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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경 Sep 20. 2022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13시간의 기록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덕후의 바삭한 여름 이탈리아 여행기 (4)

4.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13시간의 기록

2022.07.13.


이탈리아 도착까지 9시간


13시간 15분. 오늘~내일 내가 비행기를 탈 시간이다. 내 인생 최장 비행시간이다. 지금껏 최장 비행시간은 홍콩에 갈 때였는데, 대략 3시간 반쯤이었다. 쫄보인 나는 하늘에 떠있다는 생각에 3시간 비행에서도 공포를 느꼈고, 한 번은 새벽에 쑤셔 넣은 햄버거에 체했던 기억이 있어 장시간 비행이란 자체가 조금 두려웠다. 게다가 출발 3일 전, 내가 타는 항공사의 비행기 엔진에 문제가 생겨 비상착륙을 했다는 뉴스까지 봐버린 상태라 내 겁쟁이 수치는 맥스를 찍고 있었다. 분명 불안감에 잠도 편히 못 잘 거라 예상한 나는 노트북에 넷플릭스 시리즈를 바리바리 다운 받고, 휴대폰 노래 플레이 리스트도 점검했다. 그리고 비행기에서 기절하길 바라며 딱 3시간 정도만 잠을 자고 나왔다.


잰걸음으로 걸어 비행기에 탑승한 후 자리에 앉자마자 기내 콘텐츠를 열어봤다.  13시간을 버틸만한 콘텐츠가 있는지 궁금했다. 근데 웬일? 내가 좋아하는 영화, 내가 사랑하는 배우가 나오는 영화가 꽤 많았다. 물론 최애가 엄청 많긴 하지만, 아무튼 갑자기 이 장시간 비행이 좀 자신 있어졌다. 비행기가 출발하면서 나오는 영상에도 나의 최애 오빠들이 나왔고, 콘텐츠에도 내 최애 오빠들이 가득하니.. 최애들과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 평소엔 6-70에 머무는 심박수가 100까지 올라갔고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이 떨림을 완화시키려고 콘텐츠 리스트를 헤매다 영화 <듄>을 틀었다. 그 덕분인지 이륙 과정과 이륙 초반의 흔들림을 무사히 이겨냈다. 30분쯤 지나자 너무 편안해 피곤함이 몰려왔고 어디선가 나는 밥 냄새를 맡으며 밥을 기다릴 만큼 여유가 생겼다. 어라, 이 정도면 나 비행기 잘 타는 걸지도? 자아도취에 빠진 상태로 첫 기내식을 먹었고 영화를 다 보고 잠깐 잠도 잤다. 근데 잠은 20분밖에 못 잤고 아직 9시간이 남았다… 이번 비행 만만하지 않구나.


- 이탈리아 도착까지 대략 3시간


한국 시간으로 13일(출발일) 23일 32분. 비행기가 뜬지 약 10시간이 지난 시점. 엄청난 발견을 했다. 지금까지 헤드폰을 반대로 쓰고 있었다. 왼쪽 오른쪽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멍한 상태로 영화를 봤나 보다. 벌써 <듄>, <고스트 버스터즈 라이즈>, <배트맨>을 다 보고 새로운 영화 <메리 미>를 보던 참이었는데… 대략 3편 반.. 정도 보고 화장실에 다녀오며 이제서야 알았다. 이 정도면 정신이 멀리 떠난 게 아닐까 싶다. 배도 슬슬 고픈데 이상하게 라면을 먹으면 체할 것 같은 기분에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두 번째 기내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 이탈리아 도착까지 대략 2시간 - 도착 직후


도착을 2시간 정도 남기고 두 번째 기내식이 나왔다. 메뉴는 소고기가 올라간 김치볶음밥과 닭고기덮밥이었다. 평소엔 김치를 잘 먹지 않지만 왠지 이탈리아에선 김치를 먹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에 망설임 없이 김치볶음밥을 골라 싹싹 비웠다. 첫 번째 기내식은 남겼지만 이번엔 남기지 않고 먹었다. 2시간 정도 남았다고 생각하니 기쁘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한다. 나, 무사히 밀라노로 갈 수 있겠지?


