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하고 싶던 일이 더이상 하기 싫을 때

불안은 번아웃이란 이름으로 다가온다.

by 백희무


나는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Bad Sisters - Season 1 - Episode 8 (2022)


일에 미쳐있던 시절이 있었다.

'꿈'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않아도 행복했다. 프리랜서로 영상을 만들던 시절엔 꽤 오랫동안 내 돈을 써서 남을 위한 작품을 만들었다. 1,000만 원을 받으면 제작비로 1,200만 원을 쓰고, 200만 원을 받으면 250만 원, 300만 원을 썼다. '주인의식'이라는 합리화로 플렉스를 한 것이다. 내 돈 적게 쓰고, 내 이름으로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내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다른 감독님들의 조연출을 하거나 상업 현장 연출부, 촬영 알바 등을 하며 번 돈을 내 작품을 만드는 데 보탰다.

지금은 부끄럽지만 그때는 뭐... 또 그럴 만도 했다. 영상은 내 생애 최초로 누군가에게 의미를 줄 수 있는 창작활동이었으니까.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실제로 그 절박함은 꽤나 괜찮은 성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뮤직비디오를 주로 만들던 시절엔 한 여행지의 바 화면에 내가 만든 뮤직비디오가 나오기도 하고, 아티스트의 팬들이 개인적으로 DM이 오기도 했다. 이해는 잘 안 가지만 해외의 영화과 학생이나 비디오그래퍼들이 한국에 가면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메일을 보내오기도 했다. 많은 프리랜서 창작자들은 공감하겠지만, 무엇보다 내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 누군가가 나의 작업물을 보고 꼭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연락을 주는 것만큼 짜릿한 일이 또 없다.

비전공자에 아무런 인맥과 영업 활동 없이 영상 내 크레딧만으로 대부분의 일을 하게 되었는데, 이제 와 돌이켜보면 몇몇 클라이언트는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저 사람은 싼값에, 목숨 걸고 일해주더라.'

실제로 비슷하게 말했던 대표도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꿋꿋하게 행동했다. 사람은 언젠가 배신할 수 있어도 일은 배신하지 않으니까. 어찌 되었든 결과물은 분명 남으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오롯이 내 것이 되니까. 모르고 노예를 자처한 것이 아닌 나의 선택이었다.

Flamin' Hot (2023)


하지만, 무엇이든 지속할 수 없는 건 끝이 나기 마련이다.

수년 전, 프로젝트가 차례대로 다섯 개가 엎어진 적이 있다. 모두 평소에 해보지 못했던 류의 프로젝트들이라 정말 욕심내서 준비했는데, 약 6개월 동안 내가 참여했던 모든 프로젝트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때의 심정은 허탈하다, 공허하다는 말로 표현하기에도 부족했다. 일 외의 다른 것에서 위로를 받고 싶었으나 그 순간, 일 외에 나를 정의할 수 있는 단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학교, 친구, 가족, 사랑, 돈, 건강... 내게 중요한 모든 것을 내팽개쳤던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지도 다른 취미 같은 것도 무엇도 하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그렇게까지 해서 얻은 것은 뭘까?


분명 있을 것이다.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난 잘 모르겠다. 결과론적인 이야기겠지만, 얻은 것보다 잃은 게 훨씬 많다고 느껴지긴 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죽을 만큼 하고 싶던 일이 죽을 만큼 하기 싫어지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다. 과유불급이랬지.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했을 때의 불안감보다 훨씬 더 커다랗고 끔찍한 공포였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날들이 연속됐다. 속이 까맣게 타들어간다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아...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번아웃(burnout): 과도한 훈련에 의하거나 경기가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아 쌓인 스트레스를 해결하지 못하여 심리적ㆍ생리적으로 지친 상태
휴식이 답일까?
시간이 약일까?
근데... 계속 쉬면... 다시 일할 수 있을까? 안 받아주면...?
아... 근데... 왜 이렇게까지 했지?
나 이 일을 왜 좋아했더라?
Gloria Bell (2018)


5년 가까이 다닌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렇게 몇 년을 더 버텼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였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굳건하다 믿었던 벽은 금세 무너졌다. 어느 순간에는 불만족스러운 게 거의 없어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없는 상태, 무감각.

물론 언제나 열심히 일했지만, 이전과 달라진 것은 목표가 뚜렷하고 내가 일을 하는 이유를 알고 즐기는 것이 아닌, 이유를 모른 채 뭐에 홀린 사람처럼 그저 습관처럼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위험하다.


The End of the F***ing World - Season 2 - Episode 2 (2019)


집 안에 있으면 생각이 천장만큼만 자란다고 한다.

5년 동안,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한 회사에 갇혀 살았기 때문에 벗어나는 게 정말 쉽지 않았다. 수년을 미친 듯이 산 덕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얻어냈다. 하자만 분명 이 환경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시스템 밖으로 나가는 순간,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공포를 예감했다. 정상 궤도에서 이탈한 후 복귀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익히 듣고 봐왔으니까.


"이대로면 나는 아예 이 일을 못하게 되지 않을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5년도 들어 회사 사정이 좋지 않아 지면서, 내가 뽑은 팀원을 입사 두 달 만에 내보내야 했다. 작년에도 구조 조정으로 동료 다섯 명을 한꺼번에 잃었는데, 또다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웠다. 아니,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나 혼자 살아남자고 내가 일을 혼자 하자고 열심히 한 게 아닌데.

그 순간, 차라리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지금 아니면 더욱 어려워질 게 뻔했으니까. 우물 밖으로 나가 싸워보기로 했다.

