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후기,리뷰/ 왓챠 신작, SF,미스터리 영화 추천/결말 해석]
개봉일 : 2020.07.16. (한국 기준)
감독 : 로칸 피네건
출연 : 이모겐 푸츠, 제시 아이젠버그, 조나단 아리스, 세난 제닝스, 이안나 하드윅케
둥지를 선택당한 아기 새의 운명
데칼코마니처럼 정확하게 일치하는 대칭과 틀에 부어 찍어낸 듯 똑같은 집, 비현실적인 하늘과 기묘하게 휘어 올라가는 입꼬리를 자랑하는 중개인이 있는, 완벽한 마을 ‘욘더’. 시내에서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 멋진 이웃들이 있다는 그곳에선 상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비바리움>는 SF 장르의 영화다. 처음엔 ‘기묘한 마을’이라는 소재로 어떻게 SF 적인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건 기우였다. 대놓고 와르르 쏟아내는 것은 아니지만, 곱씹어 생각해 보면 이 영화의 장르는 SF가 맞다. 그리고 동시에 엄청난 미스터리 영화다.
만일 찝찝함과 기묘한 분위기, 손발이 꼬일 것 같은 느낌을 참을 수 없다면 <비바리움>을 추천하지 않겠다. 개인적으론 ‘호’에 가깝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자면 이 영화는 호불호가 상당히 명확히 나뉠 것이란 걸 부정할 수 없다. 본인은 완벽한 대칭과 강박적인 요소들을 즐기는 편이라 <비바리움>이라는 영화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지만, 답답함과 긴장감을 견딜 수 없는 편이라면 무조건 피하라고 말하고 싶다. 이 영화는 정말 기괴하고 파괴적이며 뒷맛이 찝찝하기 때문이다.
완벽한 집을 찾기 위해 여러 집들을 전전하던 젊은 연인 젬마와 톰은 그날도 어김없이 새로운 집을 보기 위해 중개사로 향한다. 그곳에서 만난 기묘한 표정의 중개인 마틴은 만화 속에 나올듯한 마을 ‘욘더’를 소개해준다. 젬마와 톰이 집을 구경할 동안 중개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두 사람은 똑같은 주택이 끝없이 이어지는 욘더에 갇히게 된다. 이 영화를 보며 왜 이 영화의 이름이 <비바리움>인지, 그 속에 속절없이 갇힌 두 사람의 존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여러 방면으로 의심하고 생각해 보라 말하고 싶다. 일부 악평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비바리움>이 그저 기괴하고 불쾌한, 잡소리를 담은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추가로, <비바리움>은 ‘동물 사육장’ 또는 소동물을 넣어 감상하는 원예활동을 의미한다.)
함께 살 곳을 찾던 ‘톰’과 ‘젬마’ 중개인으로부터 ‘욘더’라는 독특한 마을의 9호 집을 소개받는다. 똑같은 모양의 주택들이 즐비한 곳에서 알 수 없는 기묘함에 사로잡힌 순간, 중개인은 사라져 버린다. 어떤 방향으로 향해도 집 앞에 다다르는 이곳에서 우리의 선택은 없다, 오직 살아갈 뿐!
<비바리움>은 다른 새의 둥지를 빼앗는 뻐꾸기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아늑한 둥지에서 아기 새와 알을 밀어낸 탐욕스러운 뻐꾸기는 이내 끼이익-하는 기괴하고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뽐내며 당당히 둥지를 차지한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 젬마는 퇴근길에 바닥에 떨어진 아기 새를 보게 된다. 가만히 서서 죽어가는 아기 새를 지켜보던 여자아이는 젬마에게 “불쌍한 아기 새에게 누가 이랬을까요?”라고 묻는다. 젬마는 이건 ‘자연의 섭리’라고 답한다. 아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둥지가 필요하면 직접 만들면 되잖아요.”라고 말한다. 젬마는 어린아이다운 맑은 대답을 듣고 작게 웃는다.
