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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환회 Jul 03. 2022

전설의 '해리 보슈 시리즈' 비긴즈

블랙 에코(1992) 마이클 코넬리

[세계 추리문학전집] 25/50


<택시 드라이어>의 트래비스 비클이 그렇듯 베트남전 참전 경험은 공허하고 상처 입은 남성 캐릭터를 그릴 때 자주 쓰인 설정 중 하나다. 크라임 스릴러의 걸작 '해리 보슈 시리즈'의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본명은 히에로니머스 보슈다. 르네상스 네덜란드 화가와 같은 이름은 고전적인 느낌을 준다. 반면 어떻게 발음할지조차 모르는 동료에게 해리는 '익명'을 뜻하는 어나니머스와 발음이 같다고 말해준다. 특별한 동시에 흔하다. 모두 각자 내면의 개성을 지니고 있지만 가면을 쓴 사람들이 모인 곳. 도시를 살아가는 현대인을 해리 보슈는 대표한다.



이런 특별한 이름을 지어준 건 거리의 여자였던 어머니였다. 혼란스러운 청소년기를 보낸 보슈는 성인이 된 후 베트남전에 자원한다. 땅굴에서 작전을 수행한 이른바 '땅굴쥐'였다. 대가로 불면증과 PTS 증세 그리고 세상을 비딱하게 바라보는 태도를 얻었다. 뛰어난 능력 덕분에 한때 잘 나가던 때도 있으나 순간의 실수로 좌천당했다. 지금은 번영과 향락의 도시 LA의 '하수처리반' 할리우드 경찰서 형사과에서 일하고 있다. 『블랙 에코』는 시리즈의 첫 책임에도 이렇게 정점에서 한풀 꺾인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 예외적이다.


"당신은 혼자인 건가요, 아니면 고독한 건가요?" 해리 보슈는 모른다, 라고 대답한다. 적어도 그가 혼자인 것과 고독한 것은 모두 사실이다. 그렇다고 금욕적이거나 텅 빈 인물인 것은 아니다. 일을 망치는 내부의 적에게 거칠게 분노한다. 거리를 둬야 할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배신과 반전에 충격받기도 한다. 우리가 미국 범죄소설로부터 떠올리는 모든 극적 요소들을 모두 그리고 충실하게 포함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독자의 관점에서는 친절하고 맛있는 이야기다. 많은 마이클 코넬리 작품이 소설과 드라마로 장기 흥행하고 있는 이유다.


제목은 보슈를 비롯한 땅굴쥐들이 베트남 굴속에서 느낀 어둡고 폐쇄적인 감각을 뜻한다. 다시 '검은 메아리'의 호출을 받는다. 같은 부대 소속이었던 남자가 관할 지역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이번에는 '현대의 '굴'인 댐 옆의 굴에서 죽음을 맞았다. 보슈는 조금씩 사건의 실체에 다가간다. 해결이 가까워질수록 밝혀지는 검은 진실의 파장도 더 커진다. 단순한 하나의 범죄 사건뿐만 아니라 현대 미국 사회 전반에 어둡게 드리워졌던 베트남전의 흉터를 날카롭게 파헤친다.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가장 쓰디쓴 과오를 성찰하며 해리 보슈 시리즈는 막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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