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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경 Oct 26. 2022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그 동상 앞에서 +판디노 가는 법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덕후의 바삭한 여름 이탈리아 여행기 (17)

17.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그 동상 앞에서

2022.07.18.


대략 어떤 장소를 갈지는 정해놨으나 언제, 어디를 갈지는 정해놓지 않은 나의 크레마 여행. 어제의 나는 오늘의 행선지를 정해놓지 않았고, 오늘의 나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판디노에 가겠다! 급 결정을 하였다. 판디노는 크레마 근처 촬영지 중에선 유일하게 버스를 타고 바로 방문할 수 있는 장소로 동상 앞에서 엘리오가 마음을 고백하는 장면을 촬영한 곳이다.



올리버의 논문을 확인하기 위해 시내로 향한 두 사람은 자전거를 세워두고 동상 앞 울타리에 마주 보고 선다. 엘리오는 올리버를 향한 마음을 고백하고, 마음을 받은 올리버는 그것을 황급히 접어낸다. 진짜가 아닌 실수이길 바라면서, 또 진짜이길 바라면서. 처음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봤을 때 이 장면이 정말 인상 깊게 남았었다. 그래서 그런가? 크레마 시내를 대부분 돌아보고 나니 다음으론 가장 먼저 판디노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글 맵을 켜고 검색을 해봤을 땐 판디노에 가는 게 차암 쉬울 것 같았는데 이게 쉽지 않았다. 서울에선 체크카드 하나만 들고나가도 후딱 버스를 타고 다른 동네에 다녀올 수 있었는데, 여기선 버스 한번 타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기차처럼 버스 티켓을 끊는 어플도 있다는 것까진 알아냈는데 어떤 버스회사의 어플을 깔아야 하는지, 어떤 노선을 끊어야 하는지. 또 결제용 카드가 죽어도 등록이 안되는데…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하나도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모바일 티켓을 포기하고 종이 티켓을 사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이걸 또 어디서 사야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여행을 오기 전, 여기저기 검색을 해보며 ‘T라고 적힌 간판이 있는 타바끼에 가면 버스 티켓을 살 수 있다’는 정보를 얻긴 했지만 실제로 와보니 버스 티켓을 팔지 않는 타바끼도 있었고 이 버스 회사의 티켓을 팔지 않는다는 타바끼도 있었다. 그래서 무작정 아무 타바끼 안에나 들어가 버스표를 파는지, 이 노선의 버스표를 구할 수 있는지 물어봤다. 뚝딱거리는 번역기 말투였지만 타바끼 사장님들은 나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이탈리아어와 바디랭귀지, 몇 개의 영단어를 섞어 시계탑 근처의 가게로 가라며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역시 직접 발로 뛰는 게 가장 빠르다. 그들의 배려를 받고 찾아간 타바끼는 아주 허무하게도 숙소 바로 건너편 길에 위치하고 있었다. 아, 답은 숙소 문 바로 앞…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니. 정말 등잔 밑이 어둡다. 힘들게 찾은 만큼 몇 년후에 다시 온다 해도 이 타바끼의 위치는 절대 잊지 않을 것 같다.



투명한 가림막을 사이에 두고 사장님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눈 후 드디어, 버스표를 사는 데 성공했다. 이탈리아에 와서 버스를 타보는 건 처음이었고, 버스표를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거라곤 가격 정보밖에 없고, 흔한 바코드나 위조를 방지할만한 표식도 없는 흰 버스표를 보며 이 종이 쪼가리를 뭘 믿고, 어디로 가는 티켓인지 어떻게 구분하고 버스를 태워주는 건가 싶은 궁금증과 불안감이 동시에 들었지만 아무튼 사장님이 이 버스표가 있으면 갈 수 있다고 하셨으니 일단 믿어보는 거다.


이탈리아 버스 또한 우리나라처럼 모바일 카드를 찍을 수도 있지만 나처럼 모바일 카드를 결제하지 못한 여행객들은 종이 티켓을 펀칭기에 찍어야 한다. 버스에 딱 올라타면 누가 봐도 티켓을 야무지게 냠- 물어줄 것 같은 기계가 있는데, 거기에 티켓을 꽂으면 티켓 끄트머리에 펀칭 자국이 남고 날짜와 시간이 찍힌다. 버스를 타고 더듬더듬 거리며 티켓 펀칭에 성공한 순간의 느낌은 뭐랄까… 초등학교 저학년 때 처음으로 혼자 지하철을 타는 데 성공했을 때 느낌과 비슷했다. 그때는 이 버스 티켓과 비슷한 지하철 티켓을 개찰구에 넣어야 했으니까. 지하철 개찰구처럼 기계가 스스로 슉-하고 표를 빨아들이는 모양새가 아닌, 내가 직접 구멍에 티켓을 욱여넣는 모양새였지만 아무튼 성공했다는 게 기분이 좋았다. 나 이제 버스도 타봤다!


