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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경 Oct 05. 2022

우당탕탕 하루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덕후의 바삭한 여름 이탈리아 여행기 (9)

9. 우당탕탕 하루

2022.07.14.


눈을 뜨자마자 얼굴에 냅다 헤어 픽서를 칙칙 뿌려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는 무난하게 끝나지 않을까 기대했다. 천천히 산책하는 것도 문제없이 해냈고 선 스프레이와 얼굴에 바를 작은 수분 크림, 내 취향에 꼭 맞는 향수까지 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근처 마트가 닫기 전, 저녁에 먹을 물과 간식, 치킨, 필요했던 생필품까지 쟁여놨으니 이 정도면 훌륭한 하루였다고 박수를 치며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나의 하루는 내 기대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밀라노에 온 지 24시간. 나는 내가 은근 헐렁이는 정신의 소유자란 걸 알게 됐다. 나름 꼼꼼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어떻게 하는 일마다 실수투성이다.


한국에서 짐을 챙길 때, 짐 무게가 생각보다 많이 나오길래 샴푸와 바디워시를 아웃시켰다. 머리카락이 아닌 머리털로 불러도 될 정도의 손상 모발 상태라 한참을 고민했는데 여기는 물이 달라서 원래 쓰던걸 써도 안 맞을 거라나? 그런 말들이 많아서 트리트먼트류만 살려둔 채 과감하게 두 가지를 내려놓고 왔다. 그리고 첫 숙소에 샴푸가 있는 걸로 착각하는 바람에 생필품은 크레마로 넘어가서 사면 될 거라 생각했다. 근데 그건 내 착각이었고 이 숙소엔 샴푸와 바디워시가 없었다. 어젠 너무 늦은 시간에 도착해 근처에 이것들을 살만한 마트도, 24시간 편의점도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한국을 그리워하며 빳빳한 탈색모를 대충 빨고 숙소에 있던 비누로 몸을 씻었다. 대충 감아낸 머리는 한국에서보다 더 심한 개털 + 약간 떡진 바이브의 머리가 되었고 몸은 뭐… 그나마 비누라도 썼으니 괜찮겠지 애써 위로하며 하루를 버텼다.


그래서 오늘은 꼭 바디워시와 샴푸를 사서 제대로 씻어야지!! 다짐했건만… 다시 실패했다. 여기는 해가 정말 늦게 진다. 그래서 어느정도 시간이 됐음에도 저녁이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다. 9시쯤 숙소에 돌아와 짐을 내려놓고 9시 반까지 하는 마켓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곧 마감이라는 생각에 몇 간식과 눈에 보이는 아기용 샴푸와 바디워시를 집어 들었다. 아, 오늘은 제대로 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가방을 내려놓고 가장 먼저 샴푸를 꺼냈다. 깔끔하게 씻고 간식을 먹을 생각에 설렘 수치는 맥스를 찍었다. 근데, 뭔가 이상했다.


Anti..뭐시기 아기 샴푸… 그 옆에 있는 건.. Baby shampoo?... SHAMPOO…? 급한 마음에 Baby를 대략 Body로 보고 냅다 담은 나의 실수였다. 순한 아기 샴푸와 바디워시가 아닌 아기 샴푸와 아기 샴푸를 산 나. 오늘도 대충 씻었다. 그래도 비누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내일.. 아니다. 그냥 여기선 포기하고 다음 숙소에선 괜찮은 바디워시를 사서 써야지… 뻣뻣한 비누의 질감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바디 타월에게 얼른 촉촉한 바디워시를 적셔줘야 할텐데.. 크레마에선 꼭 바디워시를 사야지. 그래 나름 깔끔 떨며 사는 내가, 언제 또 이렇게 대충 씻어보겠어? 이것도 경험이다.



아기 샴푸 콤보 이후로도 바보 같은 사건은 끝나질 않았다. 첫 번째로는 흰 바지를 입자마자 대차게 오염시킨 후 주머니에 카드와 20유로를 넣고 손빨래 해버리기!!였다. 마트에서 급하게 나오면서 카드와 돈을 주머니에 쑤셔 넣어놓고 아기 샴푸 콤보에 놀라 잊어버리는 바람에… 돈과 카드를 바지와 함께 아주 오~래 오래 물에 담가뒀다. 계산할 때 무슨 바코드 기계 같은 걸로 위조 지폐 확인하던데, 물에 불었던 지폐라 뭐 코팅이 벗겨졌다든가…해서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 별 걱정이 다 밀려왔다. 20유로… 큰돈인데 말이다.


그렇게 쓸모없는 걱정을 하는 사이 두 번째 바보 같은 사건이 발생했다. 그건 바로 마트에서 사온 치킨 포장 태워버리기!!... 하… 바지를 붙잡고 어이없어하고 있는데, 갑자기 치킨이 돌아가고 있는 전자레인지에서 탄내가 났다. 훈제 치킨이긴 했는데.. 전자레인지에 데운다고 이렇게 탄내가 나나? 싶어서 확인해 보니 치킨이 포장된 랩 위에 호일 재질로 만들어진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누가 봐도 포장 그대로 전자레인지에 돌려먹어야 하는 비주얼인데, 호일 스티커 포장이라니. 내 마음처럼 살짝 그을린 채 쪼그라든 호일 스티커를 보며 괜히 이들의 포장 방식을 원망해 본다. 아니, 그렇다고 포장한 사람들이 잘못했다는 건 아니고… 호일 스티커를 못 알아본 내 눈이 문제겠지… 우당탕탕 대환장의 밤이다.


일기 속 하루를 다시 생각하며

아기 샴푸 콤보의 어질어질함은 정말... 아직도 생생하다. 그나마 바디워시 콤보가 아니어서 다행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 이후 숙소들은 대부분 샴푸와 바디워시가 있었고, 나중엔 정신을 제대로 챙기고 장을 봐서 이때처럼 비누로 몸을 씻는다거나 샴푸샴푸 파티를 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포장을 태워먹는 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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