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공항에서 환승하는 법

-나의 청춘 여행기 25

by 황근기

터키 항공권을 알아본 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어간다. 이스탄불 직항은 비싸다. 손이 가지 않는다. 방콕이나 홍콩을 경유하는 편도 만만치 않다. 대개 120에서 150만 원 정도 선이다. 배낭여행의 꽃은 누가 뭐래도 항공권 구입이다. 어떻게 해서든 여행 경비를 절감해야 하는 배낭 여행자 입장에서는 항공권을 가장 싸게 구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항공권에서 돈을 세이브하면 현지에서 이런저런 구차한 짓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심봉사도 눈을 번쩍 뜰만한 항공권을 발견했다. 이스탄불 항공, 모스크바 1회 경유. 가격은 텍스 포한 67만 원! 할렐루야~~ 할렐루야~~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힌 뒤, 일단 조건부터 꼼꼼히 읽어 봤다. 이럴수록 침착해야 한다. 그럼 그렇지. 모스크바 공항에서 대기 시간이 6시간이다. 레이 오버 6시간은 애매한 시간이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환승 공항에서 체류 시간이 24시간 이하인 경우 레이 오버라고 하고, 24시간이 넘어가면 스톱 오버라고 한다. 아무튼 체류 시간이 12시간이 넘어가면 공항 밖으로 나가 짧은 관광을 할 수 있다. 3시간 이하라면 대충 공항을 둘러보고, 밥 먹고, 면세점 몇 번 기웃거리다 보면 탑승 시간이 다가오게 마련이다. 하지만 6시간은 어떤가? 공항 밖으로 나가기에도, 그렇다고 그냥 죽치고 앉아 있기에도 애매한 시간이다. 하지만 텍스 포함 67만 원! 대충 계산해 봐도 1시간 앉아 있으면 10만 원을 버는 셈이다. 요즘 세상에 1시간 일해서 10만 원 벌기가 어디 쉬운가? 공항에 그냥 앉아 있기만 하면 1시간에 10만 원이 굴러 들어오는 것인데...그래! 이보다 고부가가치 기다림은 없다.

모스크바 공항 분위기는 예상대로였다. 기분 탓이겠지만 냉전시대의 공기가 어느 정도는 아직 공항 안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입국 절차가 특별히 까다롭진 않았다. 그런데 환승객들이 대기하는 공간이 매우 유별났다. 그동안 세계 여러 나라의 공항을 다녀봤지만 환승객들을 통제하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제각각 공항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다 환승 시간이 되면 게이트 앞으로 모여드는 게 보통이 아닌가.


그런데 모스크바 공항은 달랐다. 그들은 우리를 (환승객들) 몽땅 버스에 싣고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아마도 오늘 스케줄이 없는 게이트가 아닐까 싶은데, 그 게이트는 완전히 고립된 곳이었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다음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그 2층 공간에는 다른 곳으로 향하는 출구가 없었다. 공항에 이런 곳이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어쩌겠는가? 모스크바에 오면 모스크바의 법을 따라야지. 문제는 여기서 6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 일단 주섬주섬 목베개를 꺼내 목에 걸고 잠을 청해 본다. 물론 잠이 올 리가 없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대부분의 공항 의자는 여행객을 조금이라도 더 불편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제작된다. 그런데 모스크바 공항은 그 정도가 매우 심했다. 우선 등받이 각도가 90도다. 겉으로 보기에는 쿠션이 좀 있어 보였는데, 이상하게 엉덩이가 배기는 그런 의자였다. 머리를 어딘가에 댈 수 있어야 목베개를 한 덕을 볼 수 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머리를 기댈 수 있는 곳이 없다. 눕는 건 어떠냐고? 의자에 팔걸이가 없어야 어떻게든 웅크리고 누울 수 있다. 팔걸이가 있는 의자에 누우려면 요가 교실에서나 볼 수 있는 자세를 취해야만 한다. 그런 자세로 5분 정도 누워 있자니 잠은커녕 오히려 정신이 더 또렷해진다. 이런 곳에서 잠을 청하는 건 부질없는 짓이라는 사실을 아는 데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럴 때 가야 하는 곳이 바로 화장실이다. 손도 씻고 볼일도 보면서 시간을 조금이라도 흘려보내자. 그런데 화장실이 내 상상을 아득하게 초월하는 크기여서 깜짝 놀랐다. 얼마나 화장실이 쓸데없이 넓은지 3대 3 족구시합을 해도 충분해 보였다. 급똥이 온 사람은 이런 화장실을 조심해야 할 것 같다. 내 경험상 화장실 문고리를 잡게 되면 긴장의 끈이 살짝 풀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절대 그래서는 안 될 거 같았다. 화장실 문을 열고 또 한참을 걸어가야 변기가 나오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어 왔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으면 내 말에 과장이 1도 없다는 걸 증명할 수 있었을 텐데. 볼일을 보러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있어 사진을 못 찍어 온 게 못내 아쉽다.

