재를 자국에서 생산할 뿐 아니라 경쟁력 있는 단가로 수출까지 하는 인프라가 충분한 환경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창의적이고 아이디어가 풍부할지 상상이 되고 어떠한 건축물이던지 다양한 방식의 기술적용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중국 건설사 직원들은 한국의 계급적 직위체계의 상하향식 구도와는 전혀 다른 수평적 문화였다. 직급은 있었지만 단지 업무분장을 위한 명칭일 뿐 상급자의 지시에 무조건 따라야 하는 일방통행의 조직문화가 아니었다. 아직 시스템이 완벽하지 않았을 뿐 개개인의 역량은 어느 국가의 엔지니어와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우리나라는 이십 년 후인 2020년대에 들어서야 대기업부터 수평적 조직문화를 강조하며 변화를 시도했으니, 남녀 구분없이 수평 문화에서 토론 중심의 시대를 겪고 자란 중국의 젊은 층들(1970년 문화혁명 이후 세대)의 개인적인 역량과 발전의 속도는 가히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예를 들면, 회의 시간에 현장소장이 지시를 하더라도 합당하지 않거나 다른 의견이 있으면 대리, 사원까지 누구라도 그 자리에서 자기의 의견을 개진하고, 또 상급자도 토론하듯이, 마치 당연한 듯이 의견 교환을 하면서 결론을 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물론 다 좋은 것만은 아니겠지만 토론 문화가 익숙한 것은 부러웠고 자신감 넘치는 젊은 엔지니어들이 무섭기도 했다.


구조엔지니어와 설계담당들의 기술적 지식과 열정들도 우리와는 확연히 달랐다. 60대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사람들에 전혀 손색없이 기술적으로 토론하고 항상 책과 설계서, 그리고 국가표준을 손에서 놓지 않고 어떠한 의견이나 요청에도 항상 긍정적이며 적극적으로 자기 일에 충실한 것을 보며 엔지니어들이 가야 할 바른길을 보았다.


직급과 나이로 일하는 우리나라는 경력이 쌓일수록 권위와 허세만 쌓이는 반면 이 나라는 나이나 경력과 무관하게 오로지 기술적인 지식과 소신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얼마나 형식에 얽매이며 생활하는지 너무나 많이 느꼈다.


기술자는 기술적인 지식이 완벽하지 않으면 진정한 기술자가 아니다. 직급이나 직위를 이용한 판단이나 의사결정은 실패할 확률도 높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경험도 물론 중요하지만 기술자가 지녀야 할 기본적인 인성과 전공분야에 대한 깊고 높은 지식이 갖춰졌을 때 비로소 엔지니어가 되는 것이고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내가 1991년에 느꼈던 기술자의 그릇된 사소한 판단 하나가 얼마나 많은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이 난다. 기술자는 처음부터 제대로 배워야 한다.


내가 하고 있는 건축물을 짓는 일은 단순히 건축물을 조각하는 예술가가 아니라 완성된 건축물을 수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느끼는 모든 불편함은 없애고 최고의 안전을 담보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들은 일단 중국이라 하면 우리보다 한참 뒤처진 것으로 무조건 판단하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은 너무나 단편적이고 무지한 생각이었다.


2010년부터 북경, 상해, 중경, 광저우, 심천등 중국의 대도시에 100층 이상의 엄청난 하이라이즈 건물이 마치 석림처럼 솟아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 배경에 우리가 무시하고 간과했던 어마어마한 건설 인프라와 경쟁력 넘치는 엔지니어 문화가 있었던 것이다.


상대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섣불리 판단을 하면 절대 이길 수가 없음을 3년 동안 절실하게 느꼈다. 나는 처음엔 선입견에 의해 의심을 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을 알고부터 그들의 방식을 진정으로 존중하였으며 한국 건설의 선진적인 공정 관리와 품질관리 시스템을 중국 건설사에 전파하며 그들과 우리의 장점들을 모아 시너지를 내도록 선도해 나갔다.


