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후기,리뷰/감동, 가족,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추천/결말 해석]
개봉 : 2020.11.24. (한국 기준, 넷플릭스 공개)
감독 : 론 하워드
출연 : 에이미 아담스, 글렌 클로즈, 가브리엘 바쏘, 헤일리 베넷, 프리다 핀토
대물림되는 가난과 끊어낼 수 없는 운명 속에서 의미를 찾다
살아가다 보면 수많은 인연을 만나고, 만들게 된다. 학연, 지연, 그리고 그중에 가장 강한 인연인 ‘혈연’. <힐빌리의 노래>는 모질고 질겨 끊어낼 수 없는 지독한 운명 또는 언제나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가 되는 혈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힐빌리의 노래>를 보며 자비에 돌란 감독의 작품 <단지 세상의 끝>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이해할 수 없지만 결국엔 사랑하게 되는 가족의 존재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느꼈다. 결말도, 전체적인 이야기도 다르지만 <힐빌리의 노래>와 비슷한 주제의 영화를 찾는다면 <단지 세상의 끝>을 찾아보는 것도 추천한다.
마약 중독에 빠지거나 자식 양육을 포기하고 폭력적 성향을 보이는 어머니, 그리고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을 안고 살아가는 집안에서 일어나는 가정폭력을 겪으며 자란 주인공 밴스는 나의 미래와 가족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여 예일 로스쿨에 입학한다. <힐빌리의 노래>는 이 시점에서 시작된다.
밴스는 잊을 수 없는 좋은 기억임과 동시에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인 어린 시절의 기억을 안고 가족 중 그 누구도 오르지 못한 성공의 시작점에 도착한다. 그에겐 이제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대형 로펌에 취직하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아직 가난과 우울의 늪에 잡혀있는 어머니의 존재는 밴스의 마음 한편을 잡아끈다. 가족이라는 이름은 무한한 힘을 주기도 하고, 현실을 잡아채는 올가미가 되기도 한다.
‘힐빌리’라는 명칭은 가난한 백인들을 비하하고 깎아내리는 멸칭이다. 가난에 지쳐 무력감과 좌절로 가득 찬 힐빌리 사회 속에서 자란 J.D 밴스를 지켜준 건 그의 할머니였다. <힐빌리의 노래>엔 대물림되는 폭력과 가난의 고리에서 밴스를 지켜준 할머니의 사랑과 또 다른 피해자인 그의 어머니의 무력함. 그리고 가족이 남겨준 모든 흔적을 모아 새로운 미래를 써 내려가는 밴스의 희망찬 발걸음이 담겨있다.
미래가 걸린 중요한 일을 앞두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던 예일대 법대생이 가난하고 고통스러웠던 어린 시절의 기억과 조우하며 가족의 의미를 다시 깨닫게 되는 감동 실화
97년, 번영의 시대. 누군가는 미국을 기회의 땅이라 말하며 아메리칸드림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어느 시대나 그렇듯, ‘기회’라는 단어조차 바랄 수 없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번영의 맞은편엔 힘없이 해체되는 가족들이 있고, 높이 솟아오르길 기도만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밴스는 후자에 속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가족들과 함께 여름을 보내고, 자유롭게 계곡에 놀러 갈 수 있었던 어린 시절 최고의 기억을 안고 오하이오로 돌아온 밴스는 아쉽게 끝나버린 꿈같은 여름을 뒤로한 채 현실을 살아간다.
싸우지 않고 참으면 가족들이 와서 도와줄 거야
여름마다 가족들과 함께 놀러 갔던 켄터키주 잭슨. 그곳의 아이들은 오하이오에서 온 밴스를 무시하고 툭하면 시비를 건다. 밴스의 가족들은 그럴 땐 싸움에 휘말리지 말고, 참고 있으면 가족들이 와서 도와줄 거라 말한다. 밴스가 계곡에서 동네 아이들에게 맞고 있을 때 가족들이 도착하고 밴스를 구해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최고의 기억이었던 그 여름, 어린 밴스에게 가족은 ‘나를 지켜주는, 도와주는 존재’였다.
하지만 뭔가가 빠진듯한 오하이오 미들타운에선 가족의 존재도 큰 희망이 되진 못했다. 13살에 아이를 갖고 할아버지와 도망치듯 오하이오로 떠나온 할머니가 오른 23번 도로. 23번 도로엔 예일 대학교가 있지 않았지만, 밴스는 가족 중 유일하게 명문 대학교 진학에 성공한다. 밴스가 마음을 잡고 노력할 수 있었던 건 강인한 할머니의 존재 덕분이었다.
예일 대학 법대생, 사랑하는 여자친구, 대형 로펌의 초대 자리까지. 밴스는 이제 개인의 행복과 성공을 위해 달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여러 면접이 몰려있는 면접 주간, 여자친구 우샤의 응원을 받으며 ‘합격’만을 바라보고 있던 밴스에게 뜻밖의 변수가 찾아온다. 누나 린지는 어머니의 헤로인 과다 복용 소식을 전하며 밴스에게 도움을 청한다. 육아와 동시에 엄마를 보살피던 린지는 지침을 호소하고, 밴스는 그런 누나와 엄마를 외면하지 못한다. 일 3개를 하며 장학금을 제외한 등록금을 대기도 빠듯한 삶이었지만 밴스는 여러 장의 카드를 번갈아 내며 어머니의 입원비를 결제한다.
