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총학생회-단과대학회장+3개 복수전공
“반갑습니다. 1대 자랑스런 영어대학 학생회 학생회장 OOO입니다.”
나의 대학생활은 2003년 3월부터 2006년 11월 초까지였다. 졸업은 2007년 2월에 했다. 대학생활의 절반은 방송국-강의실-학생회실-기숙사. 기숙사가 문을 닫는 12시에 딱 맞춰 들어가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아쉽게도 '여유'라고는 없어서, 평지도 아닌 오르막 학교를 매번 뛰어다녔다. 방송국, 총학생회, 단대학생회, 과학생회, 계절학기 한 번 듣지 않고 3개 전공을 이수했다. 휴학 한 번 없이 다닌 학교, 4학년 11월 초 취업을 해서 취업계를 냈다.
대학에 들어갈 때 나는 용의 꼬리가 아닌 뱀의 머리를 선택했다. 고등학교 때 풍물동아리를 계기로 공부할 타이밍을 놓친 나는 마음잡고 공부를 시작했을 땐 늦었다. 한 번도 공불 못한 적은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고등학교 땐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중간정도 했던 것 같다. 2학년 때까진 공부를 거의 안 했다. 2학년 중반부터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대학으로 진학하지 못했다. 그래도 좀 더 원서 쓰는데 최선을 다해서 고민해 볼걸. 어떻게든 대학을 잘 가려고 했으면 방법이 있었을 텐데... 나는 제대로 채점도 해보지 않았고, 포기한 채 EBS에서 미리 가본 대학을 보고는 그 대학에 수시모집 원서를 썼다. 덜컥 합격해서 정시 원서는 하나 써보지도 못하고 단지 진주를 벗어나는 것만으로 만족해했다.
비록 만족스러운 대학은 아니었지만 그 대학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학과로 진학했다는데 위안을 삼았다. 크게 그 학교 간판이라는 게 중요하지 않다고도 생각했다. 이왕 대학생이 됐으니 대학 가서 꼭 하고 싶었던 것만 하자고 생각했다. 대학 방송국 생활, 총학생회장, 응원단 세 가지였다.
우선 시작은 과학생회. 예비대학에서 과대표를 뽑았는데 재수생 오빠한테 밀려서 부과대표가 됐다. 그리고 4인 1실 기숙사에 살았다. 내가 입학하기 전년도에 지어 아주 깨끗하고 시설도 좋았다. 목표했던 대학 방송국 수습국원 모집 공고가 3월 말에 떴다. 아쉽게도 면접 일정이 맞지 않아 5월 추가 모집 때 들어가게 됐다. 방송국엔 매일 아침 7시 반까지 출근을 했다. 1학년 땐 벤치 스피커 아래 모여서 선배들 방송을 모니터링했고, 공강 시간마다 방송국에 가서 신문 사설을 읽고 내 생각을 적는 일일과제를 수행해야 했다.
1학년 2학기때부턴 우리도 방송에 투입됐다. 아침·점심·오후 방송 하루 세 차례 라디오 방송이 있었고, 일주일에 한 번 TV 방송을 했다. 많은 시간 방송을 만드는 데 할애할 수밖에 없었다. 주말에는 <마음으로 떠나는 여행> 촬영을 나갔다. 5월에 들어간 탓에 남은 자리가 기술 파트랑 피디 두 자리밖에 없었다. 다른 한 명이 강력하게 피디를 희망해서 나는 기술부 수습국원으로 시작했고, 방송국을 나올 때까지 부서는 바꿀 수 없었다. 기계치인 내가 창작가요제, 축제 등을 큰 무대 총감독을 다 맡아서 해낸 걸 생각하면 닥치면 다 할 수 있구나! 를 배웠다.
