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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경 Jun 24. 2024

모호하고 불안정한 마음을 아른하고 녹녹하게

영화 <만추> 리뷰, 해석 / 한국 영화 김태용 감독

주요 내용

- 영화 <만추> 소개, 줄거리

- 애나와 훈의 공통점

- 흐린 애나의 마음에 훈이 가져온 변화

- 애나와 훈이 만든 연극이 의미하는 것

- 포크의 의미

- 훈이 애나에게 준 시계의 의미 / 애나의 과거, 현재

만추 (Late Auttumn, 2011)

모호하고 불안정한 마음을 아른하고 녹녹하게

개봉일 : 2011.02.17.

관람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멜로, 로맨스

러닝타임 : 113분

감독 : 김태용

출연 : 현빈, 탕웨이, 김준성, 존 우, 대니 랭, 카타리나 최

개인적인 평점 : 4.5 / 5

쿠키 영상 : 없음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지나간 축축하고 차가운 날. 또는 계절에 상관없이 갑작스레 비가 내리는 날이면 자주 이 영화가 떠오른다.


애나는 과거 어떠한 이유로 남편을 죽이고 7년째 교도소에 수감 중인 범죄자다. 초반엔 그녀의 과거가 길게 설명되진 않지만 오프닝 시퀀스에 나오는 상처 가득한 얼굴, 넋이 나간 눈빛만 봐도 그녀가 남편을 왜 죽음으로 몰고 갔는지, 그녀의 과거가 어떠했는지가 어느 정도 설명된다. 수감된 지 7년이 지난 해, 애나 어머니의 부고가 들려오고 그녀는 3일간의 짧은 외출을 허락받은 후 고향 시애틀로 향하는 버스에 탄다.

훈은 사랑이 고픈 여자들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며 근근이 삶을 이어가고 있는 남자다. 그는 재수 없게도 불법적인 힘을 휘두를 수 있는 고객의 남편에게 걸려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상태다. 훈의 동료는 당분간 몸을 사리길 추천하고 훈은 쫓기듯 시애틀행 버스에 올라탄다.


두 사람은 다른 인종의 승객들이 가득한 버스에서 본능적으로 서로의 존재를 인식한다. 훈은 애나에게 버스비를 빌리고 다음 만남을 기약하려 하지만 애나는 훈의 관심을 매정히 차단한다. 그 후 두 사람은 각자 다른 하루를 보내며 시애틀을 헤매다 터미널에서 재회한다. 어색하고 불편해진 도시를 떠나려던 여자와 떠날 곳이 없는 남자는 뿌연 안갯속에서 어른어른한 감정을 나눈다.


섬세한 감정 표현과 배경 연출, 대사, 그리고 극 중에 깃든 계절감이 정말 좋은 영화다. <만추>를 한 번이라도 보게 된다면 영화 자체가 마음에 들었든 들지 않았든 상관없이 극중 날씨와 비슷한 날을 맞이할 때마다 어김없이 이 영화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애나와 훈의 공통점
도망자들의 사랑


간혹 정반대의 사람에게 끌리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나와 비슷한, 나와 잘 맞는 사람에게 더욱 쉽게 공감과 애정을 느끼게 된다. 애나와 훈이 그런 경우다. 두 사람에겐 내, 외적인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은 동양인의 외모를 가졌다. 애나와 훈이 처음 마주친 버스 안, 두 사람은 그 버스에서 유일하게 동양인의 외모를 가진 승객이었다. 애나는 고향이 시애틀이니 미국인일 확률이 높긴 하지만 외모는 아시안이기에 동질감을 느낀 훈은 중국어로 말을 걸며 애나에게 다가간다.


애나와 훈은 도망자의 신분을 가진 사람이다. 애나는 72시간의 외출 동안 위치를 보고해야 하고 전화를 받지 않으면 도망자가 된다. 그녀는 3일이란 시간에 쫓기고 있는 도망자다. 훈은 고객의 남편에게 쫓기고 있는 도망자다.

비슷한 상황에 처한 두 도망자는 함께 어두워지는 시애틀의 뿌연 안갯속을 걷는다. 마치 그것이 그들을 숨겨주기라도 할 것처럼.

흐린 시애틀의 날씨와 울적한 애나의 마음 & 훈이 가져온 변화


도망자이자 범죄자인 애나가 처해있는 현실은 불편하고 삭막하다. 무언가를 즐기고 감상에 빠져있을 시간 따위는 없다. 버스에서 돈을 빌린 훈은 애나에게 돈을 갚을 다음을 약속하며 자신의 손목시계를 채워주지만 애나는 훈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

애나의 가족들은 어머니의 유산 문제로 불편한 관계가 되었고 한때 사랑했기에 함께 도망치기를 약속했던 왕징(집에서 만난 오빠의 친구)은 그날 아침(남편이 죽던 날) 이후 애나를 배신했다. 지금 애나에겐 즐거운 현재, 기대되는 미래 같은 건 없다. 애나에게 남은 건 그녀를 붙잡는 지독한 과거뿐이다. 그녀는 3일이라는 복귀 시간뿐만이 아니라 여전히 생생한 아픈 과거의 시간에서 도망치고 있는 도망자이기도 하다.