밴스는 어머니의 입원을 위해 오하이오에 머물며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밴스의 어머니 베브는 부활절 계란을 깨트렸다고 화를 내다가도 미안하다며 아들에게 풋볼 카드를 내미는 사람이었다. 밴스의 기억 속 베브의 모습은 행복하기도, 우울해 보이기도 한다. 전교 2등이었지만 그 누구도 대학에 가라거나 학비를 대준 사람도 없었다며 울부짖는 베브, 같이 죽자며 폭력적으로 아들을 대하는 베브. 할아버지의 죽음에 흔들리는 베브. 그리고 자살 시도를 한 모습까지.
할아버지의 죽음과 동시에 베브는 세상의 모든 우울함을 흡수하기라도 한 듯, 한없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세상의 풍파를 막아주던 아버지의 부재를 실감한 베브는 이상행동을 보이다 병원에서 해고된다. 할머니는 그런 베브를 보며 주변에 쉽게 휩쓸려 자신을 잃었던 할아버지와 닮았다고 말한다. 베브는 현실을 이겨내지 못한 채 헤로인에 빠지고, 아이들을 방치하기 시작한다. 현실은 희망적이기보단 불행했다.
넌 선택해야 해. 성공하고 싶은지 아닌지.
할아버지가 떠나고 점점 폭력적으로 변하는 엄마. 그리고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난. 그 속에서 아이들을 지켜준 건 할머니였다. 현실과 주변에 쉽게 휩쓸리지 않고 강인하게 살아간 유일한 어른이었던 밴스의 할머니는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리는 밴스를 설득한다. 밴스의 일탈을 조장하는 루이스와 프랭크를 본 할머니는 두 사람을 쫓아내며 밴스에게 선택을 하라고 말한다. 몇 년 후, 무료 식권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을 저 애들을 따라가든지, 여기 남을 것인지 말이다. 어린 밴스는 할머니의 뜻을 알지 못하고 반항을 계속한다. 그는 설거지를 하며 그릇을 깨고, 계산기가 필요하다며 도둑질을 했는데, 할머니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비싸다고 혀를 내둘렀던 계산기를 사서 밴스의 품에 안겨준다.
음식을 지원받을 만큼 빡빡했던 생계였지만, 할머니는 밴스를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1인분의 음식을 받으면 그중 절반 이상을 밴스에게 양보하고, 무력하고 폭력적인 사회로부터 밴스를 지켜준다.
이 세상에 가족 말고 더 중요한 게 뭐 있니?
여러 일을 병행해도 등록금을 충당할 수 없는 가난 속에 살아가고 있는데, 지원은커녕 헤로인에 중독된 어머니라니. 밴스의 입장에선 베브가 원망스러울 만도 하지만 밴스는 면접을 뒤로하고 오하이오로 향한다. 그리고 여러 카드를 내밀며 베브의 입원비를 낸다. 밴스는 베브를 욕하는 레이에게 분노하며, 면접 자리에서 고향과 어머니를 비하하는 상사의 말을 맞받아치기도 한다. 베브가 어떤 어머니였든 밴스는 결국 그녀를 감싸 안을 수밖에 없다. 가족이니까, 나의 어머니니까 말이다. 밴스는 소변 샘플이 필요하다는 베브를 외면하고, 갈등을 겪기도 하지만 가족 말고 더 중요한 게 뭐가 있냐며 어머니를 도와야한다는 할머니의 말을 듣고 베브를 도와준다. 그리고 베브가 함께 죽자며 폭력적으로 엑셀을 밟던 날. 어머니가 폭력을 휘둘렀냐는 경찰의 질문에 밴스는 그런 적 없다며 어머니를 놔달라고 소리친다. 용서하기 싫지만, 용서할 수밖에 없는 진한 혈연의 굴레 속에서 밴스는 결국 어머니인 베브를 용서하고 사랑하게 된다.
린지는 엄마도 우리와 같은 일을 겪었다며 용서하지 않으면 벗어날 수도 없다고 말한다. 대물림된 폭력과 가난 속에서 자란 베브, 린지, 밴스. 도망칠 수 없을 것만 같은 우울한 힐빌리의 사회에서 그들을 지켜준 건 든든한 할머니의 사랑이었다. 외면할 수 없는 ‘가족’이라는 인연 아래 세 사람은 삶의 희망을 찾는다. 밴스는 어릴 적 베브가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던 순간을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시간이 지난 후 베브가 다시 손을 내밀었을 때. 밴스는 그 손을 외면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폭력적인 어머니에게 입었던 상처는 가족이라는 단어와 어머니도 같은 일을 겪었다는 연민 아래 조금씩 아물고 있는 듯 보인다. 어린 밴스가 계곡으로 향하다 발견했던 거북이의 등딱지처럼 말이다. 밴스는 등딱지에 상처를 입은 거북이를 물가에 놔주며 “곧 나을 거야.”라고 말했다. 밴스도 그 거북이처럼 상처를 딛고, 곧 나을 수 있을것이다.
밴스는 자신의 모든 것이 가족들이 남긴 유산이라고 말한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말이다. 그에게 가족은 우울과 슬픔, 무거운 짐이기도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방패기도 했다. 끊어내고 싶어도 끊어낼 수 없는 질긴 혈연과 가난의 대물림. 그 사이에서 자수성가한 사업가 J.D. 밴스의 일대기를 담은 <힐빌리의 노래>는 ‘가족’이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지독한 저주일지, 하늘의 선물일지 모르는 그것에 대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