강자와 약자가 모두 조화롭게 어울려 살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젬마의 말이 맞다. 강자가 약자의 것을 약탈하고, 강자에게 당한 약자는 죽어가는 것. 그게 바로 자연의 섭리이자 바꾸기 어려운 상하관계다. <비바리움>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강자인 욘더의 지배인과 힘없이 욘더에 갇힌 약자이자 실험체 같은 젬마와 톰이 있다. 아이는 “둥지가 필요하면 직접 만들면 되잖아요.”라고 말했지만, 젬마와 톰을 가둔 그들은 한 아이를 맡기며 “아이를 기르면 풀려난다.”라는 메세지와 함께 젬마와 톰이 욘더에서 마음대로 빠져나갈 수 없음을, 그들에게 여자아이처럼 맑은 마음과 자비는 없음을 다시 한번 알려준다.
식물을 가꾸는 정원사 톰과 아이들을 돌보는 선생님 젬마는 욘더에서 다른 이의 도움 없이 아이를 키우기에, 그리고 스스로 묻힐 무덤(땅굴)을 파기에 딱 적합한 인물이었다. 중개인 마틴과 9번 집은 두 사람을 기다렸다는 듯 "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는 문구로 두 사람을 반긴다. 9번 집은 원래부터 젬마와 톰의 집이었던 것처럼 커플 파자마와 식기, 환영 와인, 딸기까지 준비되어 있다. 마틴은 이미 두 사람의 입주가 확정되었다는 듯 환영 와인을 따라주려고 하지만 기묘한 분위기에 압도된 두 사람은 선뜻 음식을 받아들지 않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이상한 마을이네-"라는 말과 함께 왔던 길을 돌아 원래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욘더는 두 사람을 놔주지 않는다. 젬마와 톰이 9번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 카메라는 젬마, 톰, 마틴을 위와 같은 화면 구도로 비춰낸다. 문과 계단 사이에 자유롭게 서있는 마틴과 달리 두 사람은 촘촘한 계단 손잡이 사이에 갇힌 듯 보인다. 벗어날 수 없는 철창에 갇힌 사람처럼 말이다.
마틴은 욘더를 처음 사는 집이 아닌 '평생 살 집'이라고 표현한다. 욘더는 내가 선택하든, 선택을 당하든 어쨌든 '평생 살 집'인 것이다. 9번 집은 두 사람을 반기듯 불을 켜놓은 채 젬마의 차를 이끈다. 낮부터 밤까지 욘더를 빙빙 돌던 젬마의 차는 기름이 떨어지고, 9번 집 앞에 멈춰 선다. 젬마와 톰은 어쩔 수 없이 차에서 내려 환영 와인과 딸기를 먹고 잠에든다. 아무 맛도 나지 않는 음식, 다른 생명체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밖. 두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욘더에서 탈출하기 위해 하루 종일 담을 넘고, 또 넘어보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다. 두 사람이 지쳐 주저앉을 때를 기다렸다는 듯 민트빛의 집은 또다시 불을 밝힌 채 두 사람을 반기고 있다.
태워봐도 사라지지 않고 끝없이 이어지는 집. 그리고 같은 모양의 구름으로 가득 찬 하늘. 인위적이고 기괴한 마을 욘더에서 젬마와 톰은 하루 사이에 완전히 지쳐버린다. 그리고 그 앞에 나타난 새로운 생명. "아이를 기르면 풀려난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9번 집이 다시 눈앞에 나타난다. 비행기는커녕 다른 생명의 움직임조차 느껴지지 않는 마을에서, 두 사람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집 지붕에 HELP를 적어보지만 그 글씨와 집이 타는 연기를 보고 둘을 구하러 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98일째, 아이는 벌써 초등학생만큼이나 자랐다. 미리 준비되어 있던 파란 벽의 아들방에서 아이는 비정상적인 속도로 자라난다. 톰은 아이를 보며 "소름 끼치는 변종 새끼"라고 말하고, 아이는 표정 변화 없이 그 말을 따라 한다.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기괴한 목소리로 톰과 젬마, 개 흉내를 낸다. 이 아이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상한 물질이 섞여있는 흙과 기괴한 문양이 반복되는 TV 채널. 아이는 멍하니 TV 채널을 들여다보고 있다. TV 속에서 나오고 있는 문양을 지켜보고 있자면, 생명이 두근거리는 것 같기도, 무언가 자라나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의 중후반부, 젬마가 발견한 책에서 TV에 나왔던 문양과 알아볼 수 없는 암호 같은 그림들이 나오는데, 그건 아마도 톰이 ’변종‘이라 칭했던 그 아이만이 알아볼 수 있는 언어가 아니었을까? 아이는 TV를 통해 자신의 진짜 조상이 전하는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었던 건 아닐까.
