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경 Nov 07. 2020

<어톤먼트> - '끝맺지 못할 속죄'

[영화 후기,리뷰/왓챠,넷플릭스, 멜로 로맨스/전쟁 영화 추천/결말해석]

                                                                              

어톤먼트 (Atonement)


개봉일 : 2008.02.21. (한국 기준)

감독 : 조 라이트

출연 : 키이라 나이틀리, 제임스 맥어보이, 시얼샤 로넌, 로몰라 가레이, 브렌다 블레신                                                                         

끝맺지 못할 속죄


세계 2차대전이 일어나기 전, 1935년 영국. 부유한 집안의 딸 세실리아와 집사의 아들 로비는 여름 햇살만큼이나 뜨거운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전과 달리 어색해진 둘 사이의 공기, 차가운 물에 달아오른 몸을 담가봐도 열기는 쉽게 가시지 않는다. 분수 앞에 어정쩡하게 마주한 두 사람을 훔쳐보는 세실리아의 여동생 브라이오니. 상상력이 풍부한 13살 아이의 머릿속에 그려지던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세실리아와 로비의 운명 또한 순식간에 뒤엎어진다.



사랑에 대한 부정을 거둔 순간, 앞으로는 꽃길만 펼쳐져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소리 없이 쌓여가던 오해와 의심의 조각들은 갑작스러운 폭발을 일으키고, 세실리아와 로비는 기약 없는 기다림의 시간을 맞이한다. 13살의 어린 나이에 첫사랑의 감정을 느낀 브라이오니와 타오르는 사랑의 감정을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둔 세실리아, 로비. 세 사람은 각자 다른 시간을, 다른 일상을 살아간다.



흐려질거라 생각했지만 흐려지지 않는 기억, 끝맺음이 정해지지 않은 기다림과 속죄. <어톤먼트>라는 제목에 걸맞게 이 영화엔 누군가의 속죄와 찰나의 실수 그리고 어린 사랑과 상처가 공존한다.


고혹적인 대저택과 아름다운 정원, 10대의 후반을 달리고 있는 남녀 주인공. 이들의 이야기가 다른 것들이 섞이지 않은, 막 어른이 되어갈 때쯤 새롭게 피어오르는 사랑에 대한 것이라면 좋았겠지만, <어톤먼트>라는 제목이 붙은 이 이야기는, 아름답고 완전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어톤먼트 시놉시스


1935년 영국, 부유한 집안의 아름다운 딸 세실리아(키이라 나이틀리)는 시골 저택에서 여름을 보내던 중 집사의 아들이자 명문대 의대생 로비(제임스 맥어보이)와 마주친다. 어릴 때부터 서로에게 애틋한 마음이 있었지만 쉽게 마음을 고백하지 못하던 이들은 그날 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하지만 이들을 지켜본 세실리아의 동생 브라이오니의 오해로 로비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전쟁터로 끌려가게 된다. 이후 세실리아는 로비가 전쟁터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간호사로 일하게 되고, 로비 또한 세실리아를 다시 만난다는 단 하나의 일념으로 전쟁터에서 살아남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어린 사랑이 만들어낸 소설


커다란 장난감 집, 줄지어 이동하는 동물들. 그리고 타자기 앞에 앉은 13살 소녀 브라이오니. <어톤먼트>라는 이야기는 브라이오니의 타자기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화려한 대저택, 아름다운 정원. 부족할 것 없는 집안. 브라이오니는 부잣집이라는 튼튼한 울타리 안에서, 현실보다는 머릿속 이상향과 상상의 순간을 더 자주 맞이하며 자란다. 13살의 나이에 혼자 희곡을 완성한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 남들보다 뛰어날 거라는 기대감을 받는 아이. 브라이오니는 눈앞에 펼쳐진 대부분의 일들을 ‘내 시선’으로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말하고, 다른 사람이 된다는 건 기분일까? 궁금해하는 범상치 않은 이 아이는, 우연한 기회에 작은 창문 너머로 언니 세실리아와 집사의 아들 로비를 훔쳐보게 되고, 혼자만의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세실리아와 로비는 어릴 적부터 함께한 친구 사이지만, 사춘기를 거치고 어른이 되어가며 둘 사이에 새로운 감정이 생겨나고 있음을 인지하게 된다. 친구가 아닌 이성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서로를 마주하는 건 너무도 생경하고 어색한 일이다. 세실리아는 부잣집 딸, 로비는 잘 사는 집안 아들은 아니지만 장차 의사가 될, 전도 유망한 학생이다. 로비는 의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집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되고, 세실리아는 섭섭하고 서운한듯한 복잡한 감정과 함께, 로비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된다.



