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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경 Sep 22. 2024

난장판 속에서 피어난
한 여성의 생명력

영화 <내가 뭘 잘못했길래> 리뷰, 후기, 해석 / 페드로 알모도바르

내가 뭘 잘못했길래

(Qué he hecho yo para merecer esto?, 1984)

난장판 속에서 피어난 한 여성의 생명력

개봉일 : 2018.11.05.

관람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장르 : 코미디, 드라마

러닝타임 : 97분

감독 : 페드로 알모도바르

출연 : 카르멘 마우라, 앙헬 데 안드레스 로페스, 베로니카 포르케, 곤잘로 수아레스

개인적인 평점 : 3 / 5

쿠키 영상 : 없음


<내가 뭘 잘못했길래>는 여성과 어머니, 사랑과 인생. 붉은빛이 연상되는 소재를 이용해 매번 아름답고 강렬한 영화를 만들어내는 스페인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네 번째 장편 영화다. 이제야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절반 정도를 감상한 시점이긴 하지만 아마 이 영화가 그가 만든 가장 맥없이 웃긴 영화지 않을까 싶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는 답답한 집안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주부 글로리아의 이야기다. 그는 아들 바보이자 잔소리꾼인 시어머니 블라사, 불같은 성격을 가진 남편 안토니오, 약을 팔며 일탈을 반복하는 첫째 아들 토니와 너무 독립적인 세계를 가진 둘째 미구엘과 함께 살고 있다.

월세는 내야 하는데 택시운전사인 남편의 벌이는 시원찮고, 아이들은 말을 듣지 않고 시어머니는 중얼중얼 글로리아의 신경을 긁는다. 글로리아는 그래도 열심히 살아보겠다며 집안일과 동시에 파출부 일까지 해보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신경쇠약 직전에 이른 글로리아는 각성제를 밥 먹듯 먹으며 버티는데 법이 바뀌며 그마저도 마음대로 살 수 없게 되고, 그는 이제 될 대로 되라지-하는 마음으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영화의 주배경은 글로리아 가족이 살고 있는 아파트다. 이 아파트는 겉에서 보기엔 정갈하고 쾌적해 보인다. 내부엔 승강기도 있다. 그런데 승강기는 어른 셋에 아이 한 명만 타도 운행을 거부하고 어느 날엔 아예 이용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옆집은 동시에 문을 열면 문끼리 부딪힐 정도로 가깝고, 건너편에 위치한 높은 아파트는 시야를 빽빽하게 채워 발코니에 나가도 개방감을 느낄 수 없다. 멀리서 봤을 땐 좋아 보이지만 막상 내부를 들여다보면 문제점이 한두 개가 아니다.


글로리아의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 글로리아는 가족들과 함께 아파트에 살며 안정적인 삶을 구축한 가정주부처럼 보이지만 그의 일상엔 문제가 많다. 자주 고장 나는 아파트 승강기처럼 가족들 사이의 소통은 매번 삐걱거리다 멈추길 반복하고 다시 운행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하나를 해결했다 싶어 한숨을 내쉬면 바로 또 다른 것이 앞을 가로막는다. 주부의 삶, 정말 쉽지 않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이 녹록지 않은 주부의 삶을 섬미한 모양새로 툭 던져놓고는 주변에 독특한 인물과 사건을 배치해 맥빠지는 웃음을 유발한다. 전작이었던 <나쁜 교육>과 이전에 감상한 다른 필모그래피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라 살짝 낯을 가리긴 했지만 이 낯섦과 어지러움이 나쁘지 않다. 다소 정신없고 이게 뭐지? 싶으면서도 계속 보게 되는 이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가벼운 파동을 선물한다.

글로리아를 존중하지 않는 가족
그 안에서 잃어버린 글로리아의 여성성


안토니오는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이웃인 후아니, 바네사 모녀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 모녀가 함께 타면 승강기가 멈춰버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냥 승강기의 능력이 최대 3명 그 언저리인 것뿐인데 그는 “나 혼자 타면 늘 잘 작동해.”라는 당연한 말을 하며 승강기 고장을 모녀의 잘못이라 말한다. (반대로 후아니 모녀는 이렇게 생각할 거다. “저 남자를 만나면 일이 생긴다.”고.) 이 자신밖에 모르는 남자는 집안에서도 강압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글로리아의 의사를 무시한 채 육체적 관계를 시도하기까지 한다.


