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초심 수필] 덕풍 5일장

by 오초심 수필집

덕풍 5일장


내가 사는 경기도 하남시에는 매월 4일과 9일에 5일장이 선다. 나는 주중은 물론 주말과 휴일에도 일을 하다 보니 5일장에는 한 달에 한번 가보기도 어렵지만, 운이 좋아 갈 수 있는 날이면 그 날은 아침부터 어린 아이처럼 마음이 설렌다. 특히 장이 서는 날과 토요일이 겹칠 때면 나는 아내 퇴근길에 장도 보고 내가 좋아하는 메추리구이 집에서 막걸리 한 잔을 할 수 있다는 기쁨에, 아내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초조하게 기다려지기도 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 달이 11월이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라 아니할 수 없다.


낙엽이 떨어져 거리에 곱게 쌓이고 제법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11월 하순의 어느 토요일 장날, 주말 일과를 마치고 덕풍장으로 가는 2번 마을버스를 탄다. 오늘이 장날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중․노년 승객이 유난히 많은 것 같다. 뒷좌석에 앉은 노신사 친구의 대화를 살짝 엿들으니 장에 가서 대포 한 잔 하러가는 길인 듯 싶다.


덕풍시장 정류장에 내리니 아내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맞이한다. "힘들었지!" 아내는 대답 대신 고개만 까딱한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장터 입구로 접어든다. 덕풍 5일장은 구 길과 신 길에 걸쳐 남북으로 형성되어 있다. 나는 장터 입구에 들어서면, 마치 어린 시절 엄마 손에 이끌려 재래시장 갈 때처럼 마음이 설렌다. 사실 이제 이곳에 몇 번 오다보니 처음 찾았을 때와 같은 감동은 없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이곳을 둘러볼 때면 다른 곳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삶의 기쁨과 활력소를 느낀다. 특별히 비싼 것을 사서 양 손에 보따리를 들지 않아도, 이곳을 찾은 장터 행인들과 흥성스러운 분위기만으로도 기쁨이 얼굴에 번지게 되는 것이다.


아내가 "배 고파. 도나스 좀 먹고 가자" 제안한다. "좋지!" 나는 목소리 한 톤을 올려서 흥겹게 화답해 준다. 이곳을 찾을 때면 항상 들르는 즉석 찹쌀 도너츠 가게엔 두 가지 종이 팻말이 도너츠 위에 모자처럼 씌워져 있다. '팥 있슈' '팥 없슈'. 이름도 재미있어 올 때마다 바라보고 웃는다. 오늘은 '팥 없슈' 찹쌀 도너츠를 세 개 사서 아내가 두 개, 내가 한 개 먹으며 장터 속살로 들어간다.


나는 장터의 모습들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마치 카메라로 찍듯이 노점 하나하나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본다. 전통 장에서 파는 물건들은 그것이 설령 수퍼나 대형마트에서 판매하는 것과 동일한 상품이라 해도 느낌은 분명히 다르다. 장터 물품은 상인의 색 바랜 옷과 투박한 얼굴, 떨이를 외쳐대는 장터 고유의 톤(Tone)과 어울려야 '빛'이 나는 것이다.


어느 노점에는 각종 생선들이 소쿠리에 담겨져 손님을 기다리고, 몇 발짝 지나면 농민의 마음까지 담아온 듯한 형형색색의 과일들이 색동옷처럼 때깔을 자랑한다. 명절을 연상시키는 각종 전들과 빈대떡이 노릇노릇하게 번철 위에서 기름을 뒤집어쓰고 익어가고 있으며, 그 옆 대폿집 드럼통 테이블 위에선 빈대떡에 막걸리 술자리가 벌어졌다. 누런 이를 드러내고 파안대소하는 할아버지의 얼굴에 작은 행복이 묻어난다. 60․70년대에 맛보았던 옛날 과자도 여기선 맛볼 수 있다. 그 과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 때 묻은 손으로 과자를 입에 넣고 까르르 웃어대던 어린 시절 동네 친구의 영상이 한 컷, 영화 필름처럼 지나간다.


이곳저곳 둘러보다 우리도 이곳에 오면 으레 들르는 메추리집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곳에 별도의 간판이 있는지는 몰라도 나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고, 메추리구이 안주가 맛있어 그냥 '메추리집'이라도 부른다. 호기롭게 메추리구이 한 접시와 막걸리 한 주전자를 주문하고 드럼통 탁자에 앉는다.


안주는 주인이 먼저 날것을 한 번 초벌구이한 후 화덕이 미리 놓여진 손님상으로 내온다. 사실 메추리구이는 먹을 것은 별로 없다. 그러나 화덕에 구워져 뼈째 씹어먹는 맛이란, 막걸리 한 사발과 어울리면 그야말로 '환상의 궁합'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아내에게도 막걸리 한 사발을 부어주며 오늘 아내가 겪은 일을 안주삼아 또 한 모금을 들이켠다. 둘 다 저녁을 먹지 않은 터라 그렇지 않아도 빈약한 메추리구이 안주가 어느덧 바닥을 드러낸다. 이번엔 등갈비 구이 한 접시를 주문하고 막걸리 한 주전자를 주문 위에 얹는다. 새로운 안주가 나오자 다시 한 번 침이 꼴깍 넘어간다. 구름에 달 가듯이 막걸리 한 주전자가 서서히 바닥을 드러낸다. 그래도 허전한 속은 잔치국수 한 그릇을 둘이 나눠먹고 나서야 비로소 채워진다. 돌아오는 길에 집에 있는 아이들에게 줄 떡볶이․튀김과 시장표 빵을 사들고 마을버스를 탄다.


귀가하는 버스 좌석에 앉은 나를 누군가가 보았다면 무척 행복하게 보였을 것이다. 비록 직접 산 물건은 별로 없지만 오늘도 눈요기한 수많은 장날 물건과 상인들의 외침, 비좁은 길을 오가며 느낀 장날 특유의 부대낌은 나를 '5일장 부자'로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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