그래도 어떻게 얻어낸 3일인데, 애나는 홀로 기분 전환을 해보려 화려한 옷을 사입고 오래되어 막혀버린 귓볼에 귀걸이를 욱여넣어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현실은 그대로다. 홀로 길거리를 헤매던 애나는 다시 옷을 갈아입고 티켓 부스를 서성인다. 애나의 심리를 보여주는 듯 시애틀의 날씨는 계속 흐리거나 비가 오고 있다.

애나가 터미널 앞에 앉아 복귀를 고민하고 있을 때, 막 일을 끝낸 훈이 그녀를 발견한다. 애나는 홧김에 훈에게 육체적인 관계를 제안하지만 좋지 않은 기억이 밀려오는 바람에 훈을 강하게 밀쳐내게 된다. 그 순간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던 구름이 비를 쏟아내고 애나도 함께 눈물을 터트린다.


애나의 눈물을 본 훈은 잠시 당황하는 듯 보이지만 이내 다른 서비스로 애나를 만족시켜주겠다며 애나를 이끈다. 애나와 훈이 함께 시애틀을 여행하는 동안 시애틀의 날씨는 조금씩 맑아진다. 두 사람이 탄 관광버스의 가이드는 이렇게 말한다.

"이맘때 시애틀은 안개가 끼고 비가 오는데 지금은 해가 나네요.”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출연자와 관객에서 사랑을 속삭이는 두 출연자로
애나와 훈이 범퍼카에 앉아 완성한 한편의 연극이 의미하는 것


훈이 자신 있게 애나를 이끌고 간 첫 번째 장소는 놀이동산이었다. 하지만 놀이동산은 입장이 불가능한 상태였고 훈과 애나는 구석진 곳에 있는 범퍼카를 타게 된다. 그러던 중 인부들에 의해 앞을 가로막고 있던 장애물들이 하나 둘 치워지고 마치 영화관 스크린 또는 연극 무대처럼 느껴지는 제한된 시야와 두 남녀가 나타난다. 훈은 두 남녀의 모습에 더빙을 시작한다. 애나는 말없이 두 남녀와 훈이 만들어낸 사랑의 연극을 지켜본다. 훈은 이 연극의 출연자, 애나는 관객이다.


출연자와 관객, 이 포지션은 두 사람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투영된다. (처음부터 연애 감정은 아니었겠지만) 훈은 처음부터 애나에게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돈을 갚지 않아도 괜찮다는 그녀의 손목에 아끼는 시계를 채워주고 그녀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열심히 대화를 이어간다. 애나는 훈이 취하는 액션을 맞받아치는 파트너가 아닌 지켜보기만 하는 관객의 입장을 고수해왔기에 두 사람의 관계는 이어질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애나가 훈에게 맞춰 여자 목소리 더빙을 시작한다. 두 사람은 자연스레 대사를 주고받으며 연극을 무사히 마친다. 그리고 이후 애나는 훈의 행동에 반응을 보이고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해 주기도 한다.

왕징이 함부로 쓴 포크
애나와 훈이 가장 솔직하게 감정을 내보였던 장면 / 포크의 의미


함께 더빙을 하던 장면이 애나와 훈의 마음이 첫 번째로 만나는 순간이었다면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왕징을 만나는 장면은 두 사람이 각자의 감정을 가장 솔직하게 내보이는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애나에겐 남편을 죽인 과거가 있다. 애나는 유령 시장에서 훈에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는다. 훈은 그 이야기를 모두 들은 이후 애나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여한다. 그리고 애나가 해준 이야기 속에서 ‘남편을 두고 함께 도망치자’고 제안했던 옛 연인이 왕징임을 눈치챈다.

애나는 당연히 왕징이 불편하다. 함께 도망치자고 하더니 남편이 죽은 후 혼자 쏙 빠져나가고 그걸로도 모자라 누구는 범죄자로 교도소에 수감된 사이에 새로운 여자를 만나 결혼까지 했다. 거기에 만나자마자 사과 대신 “나도 거기에 다시 가려고 했어.”라는 변명부터 꺼내 놓는 뻔뻔함까지 갖췄다.