지금도 생각난다. LG건설의 박홍*소장님(현 창조건축 대표)과 허명*, 김종*, 김봉*, 오원*, 조승*과 발주처 박윤*대표를 비롯한 창조건축 파견 한국 직원들, 현지 채용 조선족 엔지니어들, 그리고 중건 1국 건설발전공사의 마신(馬信), 조국형 (趙國㦥), 그리고 여러 중국 엔지니어들.



사스(SARS)의 공포를 뚫고 피어난 립스틱 타워


2003년 봄, 베이징은 사스(SARS)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포에 휩싸였다. 사스는 2002년 11월 중국 광둥성에서 시작되었으나, 북경이 본격적인 공포에 휩싸인 것은 2003년 3월~6월 사이였다. 평소 활기차던 창안대로 와 왕푸징 거리는 행인이 뚝 끊겼고, 모든 시민이 마스크를 쓰고 서로를 경계했으며 학교는 휴교했고, 식당과 상점등은 문을 닫는 등 북경이 유령도시가 되었었다.


당시 북경에 거주하던 외국인들과 부유층은 전세기를 내어 탈출하기 바빴다. 북경이 봉쇄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면서 생필품 사재기가 일어났고, 도시 전체가 거대한 격리 수용소 같은 적막에 빠졌었다. 활기 넘치던 창안대로는 유령 도시처럼 변했고, 외국인들의 탈출 러시가 이어졌다.


본사에서 파견된 우리 직원 8명의 가족들도 서둘러 한국행을 향했다. 한국을 떠나올 때 살던 집들을 정리하고 왔으므로 갑작스레 한국에 장기간 거주할 거처 마련도 쉽지 않았고 그것보다 더 안타깝고 불편했던 것은 SARS를 피해 피난민처럼 온 가족들을 주변에서 경계하고 멀리하는 것 들이었다. 그로 인해 가족과 아이들은 또 다른 마음의 상처를 안고서 수 개월의 한국 피난생활을 했다고 나중에 소회를 했다.


수천 명의 농민공이 밀집한 우리 현장은 감염병의 화약고와 같았다. 중국 정부는 건설 현장에 이동 통제라는 강력한 봉쇄식 관리를 명령했고 인부들이 현장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고,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히 차단했다. 또한 북경 시내의 많은 건설 현장이 노동력 부족과 감염 위험으로 공사를 중단했다.


하지만 LG북경타워는 국가적 상징성과 공기 준수를 위해 멈출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부에서 외국자본 투자처인 발주처를 압박하여 공사중단을 하지 않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공동 시공사인 중국 건설사가 국영기업이었으므로 중국 정부의 방침을 거부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덕분에 우리 LG건설 직원들은 마치 조선시대 명나라에 볼모로 잡힌 것처럼 꼼짝없이 남아서 죽음의 경계를 눈으로 목도하면서 버텨냈었다.


가족들을 모두 한국으로 귀국시키고 혼자서 사스의 공포와 어려움을 극복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현장은 거대한 격리 수용소가 되었다. 매일 아침 인부들의 체온을 체크하고, 하루에도 몇 차례 씩 사무실과 식당, 숙소를 소독하며 방역 전쟁을 치렀다. 공포에 떠는 인부들을 다독이며, 우리는 묵묵히 희망을 쌓아 올렸다.


현장과 울타리를 공유하고 있던 바로 옆 현장에서 사망자가 나오고 적막감과 함께 엄습하는 공포감은 말로 표현할 수도 없었다. 백신 없는 전염성 바이러스로 전례 없는 사망자가 나오면서 2020년에 전 세계가 겪었던 코로나-19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공포 그 자체였다.


이렇게 어려운 속에서 악전고투하며 사스의 파도를 넘기고 현장 공정을 순조롭게 진행한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베이징시 당국으로부터 모범현장으로 선정돼 표창을 받기도 했다. 모두가 떠날 때 자리를 지킨 우리의 헌신 덕분에, LG북경타워는 사스의 파고를 넘어 창안대로를 밝히는 립스틱 타워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사스의 공포를 겪었음에도 영하 20도의 칼바람 속에서 야간작업을 함께 하던 날들, 그리고 완공 후 화려한 경관 조명이 켜졌을 때의 벅찬 감동은 평생 잊지 못할 훈장이다.


