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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경 Oct 20. 2022

내가 이 기차에 앉아 있다니 : 크레마로 가는 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덕후의 바삭한 여름 이탈리아 여행기 (12)

12. 내가 이 기차에 앉아 있다니 : 크레마로 가는 길

2022.07.16.


어제저녁, 두오모 성당 앞에서 갑작스레 기절한 필름 카메라를 살려낼 방법이 없을까 싶어 여러 키워드를 넣어 검색을 반복했다. 그 결과, 확률은 희박하지만 어쩌면 배터리 교체로 새 생명을 얻을 수도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새건 아니지만 아직 한롤밖에 인화해보지 못한 카메라를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기에 이른 아침, 미리 짐을 모두 싸놓고 가까운 사진관으로 향했다. 처음 걸어보는 길에 대한 설렘과, 어쩌면 카메라를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15분 정도 걸었을까? 어릴 적 동네에 있었던 것과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작은 사진관에 도착했다. 사장님은 내 어색한 번역기 이탈리아어에 순간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짧은 영어를 섞어가며 열심히 배터리를 찾고, 계산을 도와주셨다. 그렇게 새 배터리를 사들고 숙소로 돌아와 카메라와 2차 씨름을 벌였다. 하지만 장렬한 패배를 겪은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카메라를 가방 깊숙이 집어넣었다. 아… 크레마 사진을 단 한 장도 찍지 못한 채로 고장나버리다니. 카메라가 너무도 야속했지만 그래도 카메라를 두대 챙겨 와 다행이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달달달달~ 캐리어를 끌고 중앙역에 도착했다. 지난 며칠간 역을 몇 번 들렸다고 그새 좀 익숙해졌다. 첫날엔 에스컬레이터가 어딨는지 몰라서 냅다 계단으로 내려가려고 했었는데, 이젠 미리 모바일 티켓도 끊어두고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해 여유롭게 위층으로 향하고 있는 나. 제법 기특하다. 


밀라노에서 크레마로 가는 직행 기차는 없고, 트레빌리오(Treviglio)역에서 환승을 한번 해야 한다. 이탈리아에 와서 공항 기차, 지하철을 타는 데 성공했지만 기차 환승은 처음이었기에 조금 떨렸다. 또… 대중교통 하면 자꾸 소매치기만 떠올라서 더욱 긴장됐다. 역 안에 가득 찬 사람들을 경계하며 기차 번호와 행선지, 플랫폼 번호를 반복적으로 되새겼다. 출발시간 15분 전쯤 플랫폼으로 가니 이미 기차가 문을 열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뒤쪽으로 좀 걸어가니 운이 좋게 캐리어를 바로 옆에 놓고 앉을 수 있는 입구 쪽 자리가 있어 잽싸게 앉았다. 그리고 혹시나 기차를 잘못 탄 건 아닐까 전광판을 수시로 주시하며 기차 출발 시간을 기다렸다.


기차가 출발하기 10분 전, 앞자리에 있는 배려석에 한 부부와 할머니가 함께 자리를 잡았다. 엄청 큰 캐리어 3개와 할머니의 휠체어까지 짐이 정말 많아 보여서 어떻게 도울 것이 없을까 힐끔힐끔 쳐다보던 찰나,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할머니는 ‘혹시 외국인이 쳐다본다고 기분 나빠하는 건 아니겠지?’ 하고 쫄아있던 나에게 별안간 손키스를 날려주셨다. “Grazie(그라찌에, 고마워)”라는 말과 함께. 실제로 한 건 아무것도 없이 힐끔힐끔 쳐다만 봤을 뿐인데 칭찬과 손키스를 받았다. 어라? 순간 당황했지만 나도 마스크 앞에 손을 대고 손키스에 응답했다. 대체 이들은 어떤 DNA를 타고났길래 이렇게 스윗한 걸까. 소매치기는커녕 온갖 친절을 온몸으로 받으며 여행을 할 수 있음에 문득 감사함을 느꼈다.


내가 할머니와 몇 번의 아이컨택을 반복하는 사이, 기차는 천천히 도시를 벗어나 환승역 트레빌리오로 향했다. 중앙역이 서울역 같은 느낌이었다면 여기는 경기 외곽에 있는 오래된 1호선 역 같았다. 밑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아니, 반만 있었다고 해야 하나...?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는 됐는데 환승을 위해 다른 플랫폼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임시 점검 중인지, 고장인 건지… 작동하지 않았다. 불이 들어오지 않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눈으로 보고도 이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잠시 내 캐리어를 들어줄 일행이 있으면 좋았겠다는 쓸모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현실에서 나를 지킬 수 있는 건 나뿐이라는 결론에 다 달았다.