SF라는 영화의 장르를 생각해 보자면, 그들은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였던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이를테면 '외계인'같은 것 말이다. 비정상적으로 빠른 성장과 노화. 그리고 숨길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와 표정을 가진 이유는 그들이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틴과 아이는 젬마와 톰의 행동을 따라 하며 자연스레 인간의 행동을 습득한다. 하지만 그 행동들은 따라 하기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차에서 냄새가 나.
100일쯤이 지날 무렵, 톰과 젬마는 젬마의 차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차에서 집과 같은 냄새가 난다고. 누군가가 보급해 주는 음식과 기묘한 마을. 계획대로 들어차있던 물건들. 두 사람이 진짜 집에서 가져온 것이라곤 젬마의 차와 입고 있던 옷뿐이다. 톰과 젬마는 욘더에 처음 오던 길에 들었던 음악을 들으며 차 앞에서 춤을 춘다. 진짜 나의 세계에서 들었던 마지막 음악이었다. 잠시 집으로 돌아온 듯 춤을 추던 둘은 아주 오랜만에 웃음을 찾는다. 그 짧은 행복의 순간을 깬 건 역시나 ’소름 끼치는 변종‘인 남자아이였다.
널 엄마로 만들고 있어.
아이는 무언가 필요할 때 소리를 지른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기괴하게 울음소리를 내던 뻐꾸기와 비슷한, 날카로운 소리로 말이다. 아이의 비명소리는 귀를 찢으며 톰과 젬마의 신경을 날카롭게 찌른다. 참다못한 톰은 아이를 차에 가두지만 젬마는 아이의 모습을 한 그 존재를 내버려 두지 못한다. 단 한 번도 꿈꿔본 적이 없다는 아이를 다소 따뜻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젬마는 아이의 침대에 함께 누운 채 눈을 감는다. 침대 옆에 쳐진 안전 펜스 사이로 젬마와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젬마가 아이에게 감정을 느낀 순간, 이미 그 존재에게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암시하듯 펜스는 젬마의 앞을 당당하게 가로막고 있다.
기묘한 세상에 단둘이 남겨진 젬마와 톰은 서로를 의지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지쳐간다. 톰은 땅밑에서 소리가 들린다며 땅굴에 더욱 집착하고, 젬마는 아이에게 조금씩 엄마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톰은 혼자 아침식사를 하고, 젬마는 아이와 함께 작고 완벽하지만 똑같은 구름이 흐르는 하늘을 바라본다.
아이는 순식간에 자라 성인이 된다. 바닥에 머리를 박았던 충격과 과로 때문이었을까, 톰의 몸은 점점 약해지고 세 사람은 더 이상 같은 테이블에 앉아 밥을 먹지 않는다. 이제 커져버린 아이는 거리를 두는 젬마에게 "무서워서 그래?"라고 묻는다. 젬마는 "아마도"라며 그 질문을 부정하지 않는다. 왜 어릴 때, 죽일 수 있을 때 죽이게 놔두지 않았을까? 젬마는 후회한다. 아이가 오늘 만난 사람 흉내를 내보겠다며 공포스러운 모습을 보여줬던 그날, 아이를 죽여버렸다면 지금쯤 탈출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톰의 몸은 하루가 다르게 약해지고, 아이는 무섭게 커가고 있었다.
아이는 젬마에게 술래잡기를 하자는 듯 빠른 걸음으로 마을을 돈다. 어디로 가는지, 어디서 다시 나타날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마치 귀신같은 그 존재는 구두 소리를 울리며 젬마의 곁을 빙빙 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젬마와 톰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려 퍼진다. 언젠지도 모르게 집으로 돌아간 아이는 두 사람을 밖에 두고 문을 잠궈버린다. 원래부터 9번 집은 내 집이었다는 듯. 아이는 죽어가는 톰을 보며 표정 없이 "풀려날 때가 됐나 보네."라고 말한다.
내 집에 있는 기분이었어. 네가 같이 있었으니까.
지금도 난 집에 있는 거야.
