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틀에 갇힌 게 안쓰러웠던지 퇴근하는 나를 친구가 잡아챈다. 건물과 건물들 사이, 골목을 빠져나와 한적한 길로 방향을 튼다. 도시에서 맛볼 수 없는 바람, 그것에 몸을 맡기고 흔들거리는 키 큰 풀들이 쌓인 긴장들을 느슨하게 만든다.
직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런 길이 있다니. 길은 이내 강변을 끼고 돈다. 햇살에 반짝이는 강물은 어릴 때 우리 집 방문을 열면 보이던 커다란 저수지 물빛인 양 낯설지 않다. 옛 추억들이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처럼 나를 스쳐 지나간다.
은행나무가 군락을 이룬 숲길, 가을을 한껏 머금은 은행잎들은 익을 대로 익었다. 나무 아래 서 있으면 옷도 나도 금방 노란빛으로 물들 것만 같다. 계절은 소리 없이 오고 또 그렇게 가듯 이 가을도 그런 찰나, 아슬아슬하게 맞닥뜨려진 게다. 하마터면 놓칠 뻔한 풍경이 아니던가.
자작나무 숲에서 놀던 빨간 머리 앤과 친구 다이애나처럼 친구와 나는 은행나무 숲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얼마나 웃고 떠들었는지 소리에 놀라 숲속 새들이 푸드득, 슬쩍 자리를 비켜준다.
학창 시절, 친구들 사이에 내가 빠지면 바람 빠진 공놀이 같았다고 할까. 그만큼 어울리기를 좋아했다. 무슨 놀이든 잘하는 편이었다. 양편으로 놀 때는 언제나 제일 먼저 뽑히는 쪽이었다. 학교 기준으로 제일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 동네였지만 방학 때나 명절 때가 되면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 집으로 아이들이 몰려들곤 했다. 한마디로 나는 놀이가 즐거운 아이였다.
그런 나는 어디로 갔을까. 지금의 나를 보면 그런 시절이 있기나 했던가 싶다. 아이를 키우고 직장생활을 하며 늘 허둥허둥 지내다 보니 그런 나는 온데간데없다. 비단 이게 나뿐일까. 오늘, 이 순간만큼 우리는 은행나무 숲길이 베풀어 놓은 가을 속에서 즐겁다. 나이도 잊고 챙겨야 할 저녁밥도 잊은 채 중년의 두 여인이 철모르는 아이가 돼 빠져들고 있다.
현경미 시인
http://v.daum.net/v/20231117070018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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