아무것도 모르는 왕징의 아내는 애나를 ‘남편의 소꿉친구 동생’ 정도로 인식하고 애나의 오른쪽에 붙어 앉는다. 왕징은 아내를 따라 조금 거리를 두고 애나의 왼쪽에 앉는다. 그리고 뒤이어 등장한 훈은 왕징과 애나 사이 틈을 꿰차고 앉아 결혼 이야기를 하며 애나와 왕징 사이의 거리를 넓힌다. 이때 카메라는 네 사람이 대화하는 대부분의 장면을 왕징의 아내, 애나, 훈을 쓰리샷으로 잡고 왕징을 원샷으로 잡으며 인물들 간의 거리감을 더욱 넓혀준다.

애나가 자리를 뜬 사이 왕징과 대화를 나누다 갈등을 빚는다. 이때 훈은 싸움의 이유를 “이 사람이 내 포크를 썼다”고 말한다. 난 훈이 말하는 ‘포크’가 애나 or 애나의 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애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훈이다. 왕징은 애나를 배신했으며 지금도 그녀를 사랑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왕징은 애나를 오랫동안 봐왔다는 이유 하나로 현재 애나의 옆에 있는 훈을 경계하고 훈과 애나에게 멋대로 참견하려 한다. 애나를 아끼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훈의 말을 들은 애나는 훈의 말에 동의하며 “이 포크는 당신 게 아니라”고 소리친다. 애나가 말하는 ‘포크’ 또한 애나 or 애나의 마음을 의미한다. 왕징은 이미 애나의 사랑을 자기 마음대로 소비하고 배신한 사람이다. 그런데 또다시 애나의 앞에 나타나 그녀의 일에 참견하려 한다.


“이 포크는 당신 게 아니라고요!”, “모르고 그랬다고 해도 빨리 사과해요!”

애나의 남편이 사고(셋이 다투다 잘못 넘어져 죽었다든지..)로 죽었고 그 현장에 애나와 왕징이 있었던 건지, 애나와 왕징이 마음먹고 남편을 죽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포크를 모르고 썼든 알고 썼든 상관없이 사과를 해야 하는 것처럼 남편의 죽음이 사고였든 사건이었든 상관없이 왕징은 애나를 배신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왕징은 애나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애나는 훈의 분노에 힘을 얻어 7년동안 꾹 참아왔던 울분을 토하고 왕징은 그제야 애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훈이 애나에게 준 시계의 의미
아픈 과거 왕징, 현재이자 미래인 훈. 다시 흐르기 시작한 애나의 시간


왕징이 애나를 계속 붙잡는 아픈 과거였다면 훈은 현재이자 미래다. 훈은 애나에게 시계, 즉 시간을 건네주고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한다. 하지만 애나는 계속해서 훈의 시계를 빼거나 어딘가에 두고 가는 행동을 통해 아직 훈을 만나거나 미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표현한다.

지난 7년간 애나의 마음은 멀쩡한 날이 없었을 거다. 안개나 구름이 껴 흐리거나 비가 오는 지금 시애틀의 날씨처럼. 사랑에 배신당하고 상처받아 망가진 마음이니 특히 사랑에 있어선 더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건 당연하다.


애나는 장례식장에서 겨우 과거를 털고 교도소로 돌아가는 길에서도 훈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한다. 맑아졌던 날씨는 다시 흐릿해져있다. 안개 때문에 잠시 버스가 멈춰 서고 애나는 그제야 겨우 마음을 정한다. 그녀는 훈이 준 시계를 손목에 차고 훈에게 줄 커피를 사서 버스로 돌아온다. 그 사이 안개는 걷혔고 애나는 훈과 함께할 미래를 받아들일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훈은 자신을 쫓고 있던 고객의 남편에게 걸려 죄를 뒤집어쓰고 경찰에 연행되고 만다. 안갯속에서 헤매다 드디어 길을 찾았는데, 드디어 애나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는데 두 사람의 감정은 안개와 함께 사라지고 만다.

 두 사람의 관계도 앞서 범퍼카에 앉아 완성했던 연극처럼 꽉 닫힌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개인적으론 <만추>의 엔딩은 꽉 닫힌 해피엔딩이 아닌 활짝 열려있는 엔딩으로 느껴졌다. 애나의 눈길이 닿는 곳에 훈이 있을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


훈은 시간에 쫓기는 애나에게 자신의 시계를 채워주며 행복한 시간을 선물하고 애나는 그에 힘을 얻어 과거를 털어내고 새로운 시간을 살아간다.

이동진 평론가는 <만추>를 “결국 사랑은 시간을 선물하는 일”이라 코멘트했다. 이 영화의 한 줄 평을 어떻게 해야 할까. 글을 쓰기 시작할 때부터 고민했는데 아직도 이만큼 이 영화를 잘 설명할 만한 말을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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