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Kids Feb 02. 2022

거짓 안에 쌓여 있던 진심이 가 닿았을 때

영화 <색, 계> (Lust, Caution, 2007)

카메라 안에서 무대 위로

영화는 1942년 중화민국 왕징웨이 괴뢰정부에서 정보부 대장인 ‘이’(양조위 역)의 부인(조엔 청 역)을 중심으로 막 부인을 포함한 여러 부인들이 마작을 두고 있다. 마작의 말이 오가며 컷들이 빠르게 전환되며 시작한 영화는 왕치아즈(탕웨이 역)가 어떻게 막 부인이 되었는지 설명하기 위해 링난대학에 막 입학하여 연극을 시작하는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아 간다. 이처럼 영화는 초반의 장면을 철저히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컷들로 만든다. 이는 처음 ‘이’에게 접근한 홍콩에서 막 부인을 연기하는 왕치아즈가 지극히 영화의 연기를 하고 있음과 연관된다. 영화는 편집을 통해 자신이 어떤 모습을 보일지 선택할 수 있고, 그래서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제외시킬 수 있다. 그렇기에 영화를 보는 관객이 보지 못하는, 잘려 나간 공간이 생긴다. 왕치아즈는 카메라 안에서 연기를 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막 부인인 동시에 대학생 왕치아즈로 살아갈 수 있다. 그가 연기하는 영화 속의 배경은 ‘이’의 저택이고,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집은 영화에서 제외되는 공간이기에, 그녀는 영화의 안과 바깥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막 부인과 왕치아즈를 오가며 생활한다.


동시에 영화는 영화관에서 상영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때 영화관은 왕치아즈가 숨을 수 있는 또 다른 공간으로 기능한다. 그녀는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릴 만큼, 영화관 안에서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암흑의 공간에서는 그녀가 우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한 영화관은 몰래 스파이로서 지령을 받고 그 과정들을 공유할 수 있는 곳이므로, 자신이 연기하는 ‘막 부인’이 거짓임을 자각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스파이로 활동하는 왕치아즈에게 극장은 오로지 ‘왕치아즈’로 존재할 수 있는 곳인 셈이다. 즉, 홍콩에서의 스파이 생활은 왕치아즈로 존재할 수 있는 일련의 공간들이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사실 막 부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광유민(왕리홍 역)의 선배(전가락 역)에게 들키게 되자, 그녀는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3년이 지나고 상하이에서 다시 시작된 스파이 활동은 이전 홍콩에서의 그것과 궤를 달리한다. 이러한 변화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왕치아즈에게서 먼저 감지된다. 극장 안에서만큼은 아무런 방해 없이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며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극장의 영화도 변했다. 영화를 몰입해서 보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세계 영화 뉴스’가 등장하며 영화 감상을 방해한다. 극장은 더 이상 그녀에게 안식처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왕치아즈는 ‘이’를 유혹하라는 지령 아래 전략적으로 ‘이’의 저택에서 머무르게 되면서 홍콩에서의 상황과 달리 언제나 막 부인이어야 한다. 왕치아즈에게 자신을 숨길 수 있는 공간은 없다. 그렇기에 상하이에서 스파이 생활은 영화의 연기라기 보다 연극의 연기에 가깝다. 무대 위에 오른 이상, 배우는 도망갈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다. 그 위에서는 자신의 모든 것이 노출된다. 이제 왕치아즈는 카메라 안이 아니라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해야만 한다.


네가 믿을 만한지 아닌지는 상관없어. 내가 너를 믿어

자신의 감정을 숨길 공간을 잃은 왕치아즈는 막 부인이 되어 ‘이’를 사랑하는 척 연기하는 동시에 ‘이’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 사랑의 감정을 ‘이’의 마음 속에 숨겨 놓는다. ‘이’는 막 부인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그녀를 경계하고, 완전히 그녀를 신뢰하지 못한다. 이러한 관계는 영화에 등장하는 왕치아즈와 ‘이’의 첫번째 섹스 신에서 뚜렷하게 확인된다. 이 신은 모든 것을 본인이 장악해야 하는 ‘이’와 처음엔 당황스러워하지만 이내 그에게 순순히 포섭되는 왕치아즈의 구도로 설명된다. 깜깜한 극장 안에 있으면 무방비 상태에 놓이기 때문에 그 곳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 ‘이’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게 했던 것은 자신의 손 안에 있는 것은 모두 통제 가능해야 한다는 감각이었다. 그것을 짐작한 왕치아즈가 ‘이’에게 통제당하는 척하면서 자신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그랬던 왕치아즈가 질투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그를 사랑하는 척 연기하는 동시에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왕치아즈는 ‘이’에게 솔직하지 못한 동시에 가장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두번째 섹스 신에서 ‘이’ 또한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음이 드러난다. 둘의 섹스 신과 그 섹스가 이루어지고 있는 집 바깥에는 경비가 삼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이 교차편집 되는데, 이는 여전히 ‘이’가 왕치아즈를 통제하고, 경계하고 있지만, 동시에 자신의 통제를 울타리 삼아 그녀를 보호해 주고자 한다는 것이 여기서 드러난다. 즉, 이들이 주고받는 감정의 상호작용은 대칭적이다. 한쪽의 일방적인 감정에 의해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서로에 대한 감정은 마치 거울과 같아서, 상대를 향한 마음이 곧 상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된다. 마지막 섹스 신에서 왕치아즈는 잠시지만 섹스를 하면서 그의 눈을 가린다. 그리고 자신이 주도권을 잡는다. 이것은 왕치아즈가 ‘이’에게 자신에게 몸과 마음을 맡겨도 된다는, 다시 말해 자신을 믿고 안심해도 된다는 일종의 시그널이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왕치아즈 자신도 ‘이’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그의 사랑은 연기인 동시에 연기가 아닌 셈이다.


