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화란> 리뷰, 후기, 해석 / 한국 누아르 영화
개봉일 : 2023.10.11
관람등급 : 15세 관람가
장르 : 드라마
러닝타임 : 124분
감독 : 김창훈
출연 : 홍사빈, 송중기, 김형서, 정재광, 유성주, 박보경, 김종수, 서동갑, 홍서백
개인적인 평점 : 3.5 / 5
쿠키 영상 : 없음
괜찮은 누아르 영화가 나왔다. 과도한 신파, 비처럼 쏟아지는 욕설 없이도 예상보다 더 깊은 맛이 있었던 영화 <화란>. ‘불행 포르노 같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아주 어둡고 괴로운 이야기였지만, 나는 저 깊은 곳에서 퍼올려지는 끈적한 절망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누아르 영화를 즐기는 편은 아니다. 칼, 피, 상처, 욕설에 긴 시간 노출되는 건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끔씩은 누아르 영화를 찾아보는 이유는 이 장르가 가진 특유의 끈적함과 씁쓸함 때문이다. 거친 대사와 위태로운 상황, 거칠어 보이는 인상 아래 숨겨져있는 인간의 본능과 상처 그리고 깊은 밑바닥에 치달았을 때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처절하고 처연한 감정. 매일은 아니어도 가끔은 이런 게 생각난다.
개봉 전, <화란>의 몇 가지 키워드가 내 궁금증을 유발했다.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초청, 신인 감독의 데뷔작, 송중기 배우의 새로운 모습. 사실 이 키워드들이 없었다면 관람을 고려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서 생각했다. 이 영화에서 진짜 중요한 키워드는 위의 것들이 아니었다.
배우 사이의 밸런스
홍사빈, 송중기, 김형서, 정재광. <화란>의 주연 배우들의 이름을 나열해 보면 ‘송중기’라는 이름이 상당히 크게 느껴진다. 이야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캐릭터는 홍사빈 배우가 연기한 연규인데, 그 옆에서 조력자, 보호자가 되어주는 캐릭터 치광을 송중기 배우가 연기한다. 그러다 보니 혹시 배우 자체의 무게감 때문에 이야기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을까, 다른 배우들에게 눈이 덜 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건 기우였다.
홍사빈 배우는 혼자서 충분히 스크린을 꽉 채웠고 정재광 배우는 이야기의 텐션을 유지하는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리고 김형서 배우는 기대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와 연기자로 데뷔해도 진짜 잘하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실제로 영화에서 연기하는 모습은 내 상상 그 이상이었다. 오히려 송중기 배우의 치건 캐릭터가 조금 아쉽게 다가왔을 만큼 홍사빈, 정재광, 김형서. 세 배우가 보여준 연기가 상당히 기억에 남는다.
아쉬웠던 뒷심과 호불호 포인트
<화란>의 장점과 아쉬운 점이 확실히 보이는 영화다. 각 캐릭터와 그들 사이의 관계성을 잘 살렸고, 몰입력도 뛰어나다. 축축하고 차가운 분위기도 좋았다. 하지만 뒷심이 모자라고 뒤로 갈수록 살짝 맥이 빠진다는 아쉬운 점이 있다. 엔딩 자체가 허무하다는 느낌은 아니고, 엔딩으로 가는 과정에서 아쉬움이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호불호가 갈릴만한 포인트는 어두움이다. 아무래도 분위기 자체도 어둡고 주인공이 계속 절망 속으로 빠지는 이야기다 보니 보는 내내 기분이 팍 가라앉는 느낌이 들만한 영화다. 아름다운 구원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이야기니 이런 분위기를 싫어한다면 추천하지 않겠다.
항상 존재하고 있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조명하다
<화란>은 조폭, 대부업처럼 일반적인 사회에서 분리된 ‘어두운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누아르 영화가 아니다. <화란>은 우리가 쉽게 인지하지 못하는, 일반적인 사회 안에 스며들어있는 가정폭력과 폭력의 대물림에 대해 이야기한다.
<화란>의 주인공인 17살 연규는 평범하지 못한 걸 넘어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친아빠는 본 기억이 없고, 집안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알코올 중독 새아빠는 연규에게 심한 폭력을 행사한다. 짐승처럼 들리는 숨소리, 문 밑으로 보이는 그림자와 유리 너머 실루엣, 연규에 눈에 보이는 새아빠의 모습은 괴물과 다르지 않다.
이 절망적인 현실에서 청소년인 연규가 할 수 있는 일,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 연규를 둘러싼 상황은 최악을 넘어 절망으로, 그리고 지옥으로 바뀐다. 더 이상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는 상황. 우연히 연규 앞에 나타난 대부업 조직의 중간 보스 치건은 연규에게 돈을 빌려주고, 또다시 돈이 필요해진 연규는 돈을 벌기 위해 치건을 찾아간다.
