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행복한 라짜로> 리뷰, 해석 / 이탈리아, 왓챠 영화 추천
개봉일 : 2019.06.20.
관람등급 : 12세 관람가
장르 : 드라마
러닝타임 : 127분
감독 : 알리체 로르바케르
출연 : 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 루카 치코바니, 알바 로르와처, 니콜레타 브라스키, 토마소 라그노, 세르지 로페즈
개인적인 평점 : 4.5 / 5
쿠키 영상 : 없음
엔딩크레딧이 끝나도 쉽게 말이 나오지 않는 영화가 있다. 나에게 <행복한 라짜로>는 그런 영화였다. 엔딩 장면에서 한대 제대로 후려 맞은 후, 엔딩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멍하니 스크린만 쳐다봤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난 이 영화를 사랑하게 되었다. 어안이 벙벙했던 첫 만남 이후 <행복한 라짜로>를 두 번 정도 더 봤고, 이제야 말이 트여 글을 쓴다.
기독교인이라면 ‘라짜로’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요한복음서에선 예수가 부활시킨 순수한 청년, 루가 복음서에선 안타까운 거지로 나오는 라짜로. <행복한 라짜로>는 이 성경 속 인물들이 떠오르는 신비한 청년 ‘라짜로’가 바라본 세상을, 그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을 담은 영화다.
라짜로는 이해하기 힘들 만큼 선하고 우직하다. 그는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위해 자신의 피와 살을 내어주는, 현세엔 어울리지 않는 이타적이고 맑은 영혼을 가졌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착취하고 약한 자가 더 약한 자를 착취하는 세상, 내 이득을 위해서 누군가를 착취하려는 사람들 사이에 낀 라짜로는 여기저기 채여 나뒹군다. 하지만 그는 그 착취의 굴레에 뛰어들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가장 낮은 곳에 내려앉은 연약한 선(善)
이야기는 아름다운 시골 마을 인비올라타에서 시작된다. 라짜로와 농부들은 인비올라타의 지주인 후작 부인을 위해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좁은 집에서 단체 생활을 한다. 이들은 정당한 대가를 받는 근로자가 아닌 일한 만큼(실제론 그에 미치지 못하는 양의) 식량을 받는 소작농이다. 좋게 말하면 그렇고 사실 그냥 노예다. 닭장처럼 좁은 방안에 다닥다닥 붙어 잠을 청하는 소작농들, 후작 부인에게 이들은 한 마리의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이들이 소작농으로 일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아주 오~래 전 이야기인가 싶지만, 영화 초반부의 시간적 배경은 대략 90-00년대쯤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70년대 초 대홍수 이후 외부로 통하는 다리가 끊겨 인비올라타에 고립된 라짜로와 소작농들은 본인들이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다는 걸 모른 채 살아간다. 후작부인은 “도시로 가는 길엔 늑대가 우글거린다.”는 거짓말까지 해가며 소작농들을 묶어놓고 담배, 와인 등 물건을 사러 오는 상인, 신부도 후작 부인과 한패다.
인비올라타는 최소한의 인권조차 보장받을 수 없는,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이다. 소작농들은 이곳에서 인생을 갉아먹히고 또 누군가를 갉아먹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라짜로는 이 최악의 환경 속에서도 고고하게 선함과 순수함을 지켜간다.
후작 부인은 소작농들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난 농부들을 착취하고 농부들은 쟤(라짜로)를 착취해. 연쇄 작용이지. 쟤도 누군가를 착취할걸?” 탄크레디는 이렇게 답한다. “쟤는 착취하지 않을걸요.”
탄크레디의 말처럼 라짜로는 어느 누구도 착취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내어주는 존재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라짜로는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준다. 하지만 그 누구도 라짜로에게 고마움을 표하거나 진심을 담아 보답하지 않는다. 라짜로는 커피가 생기자마자 다른 소작농들에게 달려가 그 소식을 전하고 커피를 내오지만 소작농들은 라짜로를 무시하고 자리를 뜬다. 라짜로는 탄크레디의 강아지인 에꼴레에게 자신의 한 끼 식사인 빵을 내주기도 하는데, 심지어 개까지 라짜로의 성의를 무시한다. 라짜로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받은 보답은 탄크레디의 새총이 유일하다. 새총도 탄크레디가 진심을 담아 준비한 물건은 아니지만 라짜로는 이 부러진 새총 하나에 온 마음을 내준다.