버스는 크게 시원하지도 덥지도 않았지만 딱, 접혀있는 신체 부위에 땀이 날정도의 온도였다. 무릎 뒤에 옹골차게 땀이 차올랐고 더위 때문인지 살짝 멀미가 나기도 했다. 시골 정취가 가득한 마을을 지나고, 넓게 펼쳐진 밭을 지나고, 좁은 도로까지 지나 드디어, 핑크색의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오는 정류장에 내렸다. 모두가 더위를 피해 집으로 돌아간 건지 아주 조용한 길을 걸으며 영화 속 그 풍경이 언제쯤 펼쳐질지 궁금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지도에서 안내한 마지막 골목을 꺾는 순간, 탁- 뜨거운 빛과 함께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동상을 가운데 두고 엘리오의 고백과 두 사람의 대화가 빙빙 돌았던 그 장소. 그 동상 뒤편에 내가 서있었다. 그늘을 따라 걷다가 갑자기 탁- 트인 광장에 나가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엄청난 햇빛을 받으며 단단하게 서있던 동상의 뒷모습은 비현실적일 만큼 멋있었다. 이 영화가 아니었다면 존재조차 모르고 지나갔을 작은 도시의 동상 앞에서 출처를 정확히 가늠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동상에 얽힌 전쟁의 역사 때문이었을까. 동상 앞에서 흩어졌던 엘리오와 올리버의 말들이, 그들의 발걸음이 떠올랐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내가 여기 서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동스러웠던 걸까. 뭐 고민할 것도 없이 세 가지 이유 모두 다겠지. 내가 진짜 이 동상 앞에 왔다니… 나는 여행의 매 순간마다 “내가 진짜 여기에 왔다!!”를 외치고 있다. 내 글을 읽을 누군가에겐 지겨울지도 모르겠지만… 매번 외칠 만큼 매 순간이 감동적인걸 어쩌나…?


벅찬 가슴을 안고 천천히 동상 주변을 돌아봤다. 그리고 엘리오가 가볍게 올라탔던 울타리 자리와 올리버가 손을 올렸던 자리에 번갈아 서보며 엘리오와 올리버가 어떤 시야로 서로를 바라봤을지 가늠해보고 두 사람이 걸었던 동선을 그대로 따라 걸으며 영화 속 장면을 떠올렸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이 장면이 정말 인상 깊었다. 강력한 감정을 품고 있지만 그 순간엔 “우린 이런 얘기 하면 안 돼.”라는 절대적인 규칙과 함께 연약하게 흩어져야만 했던 말들이 조금 슬프게 느껴져서.


툭 튀어나오는 마음을 막아낼 여력이 없었던 소년 엘리오와 그것을 이성적으로 겨우 막아내던 청년 올리버는 이 동상 앞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 순간 퍼뜩, 너무 현실적인 생각이 들었다. 이때 올리버에겐 논문 페이지가 뒤섞이는 문제가 생겼었지… 올리버의 입장에선 쏟아져 나오는 감정보다는 이성이 강했을 만도..하다...? 너무 복잡하고 고백받을 기분이 아니었겠네… 여기 서있으니 정말 이런저런, 별 생각이 다 든다.



운이 좋게도 나를 제외하곤 사람이 거의 없었던 널찍한 주차장에서 한참 햇빛을 받으며 서있었다. 근처 가게들도 모두 브레이크 타임을 갖는 가장 뜨거운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먼 그늘에서 바라보는 게 아닌 그 자리에 서서 최대한 많은 감정을 느끼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이 순간과 감정, 생각들을 통째로 어딘가에 저장해 두고 싶었다. 쓸모없다고 생각되는 작은 생각들까지 모두.