걱정을 하며 마지막 영화 <더 배트맨>을 보는 사이, 곧 착륙을 한다는 안내가 들려왔다. 결국 잠은 총 2시간도 자지 못했고 영화는 5편을 봤다. 러닝타임을 합치면 거의 11시간쯤 되려나? 안내가 끝나자 짐을 다시 점검하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쿵! 기체가 흔들리며 바퀴가 땅에 닿았고 나는 정말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멀리 보이는 창 너머로 말펜사 공항 외부에 자라고 있는 초록 나무들이 눈에 보였다. 도착시간은 약 오후 7시 55분. 처음 이탈리아 하늘을 보며 봤을 때 든 생각은 “아직도 밝네?”였다. 한국도 여름에는 해가 정말 길지만 왠지 여기는 더 밝은 것 같았다. 공항에 도착하면 어둑해져서 가는 길이 무섭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밝은 해가 괜히 든든하게 느껴졌다.


비행기 모드를 풀고 데이터를 켜자마자 온갖 안내 메시지와 여러 알람들이 우수수 들어왔다. 내가 진짜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짐을 찾으러 가며 사진을 몇 장 찍었는데 카메라가 무음으로 바뀌어있어서 참 신기했다. 혼자 다니면서 사진을 찍으면 그게 이상하게 민망했는데 무음 카메라라니. 괜히 기뻐서 속으로 “이게 바로 아이폰이지!”를 외쳤다.


처음 내려보는 말펜사 공항. 긴장한 어깨를 하고 심사대로 향했다. 앞에선 순서대로 부르는 대로 가라고 했지만 어떤 직원도 먼저 손짓을 하지 않았다. 한 2초정도 눈을 굴리다 일단 가장 먼저 빈 곳으로 향했다. 나는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검사나 심사를 한다 하면 머리나 몸이 깡깡 얼어버리는데, 그게 겉으로도 너무 티가 났는지 직원분은 활짝 웃으며 긴장하지 말라고 말했다. 근데 … 그 긴장하지 말라는 말이 영어잖아…? 대략 알아들었지만 영어 때문에 더 긴장됐다. 나는 긴장한 티가 팍팍 나는 얼굴로 심사를 기다리고 여권을 건네받으며 남은 이성을 쥐어짜내 겨우 한마디를 건넸다.


“Grazie!”

두근두근. 드디어! 마음속으로만 엄청나게 외쳤던 감사 인사를 해봤다. 스킬 레벨을 한 단계 더 찍어나간 기분이었다.


입국 심사대를 지나 짐을 찾을 타이밍. 내가 타고 온 비행기 짐이 어디서 나올지 굳이 전광판을 보지 않아도 상관 없었다. 왜냐면 아주 빠른 우리 한국인들이 이미, 선발대로 알아서 레일을 찾아가 한국말로 대화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처에서 들리는 한국말을 따라가면 99%의 확률로 나와 가는 곳이 같다. 그곳이 공항이라면 더더욱.


무거운 캐리어를 질질 끌며 기차를 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사람이 많아 정신이 없었지만 캐리어를 잡은 손과 팔에 힘을 더 꽉 주며 기차표를 끊었다. 나는 누가 훔쳐 갈까 봐 캐리어 벨트까지 꽁꽁 맸는데, 다른 여행객들은 쿨하게 캐리어를 그냥 짐칸에 놓고 가는 분위기라 좀 놀랐다. 하지만 나는 쫄보니까, 일단 자물쇠를 채웠다. 기차가 출발하기 전까지도 제대로 탄 건가 불안했지만, 이젠 불안해할 체력도 없어 그냥 해파리처럼 흐늘흐늘 자리에 녹아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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