톰은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두 사람은 바닥에 앉아 첫 만남과 시원했던 바람을 기억한다. 톰은 젬마와 함께해 항상 내 집에 있는 기분이었다고 말한다. 젬마는 톰의 죽음을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톰이 사망했음을 인지한 아이는 젬마 앞에서 박스 안에 담긴 바디백을 꺼낸다. 젬마는 어떠한 말도, 큰 울음소리도 내지 못한 채 톰이 땅굴 안으로 버려지는 장면을 바라본다. 아이는 여전히 감정 없는 표정으로 쓰레기를 치우듯, 톰을 던져버린다.
아이와 알 수 없는 그 존재들은 톰과 젬마가 묻힐 땅굴조차 파기 귀찮았는지 땅 아래에서 소리를 흘려보냄으로써 톰이 스스로 땅굴을 파게 만든다. 톰이 땅을 파기 시작한 후, 톰과 젬마가 "땅을 파면 어딘가로 이어져있지 않겠냐"라며 땅밑을 파다 보면 호주 또는 지옥이 나오지 않을까?라고 농담을 하던 장면이 있다. 안타깝게도 톰이 죽기 전까지 팠던 그 땅밑엔 아름다운 호주나 탈출구가 아닌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난 대체 뭐야?
젬마는 혐오스러운 아이를 향해 곡괭이를 휘두르고 아이는 기괴한 소리를 내며 네발로 도망간다. 보도블록 밑으로 이어진 다른 집들. 젬마는 그곳에서 또 다른 아이와 또 다른 여성을 본 후, 다시 9번 집 계단으로 굴러떨어진다. 젬마는 묻는다. "난 대체 뭐야?". 아이가 답한다 "아들을 세상으로 내보낼 준비를 해주는 엄마."젬마가 다시 묻는다. "엄마는 그다음에 뭘 하는데?". 아이가 답한다 "죽지."
"너를 엄마로 만들고 있어."라고 화내던 톰의 말처럼, 아이는 연약한 외피를 이용해 젬마를 엄마로 만들려고 했으나, 젬마는 마지막까지 "난 망할 네 엄마가 아니야."라고 말하며 자신이 아이의 엄마가 아님을 다시 한번 얘기한다. 하지만 아이에겐 젬마가 진짜 엄마였든 아니었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젬마는 아이의 손에 끌려 땅에 묻힌다. 잔디는 순식간에 자라나고 아이는 그 사이 늙어버린 마틴을 대신해 이름표를 받는다.
마틴은 자신을 대신해 아이를 키워줄 존재를 찾기 위해 욘더라는 마을로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이미 나와 동행한 순간부터 입주가 확정되었다는 듯, 환영 와인과 음식까지 준비해놓고 말이다. 어쩌다 걸려든 젬마와 톰은 제대로 된 반항도 하지 못한 채 욘더에 갇힌다. 끝없이 이어진 똑같은 모양의 집과 어디로 가든 돌아오게 되는 길. 나는 마틴과 그의 종족은 젬마와 톰의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욘더는 아이를 키워줄 대리인이자 실험체인 젬마와 톰을 가둬둘 '비바리움'이었다. 그리고 9번 집은 자라난 뻐꾸기가 원래 살던 새들을 밀어내고 차지한 새로운 둥지였다. 9번 집에서 아이를 다 키워낸 젬마와 톰은 연약한 새처럼 집과 생명을 빼앗긴다. 순식간에 자라난 뻐꾸기 같은 아이는 자신을 키워준 엄마와도 같은 존재를 죽음의 땅굴로 밀어 넣었고, 늙어버린 마틴 또한 아이의 손에 마지막을 맞이한다.
그저 좋은 집에 살고 싶었던 젬마와 톰은 누군가의 선택에 의해 하나의 도구이자 실험체가 되고, 그 쓰임을 다하게 되자 죽음을 맞이한다. 조금 오버하자면,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었지만, 누군가의 결정에 의해 운명이 결졍되고, 모든 걸 희생하고 나서 끝을 맞이하는 삶. 비참하고 슬프지만 어딘가엔 존재하고 있는 삶이다. 약한 사람은 강한 사람에게 빼앗기거나 복종하며 살아간다. 그게 자연과 사회의 섭리다. 커다란 뻐꾸기에게 평생 일궈온 둥지를 빼앗긴 연약한 새에겐 죽음만 남아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