2학년 2학기 11월, 방송국을 그만뒀다. 총학생회장이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정책부장으로 갔다가 12월 말, 다음 해 학생회장단이 꾸려지면서 학생복지위원회를 맡게 됐다. 주로 우산을 빌려주고, 자판기가 동전을 먹으면 환불해 주고, 학생 식당들을 점검하는 등의 일이었다. 공강 시간은 학복 사무실을 지키는 시간이 대부분이 됐다. 계절학기 없이 3개의 전공을 이수하려면 수업을 많이 들어야 했다. 학점이 4.0이 넘으면 24학점까지 들을 기회가 주어졌다. 어떤 학기는 24학점을 꽉 채워 듣기도 했다.
그 당시에도 마음 한편엔 3학년 말에 치러지는 총학생회 선거에 학생회장으로 출마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방송국에서 총학생회로 옮겼는데, 예비역 남학생 중심의 학생회에서 기회를 잡기란 쉽지 않았다. 부학생회장 러닝메이트 제안을 받았지만 내가 회장 후보가 아니면 하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총학생회장 선거는 전체 과를 대상으로 하는 선거여서, 상경대나 IT대학, 법학대, 인문사회대학 쪽 후보와 함께 하지 않고 어문계열 후보만으로 당선되긴 쉽지 않은 구조였다. 고민하다가 포기했다.
마침, 06년부터 영어학부가 단과대학으로 승격을 앞두고 있던 차라 나는 초대 영어대학 학생회장으로 출마하기로 했다. 01학번 남자 선배가 부학생회장 후보가 돼 줬고, 우린 단일 후보로 찬반 투표에서 98%의 찬성을 득해 당선됐다. 대학교 4학년은 단과대학 학생회장으로 보냈다.
학생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없애려고 차별화를 시도했다. 학생회 간부들이 수업을 듣지 않고 행사 준비하지 않도록 하는 것, 학생은 수업을 듣는 게 본분이기에. 그리고 교수님들께 수업 외적으로 학생 상담에 신경 써달라고 요청드렸다. 단과대학 학생회 주최로 취업 준비를 위한 캠프를 개최해 자기소개서 작성법, 면접 비법 등 특강을 하고, 통번역 동아리, 영어연극동아리를 만들어 활성화시키고, 영어말하기 대회를 열었다. 수상자들에게 파격적인 상금을 걸었다. 참여율이 아주 높았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기 바빴지만 학생회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에 대해 학교와 교수님들께 요구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러려면 학생으로서 기본을 다 해야 한다는 것도. 나는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 애썼다. 학과 교수님들 인식도 학생회에 대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야심 차게 선거 공약으로 성적마일리지를 약속했었다. 학점, 토익점수, 봉사활동 횟수, 학생회 행사 참여 횟수 등 다섯 가지 항목을 정해두고, 학기 말에 본인의 점수와 증빙자료를 제출하면 1등부터 5등까지 고득점 순으로 매겨 시상을 하는 것이었다. 1등은 제주도 항공권 2 매였다. 연말에 예산이 부족해 약속한 선물을 시상하기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월급으로 항공권을 구매해 줬다.
애정이 많았던 대학생활을 4학년 2학기를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하고, 11월 초에 취업계를 제출했다. 아쉬움도 있었지만, 취업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돌이켜 보면, 대학생활 중 하루도 편하게 쉬어 본 날이 없었던 것 같다. 공강시간 한 시간 조차도 회의가 있었고,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진 못한 것 같다.
다만, 학생회를 통해 더 나은 단과대학으로, 학과로 변화해 나가는 모습을 통해 효능감을 느꼈다. 많은 갈등도 있었고, 어려움도 있었지만 끝내 해결해 낸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나를 스스로 신뢰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 시절로 되돌아가더라도 더 열심히 살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제법 오랜 시간 내 대학의 간판을 부끄러워했고, 억울해했고, 속상해했지만 분명 그 학교여서 내가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것이라 믿는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 게 맞을까. 대학 입학 10년이 지난 2013년 대학원에 가서도 원우회 활동을 했다. 또 10년이 지나 2022년 박사과정에 들어가서도 원우회 활동을 했다. 이제는 동문회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