*출처: Small Things Like These (2024)


조급함과 싸우는 것

퇴사 후 가장 힘들었던 것은 조급합이었다.

꽤나 많은 회사들로부터 헤드헌팅이 왔지만 단 하나도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 내가 눈이 높아서일까? 좋은 회사를 빨리 찾아야 하는데, 애석하게도 내가 원하는 곳들은 나를 원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를 계속해야 한다는 강박.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불안감은 늘 나를 괴롭혔고, 하루도 편히 잠들지 못했다. 밤마다 취업 사이트를 들락날락하며 이미 봤던 공고를 괜히 또 보고 또 보곤 했다.

책을 읽어야 하나? 운동을 미친 듯이 해볼까? 영어 공부라도? 뭘 해야 할까?

흠...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쉴 줄 아는 것도 능력이라던데. 나는 휴식에 무능한 사람이라는 걸.

불안감을 잠재워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대신, 그게 꼭 '취업'일 필요는 없었다. 이 일을 시작하게 된 역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어쩌다 이 일을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게 된 것일지.


내가 이 일을 왜 좋아했을까?


Dilwale Dulhania Le Jayenge (1995)


1. 사람들이 좋아해 줘서

단순하다. 영상을 만드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확률'이 가장 높은 일이다. 컴퓨터도 잘 못 다루고, 디자인도 못하고, 음악도 못 만들고, 그림도 무진장 못 그리지만 영상은 다 잘할 필요는 없다. 그냥 조금 볼 줄 아는 눈과 조금 만질 줄 아는 기술. 그걸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었고, 누군가는 좋다고 해줬다. 영상은 무엇 하나 특별하게 잘하는 것이 없는 내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현재까지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2. 공동체적 성취감

영상이라는 매체는 아무래도 혼자 만들기 매우 매우 어렵다. 음악이나 그림도 쉽지는 않겠지만, 영상은 제약이 많다. 누군가를 찍으려고 해도 적어도 모델이나 배우 한 명이 더 필요하니까.

누군가와 협업하지 않으면 시작조차 할 수 없다. 그게 가장 큰 단점이자, 동시에 매력이었다. 확실한 건, 그 매력은 수 천 가지의 단점을 커버한다. 아무것도 없을 때 함께 밤을 새우며 하나의 작품을 멋지게 만들기 위해 열정을 불태웠던 순간. 그 기억이 아직도 내 심장을 뛰게 한다. 꿈이 있는 사람들과 같이 일할 때, 사람들은 모두 반짝반짝했다. 꿈이 있는 사람에게는 빛이 나니까. 나도 그랬을까?

지금은 그만큼은 아니지만 아직도 분명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낼 때의 성취감은 그 어떤 도파민보다 크다. 가끔은 서로에게 예민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함께' 만들어간다는 느낌은 언제나 존재한다. 충만하게.


3. 누군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

모든 창작자들이 다 비슷하겠지만, 누군가가 내 작업물을 좋아해 주는 것을 넘어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엄청난 영광이다. 나도 그랬지만, 내 삶을 바꾸는 일들이 엄청난 큰 사건들은 아니었다. 그냥 우연히 접했던 하나의 음악, 영상, 글일 수 있다. 내게 그런 영감을 준 것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이루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그런 영감의 조각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뿌듯하다. 꼭 삶을 크게 뒤바꿀만한 것이 아니어도, 소소한 웃음이어도.



결국은 '사람'

일을 하면서 가장 많이 지친 것도 사람 때문이었고, 끝까지 붙잡게 만든 것도 결국 사람 덕분이었다.

분명 누군가는 내 작업물을 좋다고 해줬고, 동료들과 함께 만들어갔던 추억은 내 열정을 지켜주었다. 누군가에게 작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포기하지 않게 했다. 세 가지 이유 모두, 다 ‘사람’으로 연결된다.

창작이라는 행위는 내 안의 것을 꺼내는 시작이지만, 그 과정과 끝은 언제나 타인에게 닿는다는 것이 참 매력적인 것 같다.


The Wolf of Wall Street (2013)


위 과정을 거치며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에게 가치를 주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 보다 명료해졌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보는 콘텐츠, 자극적이기보다는 소소한 위로나 웃음, 감동을 주는 그런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 조금 더 큰 영향력을 끼치고 싶다. 어떤 환경에서 어떤 방식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커머스 광고 쪽은 안 맞겠다...)


언젠간 그게 영상이 아닐지라도 상관없다. 지금처럼 글을 쓸 수도 있고, 음식을, 음악을 만들 수도 있다. 내 취향이 듬뿍 담긴 공간을 만들어 사람들이 즐길 수 있게 만들 수도 있다. 형태는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건 하나. ‘사람’과 연결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게 내가 이 일을 좋아했던 이유고,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는 이유다.


Silver Linings Playbook (2012)


권태와 무기력을 이겨낼 힘

많은 사람들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데에만 몰두하는 것 같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찾는 일 자체가 어렵고, 평생을 걸쳐도 그 답을 못 내릴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만큼 중요한 것은 그렇게까지 ‘가장 하고 싶던 일’이 어느 순간 ‘하기 싫어질 때’가 있다는 것. 아니, 정말로 두 번 다시는 안 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그 순간이 찾아오기 전에, 아니 오더라도 당당하게 이겨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영상과 BeachHouse의 Space Song을 끝으로.

https://www.youtube.com/watch?v=f9X1C7pTu-M&t=320s

Space Song by BeachHouse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