연규는 치건의 밑에서 그의 행동을 따라 배우고 어두운 세계에 적응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연규는 그 세계 안에 서있는 자신의 모습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지옥을 탈출하고 싶어 들어간 지옥엔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는 새아빠와 닮은 자신이 있었다. 연규는 갈등을 반복하고, 결국엔 직접 이 상황을 타파하기에 이른다.
연규는 17살이다. 17살이라면 당연히 어른들과 사회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연규의 이복동생 하얀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이들은 가장 작은 사회인 가족 내에서 폭력을 당한다. 그리고 힘이 없는 엄마는 연규의 합의금, 하얀이의 학원비도 내주지 못하고 아이들을 물리적으로도 보호해 주지 못한다. 그렇게 폭력에 노출된 채 자란 연규는 또 다른 폭력에 연루된다.
괴물이 되지 않은 연규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던 연규에게 손을 내민 어른은 치건이 유일하다. 치건은 자신과 비슷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는 연규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자신이 받아본 적 없는 어른의 관심과 보호를 제공한다. 연규는 처음 느껴보는 따뜻함, 물리적인 힘이 주는 안정감에 끌려 치건의 옆에 자리를 잡는다.
치건과 연규는 닮았다. 둘 다 어린 시절에 어른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치건은 귀에 연규는 눈가에 어른이 만든 흉터가 있다. 그리고 폭력적인 어른 밑에서 자랐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지금 같은 세계에 서있게 된다.
하지만 치건과 연규는 다른 선택을 한다. 치건은 자신이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어린 시절, 조직 보스의 손에 거둬진다. 그는 그대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채로 어른이 된다. 연규는 한창 흔들리던 시기에 치건을 만난다.
연규도 초반엔 치건과 조직이 가진 폭력성이 주는 안정감에 만족을 느낀다. 자신을 괴롭혔던 일진들을 한방에 정리하는 승무를 보고 우월감을 느끼기도 하고, 일방적인 해고를 통보했던 중국집 사장님에게 갑의 입장으로 찾아가 큰소리도 쳐본다. 잘못된 일인 걸 알아도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강자가 된 느낌이 나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 연규를 이전처럼 돌려놓은 건 거울 속 자신의 모습과 애틋한 한 부자의 불행이다. 연규는 가끔씩 짜장면 한 그릇을 시켜 먹던 아이가 조직원들 때문에 다쳤다는 걸 알게 된 후 거울과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기 시작한다. 조직에 들어가기 전 연규는 나쁜 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사람을 때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동물을 해하면 안 된다는 것도, 함께 사는 가족(하얀)이 위험에 빠지면 도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연규는 거울에 비친 새아빠와 다르지 않은 폭력적인 자신의 모습과 위험에 빠진 엄마를 보는 순간 조직을 나가기로 결심한다. 그는 손을 자르는 한이 있어도 조직을 벗어나겠다며 치건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새아빠를 두들겨패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조차 폭력을 휘두르지 않고 집을 나선다. 치건과 연규, 두 사람은 모두 폭력적인 환경에서 자랐지만 연규는 치건과 다르게 폭력의 대물림을 끊는데 성공한다.
각자의 화란
연규와 치건이 박스에 담은 것
연규의 꿈은 돈을 모아 엄마와 함께 화란(네덜란드의 중국식 표현)으로 가는 것이다. 가난하거나 눈에 띄게 불행한 사람 없이 모두가 비슷하게 산다는 화란, 연규는 천국 같은 그곳으로 가는 꿈을 꾸며 현실을 버틴다. 조직에서 벗어난 그가 하얀과 함께 달려간 길의 끝에 뭐가 있을진 정확히 보여주지 않았지만, 연규가 야구방망이를 내려놓고 집을 나섰다는 걸 생각하면 그가 폭력과 지옥을 벗어나 화란으로 가는데 성공했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치건에게는 꿈이 없다. 치건은 자신이 보스의 손에 건져올려졌을 때, 이미 그때의 나는 죽은 것이라 말한다. 연규는 꿈을 꾸고 인간다운 연민, 양심을 가진 살아있는 사람이고 치건은 연규와 같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살아있지만 죽은 사람이다. 치건은 연규를 보며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연규의 방에서 네덜란드 사진과 돈이 든 케이스를 발견했던 치건은 차후에 나무 박스를 하나 만든다. 처음엔 연규를 위해 튼튼한 박스를 만들어주는 건가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 나무 박스는 치건의 무언가를 담은 박스였던 것 같다. 연규는 박스에 꿈을 담았고 치건은 벗어나고픈 현실(보스의 낚싯바늘)을 담았다.
치건의 화란은 물에 빠진 어린 치건이 가야 했던 이 세계 너머에 있는 천국이다. 치건은 끝까지 연규를 살리기 위해 노력한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스스로 본인의 운명을 결정한다. 치건과 연규는 각자의 화란을 향해간다.
치건과 연규는 서로를 만나며 힘든 시간을 보냈고 많은 걸 잃었지만 결론적으로 두 사람은 서로를 구원했다. 치건은 연규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민 어른이었고 연규는 치건을 깨우고 그가 삶을 정리하는 순간을 함께했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애달픈 쌍방 구원 서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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