LG북경타워 야경(사진:구글이미지)


국내와는 전혀 달랐던 중국의 건설 방식에 놀라다


현장은 서울로 치면 을지로 입구 정도 되는 위치에 왕복 12차선 도로(장안가)에 접해 있으며 길건너편은 대사관 구역으로 각국의 대사관이나 영사관들이 밀집되어 있는 도심 CBD AREA에 위치하고 있다.


현지 시공회사는 중국 건설국영기업그룹인 “중국건축그룹 중건 1국 산하 중건 1국 건설발전공사”라는 건설회사로 우리나라 기준으로 보면 GS건설 정도의 규모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2000년도 초의 중국 내 경제상황을 보면 본격적인 개방정책이 막 시작하는 단계로 수억 명에 달하는 농민들과 빈곤층을 먹여 살리는 정책이 가장 시급한 상황이었다.


중국 농민공(사진: 구글 이미지)
중국건설현장 작업자(사진: 작가소장)


그러다 보니 건설현장의 작업방식이 가급적 장비를 사용하기보다는 인력을 사용해서 일하는 방식으로 보편화되어 있었고, 또 다행히도 인력으로도 거뜬히 장비작업에 준하는 정도의 성과를 내고 있었다.


현장에 입고되는 각종 자재류들, 예를 들면 강관파이프류나 철근, 거푸집등 중량물이 아닌 것은 가급적 인력으로 상, 하차작업을 하였고 철골부재나 기계류 등 중량물들만 타워크레인이나 이동식 크레인을 활용하였다.


처음 너무나 놀랐던 것은 Slurry wall 시공을 하기 위한 Guide wall 시공을 해야 하는데 아침에 출근해서 현장을 둘러보니 인부 수십 명이 각자 삽을 한 자루씩 들고 일열로 줄지어 땅을 파는 게 아닌가? 폭 1.2미터, 깊이 1.5미터를 파야하는데 한국 같으면 당연 포클레인을 동원해서 하루에 몇십 미터씩 파 나가지만 오로지 인력으로 삽으로만 수십 명이서 2미터 간격으로 줄지어 시공했다.


오 마이갓. 충격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충격이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마치 조각한 듯이 도면대로 정확한 크기로 터파기가 되어 있었다. 마치 합판으로 거푸집을 대놓은 듯 했다.


만약 한국처럼 포클레인 장비를 활용했다면 울퉁불퉁 오버컷이 되어 있었고 실제 콘크리트 양은 최소 20% 이상 추가로 투입되었을 텐데 워낙 낮은 인건비 탓에 총 투입 원가도 낮고 레미콘 할증도 줄이고.


겉으로 보기엔 허술하였으나 중국의 그 당시 사회환경을 감안했을 때 함부로 폄하해서는 안된다라고 생각하고 우리 한국에서 파견된 직원들끼리 많은 자성을 했다.


기초는 지반 상태가 양호하여 기초형식은 매트 기초로 설계되었고 3미터 두께였는데 전체 바닥을 3개 zone으로 구획하고 기초공사를 진행하였다. Delay pour strip을 반영하여 중앙부를 최종 타설하고 좌우측을 먼저 타설 하는데 1개 zone 타설량이 약 3500m 3였다. 서울의 을지로 같은 복잡한 도심에서 3800m 3의 콘크리트를 연속타 설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협소한 현장부지, 좁은 이면도로, 도심지 교통체증등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기 위한 고민 끝에 펌프카와 경사슈트를 혼용한 타설방법으로 결정하고 20시간 내 타설을 완료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출근시간이 끝난 아침 10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지 꼬박 20시간을 타설 하는 대 역사를 만들었는데 한국의 건설현장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오피스 빌딩 외곽에 배치된 14개의 기둥은 직경 1미터의 원형기둥으로 설계가 되었다. SRC구조에서 거푸집 계획은 너무나 제한적이었기에 그 당시에 국내에서는 철판 거푸집을 만들어 적용했을 텐데 중국에서의 거푸집은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요즘이야 직경 400MM 이하 원형기둥은 원형주름관을 이용하고, 그 이상의 원형기둥은 종이거푸집이 개발되어 저렴한 비용으로 시공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자재가 없었기에 원형기둥으로 설계를 하질 않을 때였다.


