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희 시인을 만나다
성전의 두 기둥처럼 붙박인 것이
어디 우리들 마음뿐이랴
가을산에 올라 들을 내려다보면
흐르는 모든 것은
어제 있던 그 자리에서 흐르고
작은 풀꽃 하나가
지구의 회전을 다스리기 위해서
하늘과 땅 사이 뿌리박고 섰나니
내가 그대 춤 속으로 날아가지 못하고
그대가 나의 근심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우리들 뿌리의 참담한 정돈을 어찌 외롭다 말할 수 있으랴
오솔길에 지는 것은 낙엽뿐,
뿌리 있는 것들은 뻗어 뿌리로 손잡으리니
우리가 한잔에서 목 축이지 못하는 오늘은
그대여, 우리들 겸허한 허리를 구부려
서로의 잔에 그리움을 붓자
서로의 잔이 넘치게 하자
<가을을 보내며 - 편지 8> 전문
"이 시인은 산에서 낙사했대. 슬프지."
"아 진짜? 응 슬프다."
"나도 떨어질 뻔 한 적 있어! 산에서."
"아 진짜? 정말 다행이다."
"요절을 하면 천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 지나
오늘은 내가 시인보다 하루를 더 살았어, 라는 그리움 지나
나도 그렇게 죽을 뻔 했어, 라는 우리의 현실을 지나"
고정희(1947-1991)
그의 시집 <지리산의 봄>을 읽으며 한 많은 봄을 해소하고 있다. 아름다움 글자와 글자 밑에 핀 그림자를 그리워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