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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환회 Jun 26. 2022

아메리칸 스릴러, 소비에트 딜레마

고리키 파크(1981) 마틴 크루즈 스미스

[세계 추리문학전집] 24/50


소련 혹은 동독 혹은 어느 전체주의 국가. 부친의 화려한 경력에 못 미치는 지위에서 일하고 있는 남자가 있다. 능력은 출중하지만 야망은 없는 그는 조직의 논리보다 개인의 판단에 따라 움직인다. 체제를 향한 충성을 드러내려 애쓰지 않는다. 위태로운 결혼 생활은 끝을 바라보고 있다. 1970년대 말 소련을 배경으로 한 『고리키 파크』의 보안대 수사관 아르카디 렌코는 이런 고독과 공허의 기운을 품고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어느 날 불쑥 의문의 살인 사건을 맞닥뜨린 그의 인생은 격랑에 휩싸이게 된다.



모스크바 고리키 공원에서 신원 미상의 시체 세 구가 발견된다. 사인은 총상. 모든 시체의 얼굴은 훼손되었고 손가락도 잘려있다. 계획 살인임이 분명하다. KGB에 인계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렌코 자신이 수사를 맡게 된다. 이런 사건은 관여하지 않는 것이 좋다. 물론 렌코는 깊이 몰두한다. 아직 소년 같은 면모를 지니고 있는 반체제 성향의 남자라면 그러기 마련이다. 그는 가장 소비에트다운 이름의 공간에 시체와 함께 매장된 시대의 우울과 욕망을 하나씩 조립해간다. 죽음의 배후에는 미국인 사업가 존 오스먼이 있다. 그는 이미 부자였으나 돈은 많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단순히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소설인 것은 아니다. 오스먼의 뒤를 봐준 것은 소련의 고위 인사였다. 체제 공통으로 악을 작동하게 하는 제1 요인은 부와 이권임을 증명한다. 이와 함께 구소련에 만연했던 부정부패를 드러낸다. 사회주의 체제의 모순을 가장 신랄하게 그린 '미국' 작가의 소설이다. 사회주의 소련에서는 체제를 비판하는 소설이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설 속 표현을 빌리면 '소비에트 딜레마'라 할 수 있다. 미국도 비판을 피하지 못한다. 뉴욕으로 무대를 확장한 마지막 장. 화려한 자본주의의 시궁창 뒷골목의 악몽을 음습하게 재현한다.


진실을 거꾸로 재구성하면 전체 플롯은 복잡하지 않다. 그러나 책은 700쪽에 가까울 정도로 방대하다. 소련 노동절 행사부터 미국 워터게이트 스캔들까지 당시 사회의 공기를 성당 천장화와 같이 치밀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온갖 의혹, 배신, 반전이 뒤얽히며 이어지는 것도 분량이 늘어난 이유다. (이에 반해 모든 인물을 한자리에 모은 안전한 결말은 직전까지 쌓아 올린 긴장감을 줄인다.) 모든 것을 터뜨리고 쏟아내 버리는 대소멸의 엔딩은 쓸쓸하다. 동시에 작은 희망을 남긴다. 우수에 잠기는 형사 '아르카디 렌코 시리즈'의 첫 번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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