동상 하나만 바라보며 그 자리에서 1시간 반 정도 시간을 보냈다. 그 사이 여행객으로 보이는 커플 2-3쌍과 주민들의 차가 열댓 번 왔다 갔다 했고, 이 장소를 일부러 찾아온듯한 한 일행을 마주치기도 했다. 그들은 혼자 동상을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 마음이 쓰였는지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제안했다. 나는 그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어 땡큐 그라찌에! 를 3번 정도 외치며 동상 앞에 자리를 잡았다. 내 휴대폰을 받아 든 여성분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3장 정도 찍어주셨는데… …….. 사진 실력은 모르겠지만…. 마음이 참 예쁜 분이었다.


일기 속 순간을 생각하며


이 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가보고 싶었던 장소에 갈 수 있게 되었다는 벅찬 행운을 누리던 날이었고, 매 순간 친절한 분들을 만났던 날이었기 때문이다. 친절한 타바끼 사장님, 그저 카드 결제를 했을 뿐인데 대견하단 눈빛으로 칭찬 세례를 해주시던 카페 사장님,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나에게 웃으며 'Ciao~ Bella!' 하고 인사를 해준 예쁜 언니들, 버스 정류장 작은 나무 그늘에서 함께 버스를 기다렸던 누가 봐도 콜바넴 팬이었던 분들. 등등 여기에 왜 있나 싶은 외국인에게도 친절하게 대해준 그들 덕분에 늘 행복했다. 사실 여행 일자가 조금씩 지나갈수록 이들이 얼마나 큰 배려를 베풀고 있는지 잊어버릴 때도 있었는데.. 글을 정리하며 다시 생각해보니 나 참, 운 좋은 여행을 했다.


판디노는 정말 조용하고 붉은빛의 건물이 눈에 띄는 도시였다. 그리고 걸어 다니기 딱 좋을 만큼의 적당한 그늘이 있었고 간혹 가게와 집을 청소하고 있는 주민들이 눈에 띄었다. 딱 많은 가게들이 쉬는 시간대에 들리는 바람에 밥 한 끼도 먹지 못한 채 후다닥 도시를 빠져나온 느낌이라 못내 아쉬웠다. 판디노-크레마 사이에 있는 도시들도 참 예뻤고 주말에는 저 동상 주변에 작은 시장이 열린다고도 하던데...  떠나기 전 한번 더 못 가본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눈을 치켜뜨는 것도 힘들 만큼 햇빛이 강했던 날. 처음 버스표를 사고 장거리 버스 여행을 한 이 날의 두근거림을 앞으로도 아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통째로 저장할 순 없어도 최대한 많이.



+ 크레마에서 판디노로 가는 법, 동상의 위치

동상의 위치 : 지도에 표기된 명칭을 기준으로 'Monumento ai Caduti' (전쟁 기념관)을 검색하고 가면 된다. 동상은 기념관 바로 앞에 서있다.


내가 판디노행 버스표를 산 곳은 시계탑 뒤편에 있는 'Il Tabacco e la Pipa' 라는 이름의 타바끼. 다른 곳에서도 판디노 행 티켓을 파는진 모르겠지만 내가 산 곳은 여기! 시계탑과 가깝고 시계탑을 기준으로 버스를 타러 가려면 어차피 이 길을 지나야 하니 편하게 여기서 사길 추천. 판디노로 가는 버스 티켓 2장을 부탁드리면 알아서 티켓을 뽑아주신다. 티켓 금액은 장당 3유로 * 왕복 여정을 위해 미리 2장 구매하기! *


버스는 역과 정반대편인 도시의 하부에 있는 정류장 'Crema Via Crispi/ Campo di Marte'에서 'K525'버스 탑승. 정류장에도 시간표가 붙어있고, 구글맵에서 출발 편 더보기를 누르면 시간표를 전체적으로 확인 가능하니 판디노에서 크레마로 다시 돌아오는 막차 시간까지 확인하고 계획 짜기!

시기마다 시간표가 달라지는 것 같으니 누군가의 후기를 참고하기보단 구글에 뜨는 시간 또는 버스 회사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좋다. 판디노행 버스의 회사는 Autoguidovie


https://www.mycicero.it/autoguidovie/TPWebPortal/it

이 홈페이지에서 아래 사진처럼 출발지 - 도착지 / 시간 입력 후 버스 편을 조회하면 된다.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hkyung769/

https://www.instagram.com/movie_read_together/

블로그 : https://blog.naver.com/hkyung769

유튜브 : https://youtube.com/channel/UCTvKly8P5eMpkOPVuF63l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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