소리 지를 뿐 듣지 않는 사람들
믿음은 있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
소작농들은 무언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기면 “라짜로!”를 외친다. 곤경에 빠진 종교인이 "오, 주님! 도와주세요!"하고 외치듯이. 라짜로는 잰걸음으로 걸어 다니며 농장 일들을 도맡아 한다.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자애로운 미소를 띤 채 말이다. 그런데 막상 라짜로가 이야기를 하면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영화의 초반부, 카를렛토 대신 늑대망을 보게 된 라짜로가 화장실에 가기 위해 카를렛토를 열심히 부르는 장면이 있다. 카를렛토는 당연히 라짜로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다. 라짜로는 조용히 말한다. “안 들리나 보네.”
극 중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라짜로를 외치고 예수와 신을 믿는다. 하지만 라짜로는 믿지 않는다. 라짜로는 주변 인물들에게 정말 많은 걸 보여줬음에도 말이다. 라짜로는 소작농들이 농장을 떠날 때쯤 죽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 부활했고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안토니아와 가족, 탄크레디 앞에 나타난다. 그는 음악과 바람의 움직임에 영향을 주고, 친구를 위해 피와 살을 내주고, 척박해 보이는 땅에서 생명(식용 가능한 야채들)을 찾아낸다. 그리고 라짜로가 머물렀던 인비올라타의 와인은 도시의 와인과는 다르게 유난히 맛있다는 평을 받았다. 이 정도 힌트들을 보면 라짜로가 어떤 존재를 뜻하는지 대부분 눈치를 챘을 것이다. 라짜로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그와 같은 신비한 존재. 성자다.
탄크레디가 라짜로를 집으로 초대해놓고 바람 맞힌 날, 집으로 돌아가던 라짜로 일행은 미사가 진행되는 소리를 듣고 성당으로 향한다. 하지만 성당에 있던 수녀는 비공개 미사라며 라짜로 일행을 성당 밖으로 내보낸다. 미사를 포기하고 모두가 트럭을 밀고 있는 사이, 라짜로는 달빛을 맞으며 눈물 흘린다. 자신에 대한 믿음을 전부 잃어버린 이들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는, 요한복음서에 적혀있는 예수의 모습처럼 말이다. 형제라 믿었던 탄크레디, 자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신앙심 깊은 자들 모두 라짜로에게 믿음을 보여주지 않았으니, 눈물을 흘릴만한 밤이었다.
가장 성스러운 존재가 가장 낮은 곳에서 평범한 존재들을 위해 온몸을 갈아가며 일하고 있는데, 평범한 존재들은 알맹이가 없는 믿음을 외치며 그를 걷어차고 있다.
순수하지 않은 세상을 떠나 다른 세상으로 간 라짜로
이방인을 향한 폭력
이 세상엔 순수함이 남아있지 않다. 이기심과 욕심만 있을 뿐이다. 후작 부인은 농부들을 착취하고 농장을 벗어난 소작농들은 물건을 훔치거나 사기를 치며 돈을 번다. 탄크레디의 아내가 된 테레사는 후작 부인이 부당하게 쌓아온 돈을 은행에 빼앗겼다며 은행을 괴물, 사기꾼이라 말하며 억울해 한다. 오래전 후작부인과 한패였던 상인 니콜라는 여전히 사람들의 노동력을 말도 안 되는 가격에 후려치며 이득을 남긴다.
이런 세상은 성자 라짜로가 살아가기에 적합하지 않다. 추워진 날씨에도 홀로 반팔을 입고 길을 걷는 라짜로의 모습은 그가 이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듯하다. 라짜로는 따뜻한 존중과 사랑이 아닌 겨울바람처럼 차가운 멸시만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는 결국 진정한 행복이 기다리고 있는, 아마도 그가 원래 머물렀을 것이라 생각되는 세상으로 떠난다.
라짜로는 그가 사는 세상과 이 세상을 이어주기 위해서, 그 세상엔 넘치고 이 세상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선을 나눠주기 위해서 내려온 존재다. 신이 실체를 갖는다면 가장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라는 말이 있다. 라짜로는 초라한 행색을 하고 가장 낮은 곳에서 선을 행하려 노력했으나 사람들은 그가 입을 뗄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이들의 눈에 라짜로는 자신들이 기다려온 전능한 성자가 아닌 이방인, 착취의 대상인 약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소리를 질러놓고 아무것도 들으려 하지 않다니. 이들은 대체 무엇을 믿고 어떤 기적을 기다려온 걸까. 선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세상, 그 한가운데에 서서 연약하고 불쌍한 선의 죽음을 지켜보며 나는 허무함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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