현장에 적용한 거푸집은 바로 FRP 거푸집이었다. 6MM 두께의 FRP를 원형기둥의 외피 크기로 만들고 연결부에 소형 앵글을 양면에 설치하여 볼트 조임하고 기둥의 상, 하부에는 원형 앵글을 힌지 시스템으로 만들어서 고정으로 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콘크리트 타설 전 4면에 와이어로프로 고정하여 수직도를 유지하며 시공하는데 너무도 편리한 방식이었다.


유로폼을 붙이는 것보다도 쉬운 방식이었다. 물론 구조검토과정을 거쳤고 북경설계원의 구조전문가의 승인을 받은 방식이었다. 이후 이 방식을 국내에 도입하기 위하여 몇몇 골조업체와 의사타진 하였으나 국내에서 대형 원형기둥을 설계하지도 않고 수요가 없으므로 관심을 갖지 않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잊혀 안타까웠다.


중국 국영 건설사와 공동 시공을 진행하며 경험한 현지의 특징은 건설 기술자로서 매우 귀중한 자산이었다.


첫째는 인력 동원 능력이 상상을 초월하며, 특정 공기 단축이 필요할 때 발휘되는 집중력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이는 건설업에서 숫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엄청난 경쟁력이 된다.


둘째는 인허가 과정에서 정부 부처와의 관계(關係, Guanxi)와 로컬 규정이 매우 엄격하여, 이를 조율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성패를 좌우했다. 셋째는 중국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인프라와 시공 경험들이다. 약 서른 개가 넘는 성과 자치구의 건설 방식이나 사용 재료가 다양하고 수많은 시공 사례를 기반으로 시공표준과 설계표준이 명확하므로 불확실성이 현저히 낮다.


넷째는 시공문화의 차이로 정밀 시공보다는 속도와 외관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한국 건설사의 꼼꼼한 품질 관리 시스템과 기준을 이식하며 시너지를 내는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가족의 미래를 바꾸게 된 LG북경타워


이곳 베이징에서의 38개월은 내 가족에게 삶의 미래를 바꾼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본인들의 의사와 전혀 무관하게 처음 낯선 중국땅에 발을 딛고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중국인 초등학교에 입학해 힘들어하던 아이들은, 한동안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울고 불고 혼란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한창 뛰어놀던 9살, 11살짜리 어린애들이 친구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고 문화나 환경도 전혀 다른 상황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지만 시간이 약이었는지 곧 적응하였고 현지 초등학교와 국제(International) 중고등학교를 거치며 상위 수준의 학업 성적을 유지하면서도 여러 가지 교내 활동들을 하면서 서구식의 토론문화를 체질화하게 되었고 네이티브 수준의 중국어와 영어 실력도 갖추게 되었다.


아내 또한 10년이란 시간을 아이들과 중국에서 보내다 보니 중국어가 익숙한 환경이 되었다. 물론 10년 중 6년 이상은 나와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가족들이 겪은 타국에서의 애환과 고단함은 실로 컸을 것이다.


훗날 아이들이 중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중국어와 영어에 대한 어학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고, 상위 수준의 SAT 성적을 받아 대학 진학 시에도 택할 수 있는 여러 선택지를 마주할 수 있어서 수능과 대입에 대한 스트레스는 없었다.


KAIST(한국과학기술원)로 진로 확정 후 석사, 박사학위까지 취득하여 S전자 R&D 분야에 있는 딸과, HKUST(홍콩과학기술대)로 진학해서 기업에서 본인이 원하는 전략기획 일을 하고 있는 아들의 값진 결실의 씨앗은 바로 LG북경타워 현장에서 싹이 텄다고 할 수 있다.


2002년 10월에 북경 공항에 발을 내딛게 된 것은 어쩌면 나와 우리 가족이 현재 우리의 모습이 반영된 새로운 삶에 대한 신의 계시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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