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와호장룡> (2000)
소륜(장쯔이 역)은 결혼을 곧 앞둔 옥 대인의 딸이다. 그녀는 무술을 닦으며 살고 있는 수련(양자경 역)과 이목백(주윤발 역)을 부러워하며 자신의 집을 방문한 수련에게 결혼이 아니라 강호의 세계에서 자유롭게 유영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친다. 이목백이 사용하던 청명검을 탐하던 소륜은 그것이 보관되어 있는 철 어르신의 집에 몰래 잠입한다. 청명검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수련과 그것을 가지고 무사히 빠져나가려는 소륜의 대결의 끝에는 홀로 남은 수련만이 보인다. 대결은 마치 두 무사의 부딪힘이 아니라 각자의 내면을 바라봄에 더 가깝다는 듯.
한편 소륜은 티베트에서 우연히 소룡(장첸 역)을 만난다. 소륜이 아끼던 빗을 빼앗아 자신의 공간으로 소륜이 들어오도록 이끈 소룡은 그녀가 계속 티베트에 머물며 자신과 함께 하길 바란다. 몸으로 부딪히며 거짓되지 않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둘의 관계이지만 티베트가 결코 종착지가 될 수 없다는 듯 소륜은 소룡과 멀어지고 가까워지기를 반복한다.
소륜은 ‘파란 여우’(정패패 역) 아래에서 검술을 배웠으나, 그의 기술을 이미 뛰어넘은 지 오래다. 이목백과의 대결 이후 소륜은 자신이 무당심결을 잘못 배웠다는 것을 깨닫고, ‘파란 여우’는 소륜의 실력이 이미 자신을 뛰어 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이목백은 무당심결을 소륜에게 제대로 가르쳐 주겠다는 제안을 하나, 소륜은 청명검의 힘을 믿고 여전히 ‘화려한’ 기술과 실력을 뽐내며 다닐 뿐이다. 그에 비해 이목백의 움직임은 최소화되고 절제되어 있다. 둘의 움직임은 마치 대칭의 구도를 가진 듯 보인다. 하지만 그조차 완전한 완성의 단계에, '비움'의 상태에 도달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사부를 죽인 '파란 여우'와의 결투 끝에 '파란 여우'의 죽음으로 그 복수를 실행하지만, 그또한 독침에 맞아 죽음이 목전에 와 있다. 소륜이 해독제를 만들어 오는 동안 명상을 하는 이목백의 곁을 수련이 지킨다. 하지만 독은 온몸으로 퍼져나가 마지막 숨만이 남아 있다. 이목백은 마지막 숨을 수련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데에 사용한다. 서로의 마음을 숨기고 살았던 두 사람은 결국 서로를 바라보는 대결의 구도가 아니라 스스로를 탐독하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사랑을 전한다.
강호에서 맴돈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욕망들을 비운 상태에 도달하고, 그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것을 비워내는 과정과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