이 요상한 모스크바 공항 환승 구역에서 가장 특이했던 건 술을 파는 바(bar)였다. 보통 공항 안에는 면세점이 있기 마련인데, 그때 우리가 갇혀 있던 환승 구역에는 면세점 비스므레한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가게는 딱 다섯 개가 있었는데, 그 가게라는 게 모두 술을 파는 바였다. 우리가 도착하자 바텐더들은 보란 듯 이런저런 술을 섞어 부지런히 칵테일 세이커를 흔들었다. 모스크바에 왔으면 일단 모스크바식 칵테일부터 먹어봐야 한다는 듯. 하지만 그 수상한 술을 사 먹는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바 이외에는 그 어떤 가게도 없어 달리 시간을 때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바로 그때 환승 대기소 한쪽 곁에 코르크 마개가 곶감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딱히 어떤 의미가 있는 예술적인 조형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냥 바에서 남아도는 코르크 마개를 처분할 길이 없어, 철사로 꿰어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것이 아닐까? 그래도 그 코르크 마개가 시간을 보내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을 됐다. 한 줄에 코르크 마개가 몇 개 매달려 있는지 하나 둘.. 세어 보기도 하고, 코르크 마개에 적혀 있는 상표를 꼼꼼하게 읽어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의자에 앉아 멍 때리기, 바에서 부지런히 세이커를 흔들고 있는 바텐더 구경하기, 화장실 가기, 코르크 마개 구경하기를 몇 번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마침내 승무원 복장을 한 여성이 나타났고, 승객들의 시선은 일제히 그 여성에게 쏠렸다. 여성은 손에 들고 있던 종이쪽지를 펼치더니 "잇단 뿔!"이라고 외쳤다. 그러자 몇몇 승객들이 그 여성 앞으로 걸어 나갔다. 여성이 긴 손가락으로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가리키자, 승객들은 마치 인질들처럼 한 줄로 서서 묵묵히 계단을 걸어내려 갔다. 그나저나 '잇딴뿔'이 뭐지? 어느 도시 이름인가? 잇딴뿔?


그때 여성이 마지막이라며 외쳤다. "잇딴불!" 그 순간 혹시 '이스탄불인가?'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허겁지겁 소지품을 챙긴 뒤, 그 여성에게 물었다. "터키?" 그러자 여성은 왜 이제야 나왔냐는 듯 신경질적으로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가리켰다. 계단을 내려오자 10여 명의 승객들이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활주로로 향해 있는 유리문에는 체인이 둘둘 감겨 있었고, 그 체인에는 이 세상 그 어떤 열쇠로도 못 열 같은 자물쇠가 걸려 있었다. 그렇게 한 2분 정도 서 있었을까. 버스 한 대가 문 앞에 섰다. 그러자 여성은 재빨리 그 자물쇠를 따고 우리를 버스에 태웠다. 얼마나 사주 경계를 철저히 하는지 스파이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들었다. 버스는 활주로 가장자리를 이리저리 뱅글뱅글 돌더니 약 5분 뒤, 우리를 출국장 앞에 세워주었다.


버스에서 내리는 승객들은 하나 같이 모두 표정이 없었다. 아마 그들도 이런 경험을 처음이리라. 무슨 포로 교환하는 것도 아니고, 트렌스퍼를 이런 식으로 취급하다니. 약간 여유가 생기자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았다. 여기는 모스크바가 아닌가. 1층 출국장 계단을 걸어 올라가니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정상적인 출국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 후 모스크바 공항을 경유하는 비행기는 타 본 적이 없다. 그나저나 만약 그때 내가 '잇딴뿔' 이 '이스탄불'이라는 걸 눈치 못 챘다면 어떻게 됐을까? 지금도 러시아 모스크바 공항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잇딴뿔' 이라고 외치던 그 러시아 여성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아직도 모스크바 공항에는 그 수상한 환승장이 남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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