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 됐을까.
“안녕”
“안녕”
수줍게 인사하고 엄마 뒤로 슬쩍 숨었다. 뭐라고 말도 좀 붙여보고 싶고, 그렇긴 했지만 막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도 안 나고 좀 부끄럽기도 했다. 그래도 동네에 누가 온다는 게 특히 내 또래가 온다는 건 기쁘고 좋았다. 그냥 사람이 좋고, 반가웠다.
시골에 살다 보면 집집마다 일 년에 서너 번씩은 할머니댁에 찾아오는 손주들이 있다. 내가 태어나 자란 감나무정마을은 안동 권 씨 집성촌이라 서로 따지고 보면 사촌부터 십촌 이내로 가까운 사이다. 우리 마을에서 유일한 어린이인 나는 동네를 찾는 또래 아이들이 할머니댁에 오면 자연스럽게 한 번씩은 할머니들이 소개를 시켜주셨다. “야가 둘원이라~ 둘원이. 동갑이네 동갑, 나이가 같아도 둘원이는 어른이다, 어른.” 이런 말씀들을 꼭 덧붙이셨다.
동네에서 부르는 내 이름은 ‘둘원이’였다. 엄마가 내가 걷지도 못하는 아기였을 때 버스를 탔는데 옆에 앉으셨던 스님이 남동생 낳으라고 내 이름을 ‘둘원이’로 부르라며 지어주셨다고 하셨다. 그전에 출생신고를 했기에 다행이지 하마터면 나는 처음 만난 스님이 찰나에 지어주신 이름으로 평생 살아갈 뻔했다. 내가 다섯째 딸인데… 남동생이라니…10년 동안 집에서 둘원이로 불렸지만 남동생은 생기지 않았다.
동넬 찾는 동갑내기는 세 명. 동기할머니댁 손주 지원이랑 성원이, 도산할머니댁 손주 우섭이. 동기할머니댁 지원이랑 성원이 둘은 사촌이고, 같이 부산에 살아서 친하게 지냈다. 늘 올 때 같이 왔다가 같이 갔다. 할머니댁에 오면 맨날 우리 집에 와서 셋이 놀았는데, 성원이는 주로 로봇을 손에 들고 와서 로봇이나 만화영화 이야기를 했다. 나에겐 외계어였다. 지원이는 동성이라 그런지, 야옹이랑 같이 놀거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도산할머니댁 우섭이는 서울에서 왔고, 위로 누나가 둘 있어서 시골에 오더라도 나랑 긴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주로 우섭이 누나들이랑 잠깐씩 얘기 나누는 정도. 대화는 누나들이랑 하는데 힐끗힐끗 우섭이가 뭐 하나 쳐다봤다. 호기심 같은 관심은 있었으나 친해질 기회 같은 건 없었다.
한 번은 우섭이네가 놀러 왔던 여름방학이었다. 엄마가 반으로 자른 고추를 마당에 널어두고 일하러 가셨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나는 고추가 비 맞지 않도록 바구니에 담에 얼른 안으로 들여놨다. 비는 금방 그쳤다. 갑자기 눈이 매워서 눈물이 자꾸 났다. 피부까지 따가워져 왔다. 고추 만진 손으로 모르고 눈을 비볐던 거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수돗가에서 펄쩍펄쩍 뛰고 있는데, 도산할머니가 손주들을 데리고 동넬 거닐다 마침 나를 보고는 놀라 수돗가로 달려오셨다. 얼른 손부터 씻고 깨끗한 손으로 눈을 물로 씻으라고 하셨다. 우리 집 마당에서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고 있는 눈들이 몇 개였는지. 이제는 맵고 따가운 게 좀 사그라들자 우섭이가 보였고, 우섭이 누나들이 보였다. 호들갑 떨던 모습이 생각나 부끄럽기 시작했다.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명절이나 할머니·할아버지 생신, 여름방학, 겨울방학이 그 친구들이 다녀가는 때다. 막상 그때 우리가 만나서 어떤 얘기를 나눴고 뭘 하며 놀았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그렇지만 올 때가 됐는데 안 오면 은근히 언제 오나 하고 기다렸다. 할머니들이 한 번씩 손주 근황들을 말씀하시기도 하셔서 늘 가까이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친한 사이로 생각될 만큼 친근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땐 내가 아는 나랑 같은 나이의 친구가 세 명이 전부였기 때문에 특별했다. 그리고 감나무정마을을 떠나본 적 없는 나로서는 부산과 서울이 어떤 곳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거기 사는 친구가 있다는 게 좋았다.
일곱 살 때였다. 유치원 여름방학에 동기할머니가 부산 아들네에 2박 3일 가는데 나더러 같이 가자고 하셨다. 깜짝 놀랐다. 아마 할머니가 큰 마음을 먹고 나에게 바깥세상을 보여주시고 싶으셨던 것 같다. 사실 쉬운 일이 아니지 않나. 어쩐 일인지 엄마·아빠도 처음엔 할머니도 힘드시고, 지원이네도 신경 쓰게 하는 게 마음에 걸려하셨는데 허락해 주셨다. 나는 처음으로 엄마·아빠가 아닌 동기할머니를 따라 집을 나섰다.
동기할머니랑 아빠랑은 오촌, 나랑은 육촌이 되니까 지원이, 성원이랑 나는 한 팔촌쯤 되는 것 같다. 그렇게 가까운 것도 그렇다고 먼 것도 아닌 느낌이었다. 할머니랑 버스를 타고 부산에 가서 처음으로 지하철이라는 걸 탔다. 그때도 지하철에 사람이 많았다. 할머니랑 나는 자리가 없어서 앉지 못하고 서 있었는데, 내가 서서 자꾸 졸아서 할머니가 자면 안 된다고 여러 번 깨웠다. 아주 큰 소리로 말씀을 하셔서, 좀 부끄러워서 주변을 살폈다.
저녁때가 거의 다 될 무렵 지원이 집에 도착했다. 부산 동래 근처 2층 양옥집이었다. 거실에 피아노가 있었던 게 기억이 난다. 지원이 엄마가 반갑게 맞아주셨고, 근처에 할머니의 세 명의 아들은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다. 저녁에 다 모여서 식사를 했다. 다음날엔 할머니랑 성원이 집에 걸어서 놀러 갔다. 성원이는 학원 가고 없어서 성원이 동생이랑 좀 놀았다. 크게 할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돌아오는 날 막내 아재 집에 갔다가 할머니랑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오는 길에 버스에서 찬찬히 되짚어 생각해 보니 특별하게 무엇인가 경험한 건 없는데, 부산은 이런 곳이구나, 그리고 얘네는 이렇게 사는구나 하고 알게 됐다. 매번 얘네들은 우리 집을 와봤지만 나는 처음이니까. 이별이 서운한 건지 아니면 친구가 아무도 없고 적막한 감나무정마 을로 돌아가는 게 슬펐는지 괜히 눈물이 났다. 할머니 몰래 자는 척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 후로 나는 내가 태어날 때 부모도, 지역도, 나라도,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