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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경 Sep 28. 2022

밀라노 첸트랄레역에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덕후의 바삭한 여름 이탈리아 여행기 (5)

5. 밀라노 첸트랄레역에서

2022.07.13.

(5편인데 여전히 07.13... 여행 첫날이라 하고픈 말이 참 많았나 보다. 곧... 진짜 곧... 콜바넴 순례 갑니다...)


내가 기차 좌석에 녹아있는 사이, 앞자리에 왠지 로컬처럼 보이는 아주머니가 자리를 잡았다. 눈이 마주쳐 괜히 어색하게 한번 웃어 보이고 난 다시 푹 퍼져버렸다. 내 옆에도 한 남성분이 앉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기력이 없었다. 난 이방인이니까.. 저들도 내가 어색하겠지…? 나 되게 돈 없어보일텐데 안심하자…


나의 목적지인 밀라노 첸트랄레역(이하 편의상 중앙역)은 이 기차의 종점이다. 기차에서 가장 띠용-놀랐던 건 역 안내방송이 나오지 않았다는 거다. 아마 종점역이 아니었다면 엄청 불안해하며 구글 맵을 쭉 켜놨을지도 모른다. 대략 50여 분을 지나 드디어 중앙역에 도착했다. 이제 끝일 줄 알았다. 캐리어를 돌돌 끌며 나와 같은 방향으로 향하는 여행객들 사이에 녹아 긴 기차 플랫폼을 걸어나갔다. 이제 진짜, 가서 빨리 샤워해야지. 장시간 비행의 꿉꿉함이 여행의 설렘, 혼자라는 불안감을 가뿐히 이겨버렸다.


근데 역을 나서자마자 나에게 또 다른 시련이 생겼다. 숙소와 가장 가까운 출구 쪽엔 에스컬레이터가 아닌 긴 계단이 있었다. 매일, 당연하게 봐온 지하철 에스컬레이터가 없다. 다른 출구에는 있었으려나? 모르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캐리어 손잡이를 접고 힘을 쓰고 있는 걸 보아하니 아마도 이 방향엔 에스컬레이터가 없는 것 같다. 내일 다시 한번 확인해 봐야겠지만 일단은, 없는 걸로 보인다. 내면의 한숨을 한번 쉬고 가방을 어깨에 들쳐맸다. 그래, 안 내려가면 어쩔 거야? 내려가야지!! 하고 팔에 힘을 주는 순간, 한 남자분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You Need Help?”

아, 이거 어디서 많이 봤다. 도와준다고 하고 돈을 받으려나? 도와준다고 하고 들고 튀려나? 의심부터 먼저 했다. 근데 이분의 체격을 보아하니 이 계단에서 20kg짜리 캐리어를 들고 튈 몸은 아닌 것 같았다. 또.. 뭐… 돈 달라고 한다면… 그냥 줘버리자. 하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감동한 표정으로 땡큐를 연발했다.


내 대답을 들은 그는 캐리어의 손잡이를 접고 힘껏 캐리어를 들어 올렸다. 근데 그 순간, 그는 힘듦을 숨기지 못했다. “웁”… 겁나 무거운 나의 캐리어를 한 손으로 든 그에게 고맙고 미안해져 아무 말이나 조합해서 내뱉었다. “My bag so heavy…right?…ㅎㅎ….” 그는 끙끙거리며 답했다. “Nono…Im healthy…ㅎㅎ” 내 캐리어는 남자가 들기에도 가볍진 않았을거다. 계단도 길었고…  아마 자기보다 훨씬 작은 여자애가 끌고 다니는 걸 보니 크게 무겁지 않을 거라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숨을 훕-참으며 나대신 길고 긴 중앙역 계단의 시험을 통과해 준 그는 쿨하게 인사를 하고 지나갔고, 오후 10시 15분경 드디어 진짜 밀라노에 도착했다.


기차에 타고있던 50여 분의 시간 동안 해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어둡지만 여전히 밝은 이 도시에 내려 처음 한 일은, 바로 앞에 위치한 낯선 건물을 보며 감탄하기, 두번째는 마스크를 벗고 킁킁- 냄새를 맡아보기 였다. 밀라노는 특별한 냄새가 날것같았는데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걱정보다 사람도 많았고, 여기 사는 사람들은 나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동양인이라고, 큰 캐리어를 끌었다고 쳐다볼 줄 알았는데.


걱정을 한풀 접어두고 얼마 남지 않은 힘을 박박 긁어 기차역에서 5분쯤 거리에 있다는 숙소를 향해 걸었다. 역 앞은 밝았는데 역 옆으로 돌아가자 살짝 인적이 줄어들어 무서워지던 찰나, 내 옆으로 흰 셔츠를 입은 아저씨가 터덜터덜 지나갔다. 그의 복장, 표정, 발걸음… 같은 것을 보니 딱 (아마도 막 야근을 마친) 착실한 회사원 같았다. 건너편에서 어떤 남자가 걸어오는 게 보여 살짝 쫄아있었는데 이 아저씨가 있어서 왠지 안심이었다. 알고 보니 그 아저씨는 내 에어비앤비 숙소인 아파트에 사는 아저씨였고 나는 아파트 현관까지 그의 뒤를 졸졸 따라 안전하게 올 수 있었다. 10시에 퇴근한 회사원 아저씨… 내일은 늦게 출근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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