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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경 Oct 19. 2022

두오모 대성당 앞에서 떠나간 1번 카메라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덕후의 바삭한 여름 이탈리아 여행기 (11)

11. 두오모 대성당 앞에서 떠나간 1번 카메라

2022.07.15.


침대에 누운 채 좋아하는 영화를 보며 몇 번 잠들고 깨어나길 반복하다 보니 오후 3시가 좀 넘은 시간이 되었다. 해가 긴 여름답게 해는 여전히 열일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좀 쉴까? 하다가 해가 늦게 지기도 하고, 내일 크레마에 가면 밀라노는 당분간 못 볼 거라 생각하니 문득 아쉬워져 세수를 하고 나갈 준비를 했다. 오늘은 밀라노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그곳. 두오모 대성당에 가기로 했다. “소매치기가 무서우니 관광지는 거르겠다!”고 외쳤지만, 솔직히 이런 랜드마크를 하나도 못 보고 가면 왠지 억울할 것 같았다.



뚜벅뚜벅 걸어 다니기만 했던 어제와 다르게 오늘은 곧바로 지하철역을 찾아갔다. 스탠다드 뭐 하는… 무슨 트램이랑 다 탈 수 있는 티켓이 있다고 했는데 그 티켓이 어떤 건지 결국 알아내지 못하고 일단 하루 동안 사용이 가능한 티켓을 발급했다.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으니 왠지 현지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섞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기 시작하며 약간의 흥이 올라왔다. 하지만 신난다고 경계를 늦춰선 안 되는 법! 나는 가방을 품에 안을 기세로 꼭 붙잡고 지하철 문 앞에 찰싹 붙어 섰다. 사실 이건 내가 쫄보여서 그런 것도 있지만 이게 원래 내 습관이다. 지하철이든 버스든 엘리베이터든… 문이나 벽 근처에 찰싹 달라붙는 게 안정적이니까?


창에 비친 다른 승객들의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사이 지하철은 쭉 달려 두오모 역에 도착했다. 사람들 사이에 쓸려서 이리저리 걷다 출구가 아닌 환승 구간을 두 바퀴나 돌고 나서야 진짜 출구를 찾는 데 성공했다. 이미 땀을 죽죽 흘린 상태로 터덜터덜 계단을 걸어 올라갔는데, 정말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역 이름이 ‘DUOMO’이긴 했지만 이렇게 바로 성당이 눈앞에 있을 줄은 몰랐다. 계단을 올라가는 순간, 햇빛이 쫙 쏟아지고 웅장한 성당의 모습이 바로 눈에 들어오는데 와… 없던 종교도 생길 것 같은 홀리함이었다. 두오모 성당을 처음 보러 간다면 버스나 트램보다는 지하철 타기… 이건 꼭 다른 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잠시 아름다운 성당의 자태에 빠져있다가 푸드덕-하는 비둘기 날개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비둘기가 정말… 정말 정말 많았다. 대광장인지 비둘기 광장인지 헷갈릴 만큼. 호객꾼인지 장사꾼인지 아님 소매치기인 건지.. 뭔지 모를 아저씨가 간헐적으로 비둘기들 사이에 과자 같은 걸 던졌고 비둘기들은 그가 뿌린 과자를 따라 우르르 움직였다. 이 광경 또한 굉장했다. 그래도 비둘기를 보고 정신 차린 덕분에 뜨거운 햇빛에 피부가 익기 전에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근처 거리를 걸으며 장난감 가게 앞 근위병 옷을 입은 아저씨의 스윗한 인사를 받고, 볼빨간 사춘기의 노래가 나오는 버블티 가게에서 라임 티를 한잔 사 마시고, 형형색색의 트램들과 내가 본 중에 가장 고급진 외관을 한 H&M 매장을 구경했다. 빨대를 꽂자마자 티에 주르륵 흘린 라임 티마저도 흔적 없이 마를 만큼 덥고 건조한 날씨였지만 행복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진 말이다.



이탈리아에 온 지 3일 차. 매일같이 큰 사건을 하나씩 치고 있는데.. 오늘의 사건은 그중에 가장 큰 사건이다. 그건 바로 필름 카메라 하나를 고장 냈다는 것. 겨우… 겨우 한 롤밖에 현상하지 못한 필름 카메라인데… 사진을 찍고 전원을 급하게 끄는 바람에 안에서 무슨 에러가 났는지 정말 죽어도 전원이 안 꺼졌다. 안 꺼진다고 해서 사진이 찍히는 것도 아니었고, 튀어나온 렌즈도 제자리로 들어가지 않았다. 급한 대로 인터넷을 뒤적였는데 배터리 또는 필름 문제란다. 그런데 배터리를 뺐다가 넣어도 통하지 않았고 지금껏 찍은 10장을 버려도 좋으니 제발 작동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필름실까지 열어봤지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이 순간부터 멘탈이 와장창 깨진 나는 정처 없이 골목을 떠돌았고 저녁시간이 훨씬 지나 겨우 햄버거로 첫 끼를 때웠다.


아주 잠깐, 딱 한 번 나를 먹이기라도 하는 듯 카메라가 한번 작동되는 척을 했지만 곧바로 에러 코드가 떴고, 그렇게 그는 완전히 떠나가 버렸다. 호기롭게 들고 온 두 대의 카메라... 그중에 한 대가 밀라노에서 셔터 10방을 누른 후 고장이 나버렸다. 그래도 두 카메라로 다른 사진을 담아보겠다며 까불었던 과거의 나 덕분에 필름 촬영 자체가 무산되진 않아서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온갖 카메라 스토어를 돌아다니며 도와달라고 눈물을 쫠쫠 흘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뭐 몇 번이나 급하게 껐다고 이렇게 뻑이 가버리는지.. 별말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왔지만 카메라에 대한 분노를 뒤로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그래도 내일은 크레마로 가는 날이니까, 나의 성지로 향하는 날이니까… 마음을 가다듬고 짐을 정리해야겠다. 제발 이제 아무것도 망가지지 않았으면.… ㅠㅠ


일기 속 순간을 다시 생각하며


카메라가 고장난 후 이날 저녁은 내내 멘탈이 탈탈 털려있었다... 크레마에서 택배를 보내며 이 카메라를 함께 집으로 보냈다. 그리고 여행이 끝난 후, 필름 인화를 맡기러 을지로에 나간 김에 카메라 수리점에도 가봤지만 결국 고치지 못했다. 사장님 말씀으로는 쓸데없이 어지러운 구조로 된 카메라라나. 이 라인에서 가장 복잡하고 실패한(....) 모델이라고. 아예 못 고치는 건 아니지만 돈이 꽤 들 텐데.. 비싸게 주고 산건 아닐 테니 새로운 필름 카메라를 하나 사는 게 나을 거라고 하셨다. 그리고 며칠 후, 폐기 딱지를 발급받고 카메라를 정리했다. 그리고 이날 찍었던 필름은.. 위에 적은 것처럼 아주 간절한 마음과 작은 희망을 갖고 필름실까지 열어보는 바람에 모두 다 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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