‘그래, 난 이 캐리어 하나도 못 드는 나약한 사람이 아니니까!’

나는 상 여자답게 숨을 흡 들이쉬며 커다란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올랐다. 무교지만 잠시 신을 찾기도 했는데, 그게 신을 향한 기도였는지 욕이었는진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캐리어를 들고 땀을 한 바가지 쏟고 나니 정말 나를 크레마로 데려다 줄 기차가 플랫폼에 도착했다. 밀라노에서 타고 온 기차가 ITX 같은 느낌이었다면 여기서 갈아탄 기차는 무궁화호 같은 느낌이었다. 계단 또한 아주 높아 이게 옛날 기차라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다. (이때도 잠깐… 신을 찾았다.)



그래도 기차의 내부는 내 상상보다 깔끔하고 싱그러운 느낌이었다. 파란 의자와 노랑, 연두색 벽의 조합이라니… 정말 귀여웠다. 내부 색감에 감탄하며 자리를 잡고 나니 설렘이 밀려왔다. 신기한 일이다. 내가 정말 이 기차에 앉아 있다니 인터넷을 떠돌며 사진으로만 봤던 크레마행 기차에 내가 앉아있다니 끝없이 이어질 기세로 펼쳐진 들판을 보며 <콜미 바이 유어 네임> 속 여름을 떠올렸다. 모든 순간이 그냥 영화 그 자체였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아 참, 낭만에 빠져있는 사이에도 긴장을 늦추진 못했다. 이 기차 또한 정차역 안내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틈틈이 구글 지도와 멈추는 역의 이름을 열심히 읽으며 크레마에 도착할 타이밍을 기다렸다.


일기 속 순간을 다시 생각하며


어른이 된 이후로 가장 설레는 순간이었다.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오를 땐 정말 지옥이었지만.. 기차에 오르자마자 거짓말처럼 기분이 확 바뀌었다. 기차 좌석 옆에 붙어있는 재떨이마저도 예뻐 보일 만큼 온 세상이 꽃밭처럼 느껴졌던 순간.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도 많이 없어서 편하게 왔다.


+ 크레마로 갈 때 기차 편하게 타는 법 (기차 모바일 티켓 결제하기)

'Trenit' 어플을 설치한 후 출발, 도착역, 시간, 승객수를 설정한 후 검색 -> 적당한 기차 시간 클릭 -> Prices 탭에서 BUY 버튼 클릭 -> 지정한 기차 티켓만 결제 / 왕복 티켓 결제 중 옵션을 선택한 후 GO! 클릭 -> 인터넷 페이지에서 다시 시간표를 누르고 티켓을 결제하면 모바일 티켓이 발급된다.


미리 Trenit에 회원가입을 해두면 마이 페이지에서 편하게 결제, 티켓 재확인 가능! 하지만 기차를 많이 타지 않는다면 비회원으로 결제해도 괜찮다. 결제 시 입력한 이메일로 모바일 티켓이 오기 때문에 이메일 주소는 필히 꼼꼼히 확인해야 함. 역무원 분들이 티켓을 요청하면 그때 모바일 티켓의 QR코드를 보여드리면 된다. 지류 티켓은 창구 줄이 길 때도 있고 소도시의 경우 운이 안 좋으면 창구 쉬는 시간에 걸릴 수도 있다. 또 지류 티켓은 꼭 펀칭을 하고 타야 하므로 펀칭을 잊었다면... 식은땀을 흘리며 기차를 타야 한다. 운이 안 좋으면 벌금을 물기도 하고.


또 이 어플을 깔아 두면 좋은 게 기차 스케쥴 밑에 'Reg Trenord 0000(번호)'라고 적힌 부분을 통해 내가 타야 할 기차 번호를 알 수도 있고, 기차 스케쥴을 눌러보면 열차 지연이나 취소 소식, 각 역마다 출발, 도착하는 시간, 플랫폼 넘버까지 미리 알 수 있다. 기차를 잘못 타면 일정이 꼬이니까.. 각 플랫폼 위쪽에 달려있는 전광판을 통해 기차 번호, 플랫폼은 꼭 확인하고 타는 게 좋다.


Regionale Trenord 0000 = 타야할 기차 번호

ARR = 역에 기차가 도착하는 시간

DEP = 기차가 역에서 떠나는 시간

PLF = 기차 플랫폼 번호

INFO = 기차가 연착되거나 빨리 움직이면 정보가 표시됨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hkyung769/

https://www.instagram.com/movie_read_together/

블로그 : https://blog.naver.com/hkyung769

유튜브 : https://youtube.com/channel/UCTvKly8P5eMpkOPVuF63l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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