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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경 Oct 05. 2022

천천히 멈춰 서는 기차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덕후의 바삭한 여름 이탈리아 여행기 (10)

10. 천천히 멈춰 서는 기차

2022.07.15.


7월 15일 7시 38분. 아침. 역에 천천히 멈춰 서는 기차를 보며 치킨을 씹고 있는 중이다. 몇 시부터 였는진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들은 내가 일어나기 한참 전부터 열심히 역을 오가고 있었겠지? 내가 머물고 있는 숙소는 역과 역 사이가 아닌 기차역 바로 옆에 있는 집이라 여기선 씽씽 달리는 기차 대신 속도를 줄이며 곧 멈춰 설 준비를 하는 기차, 브레이크를 풀고 서서히 달리기 시작하는 기차를 볼 수 있다.


이탈리아에 온 지 대략 36시간쯤 된 시점. 내가 지금까지 한 일은 별거 없다. 우선 평소 같았다면 절대 나가지 않았을 뜨거운 오후에 거리를 걸었다.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어딜 꼭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냥 걸었다. 코너를 꺾을 때마다 새로운 길이 나타나는 게 재밌어서 색깔도, 모양도 다른 건물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눈의 근육을 쉬지 않고 움직였다. 한 블록을 지나 새로운 방향으로 시선을 돌릴 때마다 마치 다른 동네인 듯 휙휙 바뀌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자연히 다음 블록엔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기대됐다. 새로운 공간은 무덤덤한 사람도 기대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어제 내가 해야 했던 일은 생필품을 구매하고 적당히 끼니를 챙겨 먹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여행을 오기 전, 대부분의 날들을 ‘시간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니 나 또한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고 생각하며 보냈다. 그렇다고 해서 거창한 걸 해내는, 갓생 사는 어른은 또 아니었으면서 초조함과 불안감은 여느 현대인처럼 잔뜩 받고 살았다. 새로운 공간에서 시간을 죽이며 ‘보통의 하루’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니 나 참, 별거 아닌 걸로 심각했네- 싶다. 여유를 줘도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말이다.


가만히 반쯤 누운 채로 창 너머로 보이는 기차역을 멍하니 바라보고, 글을 6줄쯤 써놓고 3시간 뒤에야 이어 쓰고, 생각 없이 걸어보고, 누군가에겐 일상의 일부인 평범한 길에 멈춰 서서 사뭇 진지하게 사진도 찍어본다. 급할 것이 하나도 없다. 이번 여행은 정말 급할 것 없이, 어떤 일을 꼭 하지 않아도 이미 여기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목표의 절반은 이뤘다고 생각하려고 한다. 나 자신을 의심하며 살아온 내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나를 믿고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반은 성공한 거라 본다. “이것도 해야 해! 저것도 해야 해!”라면서 숨차게 달려 다니기보다는 목적지에 들어서며 속도를 늦추는 기차처럼 천천히 걸어봐야겠다. 목적지가 항상 먼 곳에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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