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 투 킬(1989) 존 그리샴
[세계 추리문학전집] 38/50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로부터 법률회사를 상속받은 루시엔 윌뱅크스는 '법과 술' 두 가지에 미친 남자였다. 시민의 권익을 지키고자 노력한 변호사였고 능력 역시 탁월했다. 하지만 과도한 알코올 의존과 튀는 행동 때문에 주 변호사회의 눈 밖에 난 그는 결국 자격을 박탈당한다. 이 지역의 또 다른 변호사 헤리 렉스 보너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의뢰인의 이혼소송을 승리로 이끄는 거물변호사다. "여자를 좋아했기 때문에 결혼을 네 번이나 했다"라고 농담하는 그 역시 실력과 자기관리 능력이 반비례하는 남자다. 루시엔처럼 술을 사랑한다.
그러나 루시엔 윌뱅크스의 후계자이자 해리 렉스의 친구인 제이크 브리건스는 이렇게 나사 빠진 인물이 아니다. 법대를 졸업한 뒤 포드 군의 군소재지인 클랜턴에서 일하는 그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주고 아내와 딸을 끔찍이 위하는 품격 있는 변호사다. 명문대 출신 변호사가 모여있는 설리번 법률회사를 싫어한다. 어려운 사람을 도우며 혼자 일하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한다. 루시엔과 해리에 비해 유머 감각이 부족하고 술도 안 마신다. 오직 '능력이 뛰어난 반골'이라는 점 하나만 통하는 세 남자. 이들이 드림팀을 이뤄야 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마을의 악질 빌리 레이 콥과 피트 윌러드는 열 살 아이 토냐 헤일리를 무참히 강간하고 폭행한다. 두 사내는 이내 체포된다. 그러나 소녀의 아버지 칼 리 헤일리는 직접 총을 들어 두 인간쓰레기를 처단한다. 칼 리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재판은 순식간에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건이 된다. 피고인은 흑인, 죽은 자는 백인이다. 미시시피의 조용한 한 마을은 뜨거운 인종갈등의 무대로 돌변한다. 그러잖아도 승산이 낮은 싸움, 배심원단까지 '완전히 하얗게' 구성되었다. 제이크는 오직 동료와의 협업을 통해 모두의 예상을 뒤집어야 한다.
『타임 투 킬』은 존 그리샴이 변호사이자 하원의원으로 일하는 도중 발표한 데뷔작이다. 자신의 경험을 반영해 법정 안팎을 넘나드는 치열한 법적 대결을 생동감 있게 그려낸다. 배심원제의 특징, KKK단과 흑인 단체의 대립, 사회·역사적 갈등을 개인의 고난에 함축하여 드러내는 이야기 구조. 지극히 미국적인 요소를 골고루 배합해 미국 사회를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 책이자 최고의 재미를 선사하는 법정 스릴러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므로 결말을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가슴 졸이며 책을 붙들게 하는 솜씨는 그야말로 신출귀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