블라사는 일단 자신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손자 토니의 숙제를 도와주겠다며 낭만주의, 현실주의 예술가를 나누는 질문에 답한다. 블라사는 입센, 발자크는 낭만주의. 바이런 경, 괴테는 사실주의라고 답하고 쉬운 문제라 말하지만 사실 발자크는 사실주의 바이런 경은 낭만주의다. 그리고 당뇨가 있으니 머핀을 피하라는 글로리아의 말을 무시하고 가져온 머핀을 전부 먹어치운다.


아들 둘에게도 문제가 있다. 토니는 어른들 몰래 약을 팔고 일찍 성에 눈을 뜬 미구엘은 다른 남자와 밤을 지새우고 집으로 돌아온다. 엄마의 말을 듣지 않는 건 기본 옵션이다.


글로리아는 이 난장판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자신을 잃어간다. 안토니오가 돈보다 체면을 챙기고, 블라사가 게임을 하고 제멋대로 도마뱀을 주워오고, 아들 둘이 각자의 뜻대로 일탈을 즐기는 동안 말이다. 글로리아에게 지금 중요한 건 자신의 체면이 아닌 가정을 건사할 돈뿐이다. 그에겐 옆집 크리스탈처럼 마음에 드는 예쁜 옷을 사고, 머리를 다듬고, 집을 꾸미고 자신의 의지로 육체적 사랑을 나눌 여유가 없다.


- 아래 내용부터 스포 有


집안에 돈이 들어온 후 시작된 변화


지금까지 글로리아는 집안에 필요한 돈만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웃기게도 블라사가 주운 ‘돈’이라는 이름의 도마뱀이 집안에 들어온 후 마치 돈 문제가 해결되기라도 한 것처럼 글로리아는 돈을 벌어야 하는 가정주부가 아닌 여성 글로리아가 되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간다.


돈 벌 생각만 하며 살았을 때, 글로리아는 가게 안에 놓여있는 온갖 물건들에 눈길도 주지 않고 걸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딱 하나, 빨간 고데기가 글로리아의 발길을 붙잡았는데 글로리아는 고데기를 바로 사지 않고 지나친다. 그런데 돈(도마뱀)이 집안에 들어온 후 그는 미구엘을 치과 의사에게 입양 보내고 고데기를 산다.


그리고 남편을 죽인 후엔 사건의 증거가 될 피가 묻은 돈(도마뱀)이 창밖으로 내던져지며 문제가 해결되고 글로리아는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도마뱀 돈이 집안에 들어오고, 돈에 얽힌 문제가 해결되자 글로리아는 새로운 자유를 얻는다. 역시 돈이 최고다.

세상에서 가장 미운 위로


남편 안토니오, 시어머니 블라사, 첫째 아들 토니가 모두 떠나고 글로리아는 혼자 남는다. 그는 바네사와 함께 집을 새롭게 단장하고 자유를 즐기지만 마냥 후련한 느낌은 아니다. 텅 빈 집은 낯설고 발코니에 나가도 빽빽한 아파트가 글로리아의 시야를 꽉 채운다. 더 이상 시선을 둘 곳이 없자 글로리아는 어두운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본다.

그때 치과의사에게 보냈던 아들 미구엘이 나타난다. 글로리아는 미구엘을 반기고 꼭 껴안는다. 너무 미워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던 아들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아마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또다시 가장 미운 존재가 될지도 모르지만 지금만큼은 미구엘이 글로리아의 가장 큰 위로다.


<내가 뭘 잘못했길래>는 정말 이상한 영화다. 정말 중요한 게 돈인지 가족인지 여성성인지 모르겠고, 다른 줄기의 이야기였던 작가 루카스 부부, 경위의 이상 행동이 ‘어쨌든 이들도 고귀한 사람이 아님’을 말하는 것 외에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얘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상하게 재밌다. 모든 걸 탁 끊어내는 글로리아의 햄뼈 스윙과 악에 받친 채 도검을 휘두르던 모습이 자꾸 생각난다. 대체 누가 여성의 자아실현과 가족의 붕괴를 이렇게 표현한단 말인가. 이 영화, 정말 이상하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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