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우다이푸르의 피촐라 호수는 소문대로 아름다웠다. 현지인들의 신혼 여행지로 각광받을 만큼 로맨틱하고 낭만적인 분위기의 도시라더니,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았다. 우다이푸르에서는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라자스탄에서 제일 큰 성이라는 시티팰리스도 가 보고 싶었고, 석양 풍경이 근사하다는 몬순팰리스도 올라가 보고 싶었다. 무엇보다 세밀화 체험을 꼭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레이크 호텔에 숙박하는 바람에 그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내가 이 호텔에 묵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버스가 새벽 3시에 우다이푸르에 도착하는 바람에 난 아무 호텔이나 문을 두드리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쇠사슬로 칭칭 감겨 있는 문을 열심히 두드리고 돌아다녔지만, 문을 열어주는 곳이 없었다. 피촐라 호수 주변의 숙박업소 중에서 유일하게 문을 열어준 곳이 바로 레이크 호텔이었다.
레이크 호텔은 이름만 호텔이었고, 실제로는 민박집이었다. 작은 정원이 있는 일반 집이었는데, 남는 방을 놀리기 뭐해서 부업으로 숙박업을 하는 듯했다. 손님이 사용할 수 있는 방도 세 개 밖에 없었는데, 그나마도 손님은 나뿐이었다. 뭐랄까. 일반 가정집에서 잠시 하숙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붙임성 좋은 이 집 부부는 나를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척 대하듯 했다. 부인은 라마단 기간에 하는 헤나라면서 내 손바닥에 헤나를 그려주기도 했고, 남편은 나를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시내 구경을 시켜주기도 했다.
그런데 이 집 아이들은 한술 더 떴다. 내가 마음에 들었던 건지, 아니면 방학이라 심심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매일 아침 내 방문을 두드렸다.
"근기! 근기! 놀자~~"
아이들은 아직 잠도 덜 깰 내 손을 끌고 크리켓을 하자며 호텔 앞 공터로 데리고 나갔다. 크리켓은 인도의 국민 스포츠로, 인도 어디를 가나 크리켓을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작은 공간만 있으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크리켓을 즐기는데, 이 집 아이들도 크리켓 광이었다.
세 명의 아이들은 하루 종일 나를 쫓아다녔다. 한 번은 한국 노래를 불러달라고 졸라서 옥상에 올라가서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노래를 불러 주기도 했다. 아이들이 하도 나를 따라다니자, 엄마가 몇 번 따끔하게 혼을 내기도 했다. "손님 좀 그만 괴롭혀!" 하지만 아이들은 막무가내였고, 나도 그런 아이들이 싫지 않았다.
내가 그 숙소에 묵은 지 3일째 되던 날이었다. 그날은 라마단이 끝나는 날로 '이드 알 피트르'라고 하는 무슬림들의 축제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무슬림들은 라마단 기간이 되면 한 달 동안 해가 떠 있을 때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그러다 라마단이 끝나면 3일간 마음껏 먹고 마시는 '이드 알 피트르'라고 하는 축제가 시작되는데, 무슬림들에게 있어 가장 큰 축제라고 한다. 그런데 그 날 아침 숙소 주인이 뜻밖의 부탁을 해 왔다.
"근기! 오늘 갑자기 중요한 일이 생겨서 그러는데, 나 대신 우리 애들 데리고 모스크 좀 다녀올 수 있겠어?"
나는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즉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낯선 이방인이다. 게다가 우리는 만난 지 불과 3일밖에 안 됐다. 그런데 뭘 믿고 나한테 자식들을 맡긴다는 걸까? 우리네 눈으로 보면 상식을 크게 벗어나는 부탁이었다. 한편으로는 '나를 이렇게까지 믿는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일상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묘한 감정이었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아이들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남의 집 자식을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약간 부담되기도 했지만, 난 결국 세 아이를 데리고 모스크로 향했다. 모스크는 호수를 건너 시내 쪽으로 한 20분 정도 걸어가야 하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모스크 앞은 이미 축제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노점상에서는 온갖 음식을 팔고 있었고, 사람들은 모두 하얀색의 옷을 입고 모스크 입구에서 손과 발을 씻고 있었다.