내가 오랜 친구를 좋아하고 있었다니!.. 쉽게 받아들이기엔 너무도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치고, 세실리아와 로비는 꽃병을 사이에 두고 작은 실랑이를 벌인다. 꽃병의 손잡이가 부서지고, 세실리아는 꽃병 조각을 주워야 한다며 분수로 뛰어든다. 달아오른 감정을 식혀보려는, 물속에 털어내고 오려는 듯 말이다. 세실리아가 떠나고, 로비는 말없이 세실리아의 흔적이 남은 분수에 앉아 수면에 손을 대본다. 어색하고 생경함과 동시에 뜨거웠던 분수가 앞. 브라이오니는 둘 사이의 감정과 상황을 오해하기 시작한다.



아니, 어쩌면 브라이오니는 세실리아와 로비의 감정을 조금은 눈치채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영화의 후반부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브라이오니는 로비를 짝사랑했다. 하지만 로비는 브라이오니를 어린 동생으로만 생각한다. 브라이오니에게 로비는 나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은, 이루지 못한 첫사랑으로 남게 된다. 그런 그가 나의 언니를 좋아한다. 거기에 세실리아와 로비가 함께 있는 장면을 보며 받은 충격까지.. 오해와 치기 어린 아이의 애정은 오랜 시간 겹겹이 쌓여 커다란 거짓을 만들어낸다.


                                                                        

늦어서 미안해, 길을 잃었어.


브라이오니의 진술과 함께 로비는 아동 폭행 혐의로 경찰에 잡혀간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던 날 밤, 세실리아와 로비는 너무도 이른 이별을 겪게 된다. 그렇게 4년이 지난 후, 간호사가 된 세실리아와 군인이 된 로비가 긴 시간을 넘어 다시 만나게 된다. 세계 2차대전이 일어나고 로비는 사선을 넘나드는 군인이 된다. 부잣집 딸이었던 세실리아는 집을 나와 발햄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 살며 간호사라는 직업을 갖게 된다. 사랑을 확인했던 하룻밤만을 기억하며 살기엔 너무도 거칠고 힘들었던, 긴 시간이었다.



로비는 먼저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세실리아에게 “늦어서 미안해. 길을 잃었어”라고 말한다. 로비는 그 일이 있던 날, 감옥에 갇혀 길을 잃게 되고, 오랜 시간 세실리아를 찾아가지 못한 채 전장에 서게 된다. 로비는 사랑이란 감정의 맛을 음미하기도 전에 감옥과 전장의 거친 일상에 적응해야 했다. 세실리아는 힘든 시간을 보낸 후, 딱딱하게 굳어버린 로비를 바라보며 나에게 다시 돌아와달라고 말한다. 다시 나에게 돌아와 주길, 예전의 그로 돌아와 주길 바라면서.



이뤄지지 못한 약속


바닷가에 위치한 흰 나무로 쌓아올린 벽, 파란 창틀을 가진 오래된 별장. 세실리아와 로비는 다음 휴가를 맞이하면 함께 여행을 가기로 약속한다. 행복한 미래를 약속한 후, 세실리아는 급하게 발햄행 차를 타고, 로비는 다시 전장으로 돌아간다. 다시 돌아온다면, 다시 만난다면 함께 하자는 약속을 한 두 사람은 각자의 위치에 머물며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세실리아는 간호사로서, 로비는 군인으로서.



세실리아와 로비가 다시 만날 때 즈음, 언니를 따라 간호사가 된 브라이오니의 소식이 들려온다. 이제야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 것 같다는 브라이오니는 속죄를 위해 부상병들을 돌보는 간호사가 된다. 브라이오니는 매일같이 밀려드는 부상병들을 보며, 로비에 대한 죄책감과 후회의 감정을 느낀다. 사지가 절단되고, 피를 흘리며 들어오는 군인들 사이에 로비가 서있진 않을까? 여러 사람들의 생사를 눈앞에서 지켜보던 브라이오니는 매일을 후회하고, 속죄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쉽게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오면, 오래된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자신의 첫사랑과 언니에 대한 글을 쓴다.


                                                                              

“우리 이야기는 계속될 거야.”
“이제 돌아갈 수 있어.”


로비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의 한가운데에 서서 사랑하는 세실리아만을 떠올린다. 집에 가야 하는 이유, 살아야 하는 이유. 그건 모두 사랑하는 세실리아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로비의 일기장이 있었다면, 그 안엔 ‘사랑하는 세실리아’라는 단어가 가득했을 것이다. 로비는 세실리아에게 “우리 이야기는 계속될 거야.”라고 전하며, 다시 만나게 될 날만을 기다린다. 하지만 잔혹한 전쟁은 누군가의 사랑을, 소중한 인연을 배려해 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덩케르크 전투을 치르던 중, 연합군의 대규모 철수 작전이 시작되고 로비는 살아남기 위해 덩케르크 해안으로 향한다. 덩케르크 해안은 성경에 나오는 지구 마지막 날처럼 처참했다. 끝없이 밀려드는 부상병, 공포에 질려있는 어린 병사들, 총에 맞아 죽어가는 말들. 배가 오면 곧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과 여기서 모두 죽을지도 모른다는 절망이 공존하는 상황 속에서 로비는 조용히 잠을 청한다.