일본 조계지의 어느 사창가 식당에서 단 둘이 만나고, 그 방에 혼자 앉아 있던 ‘이’는 문 바깥에서 자신의 방 쪽으로 향하고 있는 일본 군인들을 보고 자신의 얼굴을 가린다. 이러한 행동은 단순히 자신이 밀애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고 싶은 양조위의 마음을 반영한 것만이 아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가 자기 자신을 숨기는 데 익숙한 사람이고, 자신이 드러나는 것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임을 보여준다. 왕치아즈는 말없이 그 문을 닫으며 자신을 숨기고자 하는 ‘이’의 행동에 동조한다. 이는 그에게 신뢰를 얻기 위해 애를 쓰는 행동이었다기 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에 가깝다. 일본 노래가 들려오자 왕치아즈는 ‘이’를 향해 ‘천애가녀’를 부른다. 노래하며 자신을 유혹하는 그녀를 보면서 그는 말없이 담배를 입에 물고, 웃는다. 그리고 눈물을 보인다. 더 이상 그에게 그녀는 ‘믿을 만한 사람’처럼 보이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듯 보인다. 그가 그녀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증표로 그는 그녀에게 다이아몬드를 선물해 준다. 이 다이아몬드는 왕치아즈의 연기가 ‘이’에게 통했다는 증거로 드러난다.


무대 위에서의 연기는 즉각적으로 그 연기에 대한 관객의 반응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그렇기에 무대 위에서의 연기는 일방향적이지 않다. 자신의 연기로 인해 감명받은 관객을, 배우 또한 그들을 본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렇게 배우도 관객의 반응에 감동을 받는다. 즉, 무대 위에서 자신의 연기가 순항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각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과 마주하여 앉아 있는 관객이 건네는 신호라 할 수 있다. 왕치아즈는 홍콩대에서 연기를 처음 시작하면서 무대 위에 오른 자신을 통해 관객을 감동시킨 경험이 있다. 그렇기에 그녀는 상하이에서 막 부인으로 살면서, 자신의 유일한 관객인 ‘이’에게 자신의 연기가 성공적으로 전달되고 있는지 확인하게 된다. 그것이 확인되는 순간 자신도 이에 반응한다. 그래서 영화는 단순히 왕치아즈에게 다이아몬드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이’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간다. 자신이 끼고 있는 다이아몬드가 어떠하냐는 왕치아즈의 말에 ‘이’는 ‘그저 그 다이아몬드를 낀 당신의 손을 보고 싶었다’고 답한다. 그렇게 왕치아즈는 자신의 연기 안에 숨어 있던 ‘이’에 대한 진심까지 ‘이’가 알고 있다는 그의 반응을 확인한다. 그녀는 그 순간 미친듯이 흔들리고, 그렇게 숨겼던 진심을 결국 드러낸다. 그렇기에 이들의 사랑은 무대 위에 공연되고 있는 연기의 일종인 동시에 서로의 진심을 주고받은 현실의 감각이다. 그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그를 먼저 귀금속방으로 유인했던 왕치아즈는 군말 필요 없이, 그

에게 ‘빨리 피하라’는 말을 겨우 전한다.



연극이 다시 영화가 되어

왕치아즈가 ‘이’를 관객으로 삼아 연기하고 있는 무대 위가 하나의 연극이라면, 연기자 왕치아즈와 관객 ‘이’를 모두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관객이 존재한다. 이들은 연극과 달리 영화 속 배우와 그 바깥에서 그를 바라보는 관객은 영상 속 배우에게 아무런 개입도 할 수 없고, 배우의 연기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마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관객과 다름없다.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 영상 속 배우의 행위가 거짓인지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배우가 보여주는 모든 것을 지켜볼 뿐이다. 배우 또한 멀리서 (혹은 화면 바깥에서) 관객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시선은 그저 시선으로 남을 뿐, 왕치아즈의 마지막 결단에 영화의 관객들은 아무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왕치아즈는 ‘이’와 첫 섹스를 마치고, 그 사실을 광유민에게 말한다. 그러자 광유민은 그것을 다 지켜보고 있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이’를 관객으로 삼아 연기를 펼치는 왕치아즈의 모습을 관객의 시선으로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는 자신의 시선을 밝힘으로써 그녀의 무대는 하나의 영화로 등장하게 된다. 그래서 우 영감과 광유민은 스파이인 왕치아즈에게 명령할 수는 있지만 그녀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개입하지 못한다. ‘이’ 앞에서 흔들리는 왕치아즈를 발견하고 광유민은 그녀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하지만, 그 또한 무력하게 힘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도 이를 말해준다.


그렇게 모두가 지켜보고 있던 영상 안의 왕치아즈는 연기를 하는 동시에 실제 사랑을 했다. 그들의 사랑은 끝났지만, 그 사랑은 왕치아즈가 막 부인이 아니라 스파이였다는 사실 하나로 숨겨질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마음을 주고받았고, 서로 의지하는 존재였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녀는 오직 ‘이’의 마음에서만 자신의 진심을 숨겨 두었다. 세상 모두가 왕치아즈의 연기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녀 앞에 앉아 있던 유일한 관객은 ‘이’ 한 명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유일한 관객이었던 그에게 진심을 전했다.


Written by 아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