나도 아이들과 함께 손과 발을 씻었다. '모스크 밖에서 아이들을 기다려야 하나, 모스크 안까지 따라 들어가야 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빨리 들어가자며 재촉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수많은 무슬림 사이에 껴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아잔~' 소리가 들리자 모스크에 모인 무슬림들이 일제히 큰절을 했다. 혼자 멀뚱멀뚱 서 있을 수도 없어 나도 얼른 따라서 큰절을 했다. 큰절을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무슬림들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느라 진땀을 뺐다.
예배가 끝난 뒤, 나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모스크를 빠져나왔다. 모스크 앞은 아까보다 더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이왕 축제에 참석했는데 그냥 돌아가기가 아쉬워서,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과자를 사서 손에 쥐어주었다. 얼마나 좋아하던지. 아이들이 좋아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바로 그때 한 무슬림이 내게 인사를 청했다.
"아 살람 알레이쿰!(신의 가호가 있기를)"
나는 얼떨결에 "알레이쿰 아 살람(당신에게도 신의 가호가 있기를)"이라고 인사를 받았다. 무슬림들의 인사법을 알고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무슬림과 인사를 할 때는 오른손을 왼손 가슴에 대고 "아 살람 알레이쿰!"이라고 인사를 하면 된다. 그리고 좀 더 친밀한 관계일 때는 팔을 서로 맞잡은 다음, 내 뺨을 상대방의 뺨 오른쪽으로 한번 갖다 댄 후, 다시 반대쪽 뺨을 상대방의 뺨 왼쪽에 갖다 댄다. 이렇게 기본적으로 두 번 뺨을 맞대는 게 이슬람식 인사다.
그때 만난 무슬림은 내게 친밀감을 느꼈는지 두 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나도 얼떨결에 뺨을 그 무슬림에게 갖다 대며 "알레이쿰 아 살람"이라고 인사를 했다. 그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 또 일어났다. 예배를 마치고 계단을 내려오던 무슬림들이 갑자기 나와 인사를 하려고 길게 줄을 서지 뭔가. 아!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상황이란 말인가.
결국 나는 그날 그 모스크 앞에서 30명이 넘는 무슬림들과 인사를 나눴다. 두 번이나 상대의 뺨에 내 뺨을 맞대어하는 이슬람식 인사를 30번 넘게 하는 건 솔직히 고역이었다. 수염이 긴 사람들이 많아서 뺨을 맞대기가 좀 거북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런 상황에 싫은 기색을 내비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세 아이는 과자를 맛있게 먹으며 내가 무슬림 아저씨들과 인사하는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다음 날 아침에도 아이들은 크리켓을 하자며 내 방문을 두드렸고,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크리켓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그렇게 우다이푸르에서의 4박 5일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원래는 몬순팰리스를 보고, 세밀화 수업도 받아 보려고 했지만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호수 바로 앞에 있는 시티팰리스만 잠깐 짬을 내서 다녀왔을 뿐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들과 놀면서 다 흘려보냈다.
내가 아그라로 가기 위해 배낭을 메고 나오자 아이들은 골목 끝까지 배웅을 나오며 눈물을 찔끔거렸다. 유난히 나를 잘 따랐던 막내아들이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바람에 나도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언젠가 꼭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는 세 아이들과 헤어졌다
나는 그동안 줄곳 무엇을 보고, 어딘가를 찾아가는 여행을 해 왔다. 그러다 우다이푸르에서 만난 세 아이 덕분에 여행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마음에 드는 곳을 만났을 때는 그냥 그곳에서 흘러가는 대로 머무를 줄 아는 여유를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
최근 인도는 점점 심해지는 종교적. 사회적 갈등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얼마 전에는 10대 무슬림 소년이 소고기를 들고 간다는 이유로 힌두교인들에게 살해를 당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성폭력 사건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다. 낯선 이방인에게 자기 자식을 맡기는 건 이젠 인도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세 아이들과의 약속을 잊은 건 아니지만, 그 후 이런저런 이유로 우다이푸르를 가 본 적이 없다. 이제 어른이 되어 버렸을 그 꼬마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아직도 그 순수하고 맑은 눈망울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까. 문득 일말의 경계심도 없이 내 손을 잡던 그 아이들의 얼굴이 너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