                                                                        

끝마치지 못할 거야


브라이오니는 부상병을 치료한 후, 세면대에서 손을 씻는다. 브러시를 이용해서 아주 꼼꼼하게, 손 피부가 닳을 듯이 문지른다. 내가 한 일에서 도망칠 수 없어.” 아무리 씻으려고 노력해도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혐오감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나의 속죄는 끝마칠 수 없을 것이고, 죄책감에서 도망칠 수가 없다. 뒤늦게나마 로비의 무죄에 대한 새로운 증언을 하고 싶지만, 실제 가해자인 폴 마셜이 롤라와 결혼을 하며 사실상 면죄부를 받게 된다. 여기까지가 진실이자 끝마치지 못한 브라이오니의 죄에 대한 이야기다.



브라이오니는 로비와 세실리아에게 사과하기 위해 병원에서 썼던 습작 ‘분수 옆 두 사람’을 다듬어 ‘어톤먼트’라는 마지막 소설을 내게 된다. 로비는 덩케르크 작전 마지막 날에 사망했고, 세실리아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다. 브라이오니의 이야기에선 브라이오니가 로비와 세실리아에게 고백을 하는 장면이 있지만, 사실 로비는 영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것이다.



‘로비의 죽음’에 대한 복선은 영화의 중후반부부터 조금씩 언급됐는데, 군화, 사진, 양귀비가 그 매개체다. 로비와 동료들이 덩케르크 해안을 향해 걷던 중, 한 명이 재수 없다며 군화를 벗어던지는 장면이 있다. 다른 동료는 “군화 없이 영국에 돌아가긴 힘들걸”이라고 말하는데, 마지막으로 잠들던 날 밤에 로비가 군화를 벗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그날 밤, 빨간 양귀비 꽃밭을 걷는 로비의 뒷모습이 지나간다. 양귀비는 영국과 영연방 국가들에서 제1차 세계 대전 전사자들을 추도하는 꽃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제1차 세계 대전 종전일인 11월 11일 영령 기념일이 오면 양귀비 모양 배지를 단다고 한다.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꽃, 양귀비 사이를 걸어가는 로비의 뒷모습. 그리고 조금씩 태워지는 별장 사진. 로비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품고, 사랑하는 세실리아를 그리워하며 세상을 떠난다. 끝까지 그 별장에 가야 한다고 말하는 로비와 동료의 죽음을 직감하고 이곳이 그 별장이라고 말하는 동료 병사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끝없이 저 밑으로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진실의 효과는 냉혹하죠


브라이오니는 자신의 이야기를 적은 ‘어톤먼트’라는 소설에서도 로비와 세실리아를 죽인다면 독자들이 슬퍼할 것이라 예상했다고 말한다. 큰 거짓말을 했던 그날 이후로 언제나 진실을 쓰기로 다짐했지만, 어톤먼트를 쓸 때만은 냉혹한 진실이 아닌 거짓을 기록해야 했다는 브라이오니. 그것이 두 사람을 위한 속죄의 끝이며, 마지막 친절이라고 생각하는 브라이오니. 이 속죄는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이제 와서 달라질 것은 무엇인지.. 잔혹한 전쟁 속에 쓸려내려간 익지 못한 풋사랑. 그 끝에 남은 건 냉혹한 현실과 한편의 소설뿐이었다. 속죄하고 싶지만, 이미 떠나버린 두 사람. 두 사람을 갈라놓은 것은 브라이오니지만 두 사람을 죽인 건 전쟁이었다. 속죄를 위해 간호사가 되고, 소설 속 불멸의 연인을 만들어낸 브라이오니, 그녀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일까.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애정, 갑작스레 달아오른 사랑의 감정. 그것을 가로막은 잔혹한 전쟁. 길을 잃고 헤매다가 겨우 길을 찾아 걷다 보니 그 끝엔 낭떠러지가 있었다. 딱 그 느낌이다. 누구를 탓할 수도, 누구를 욕할 수도, 누구를 용서할 수도 없다. 남은 건 사랑도 속죄의 감정도 아닌 진실뿐이니. 뒤통수가 얼얼해지는 기분이다.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hkyung769/

블로그 : https://blog.naver.com/hkyung769

매거진의 이전글 <미스테리어스 스킨> - '고통 속에 갈라진 기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