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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아시아프(ASYAAF) 2부 리뷰

: 그 사람의 세계가 깊고 넓어지길 바라며

by 이희연

250903 2025 아시아프 2부


구체적인 언어로 꼬아둔 편이 아무래도 내겐 더 읽기 용이햇다. 아마도 나의 언어도 그런 식이기 때문이겠지. 예를 들어, 중국의 소라마매아자 작가의 「끝나지 않는」의 경우, 캔버스 가운데 놓인 눈에 파묻힌 트럭을 보며 제설이 끝나지 않는 것인가 혹은 나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붙잡아두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함이 끝나지 않는 것인가를 상상하는 일이 내게 익숙하고 편하며, 보다 즐거운 언어의 방식일 것이다.


1부를 보며 나는 ‘구체의 세계를 사랑하나보다’라고 말했는데, 그에 대한 부정적 외부효과인지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담긴 그림들 위주로 눈에 들어온 것 같았다. 내 사고나 시선을 제한하게 된 것 같아 괜히 아쉬웠다. 선언은 섵불리 해서는 아니된다.


이다혜 작가의 「그립고, 그립고, 그립고」가 천진한 그림이지만, 그래서 아팠다. 떠나야만 하는 사람의 풍경. 떠날 그곳은 색채로 가득하지만, 떠나서 다다를 예정지는 모두 네모꼴의, 예상하기 쉬운 형태를 가진 곳들. 그곳은 색이 없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 1권과, 게오르그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 4장과, 악셀 호네트의 『물화』 서문과 1장에서 지속적으로 언급하는 “구체적 대상의 추상적 대상화”하는 물화 구도로 읽고 싶어지는 그림이었다. 이사, 디아스포라. 이런 것을 경험한 것이… 가만 보면 과거를 잊고 완전히 청산할는 애티튜드는 건강하지 않은 것도 같다.


이가형 작가의 「제어불능」, 「상경」 같은 그림. 내 또래, 내지는 청년 화가의 그림에서만 느낄 수 있는 배고픔과 서러움과 고독함이 상경, 기회라는 동전의 반댓면임과 동시에 양립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충격이 되살아난다. 이가형 작가도, 경험했겠지? 경험하지 않으면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의 베스트, 박소은 작가의 「첫 번째 옹호자」. 깊은 바다(내지는 심연 - Abyss)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건물, 그럼에도 살아남기 위해 서로 손 맞잡는 우리. 이 손의 대열을 시작하는 저마다의 “구원자”는 늘 있기 마련이다. 박소은 작가의 다른 그림도 재밌었는데 흥미로운 지점은 오너캐로 보이는 중심/주제 인물이었다. 이가 썩어있고, 바다는 파도가 무섭게 치고 있고. 바다에는 입을 벌려 금방이라도 침대를 집어삼킬 것 같은 고기들이 지천에 깔려있다. 천둥치는 세상은 두렵고, 그러니 나는 침대 밖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며, 좁은 곳에서 허락된 즐거움은 이가 썩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풍경은 「첫 번째 옹호자」와 연결된다. 비록 그 바다 가운데에서 침몰하였더라도,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 손 맞잡을 사람이 있기 때문이겠지. 지옥같은 오늘을 사는 우리를 그대로 표현하기보다, 만화같이 표현한게 더욱 극적이고 아프다. 그림을 구경하던 어머님들이 이 그림을 보면서 “만화네” 하면서 슥 지나치셨는데,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어머니, 청년들의 생존 투쟁기가 그려진 작품입니다. 라고 했었어야 했나.


윤소원 작가의 「I love you from my head tomatoes」에는 기가막힌 언어유희 센스가 들어 있다. 오늘 일을 가지고 시를 써야 한다면 난 이걸 고를거다. 이효민 작가의 「금호타이어 공장 화재」나, 「신안산선」… 그래. 이렇게 말해야 하는데, 보여주지 않은 채로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저 혼란과 두려움의 감정만으로도 충분한데.


오늘 리뷰를 쓸 이유.

그림을 보다가,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OOO. 내가 아는 그 사람의 정보는 서양화를 전공한다는 게 다였다. 지난 학기 같은 논문 수업 분반에서 스쳐 지나쳤다는 것과, 다른 수업에서 맨 뒤 쪽에서 같이 수업을 들었다는 것. 그림 옆에 붙은 작가의 인스타그램 QR을 연결해보니, 그 사람이 맞았다. 같은 수업. 뒷자리.


나보다 두 살 어린 그 사람은, 자기의 세계를 이미 확실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구축해 나가고 있었고, 어느 정도의 인정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진심으로, 존경스럽고 멋잇었다. 더욱 큰 자리에서 멋있게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그 세계가 더욱 깊고 넓어지기를, 성숙해지기를. 죽지 않을 정도의 고통만 허락하시고, 그 과정 중에서도 괴롭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나는 여지껏 뭘 했나, 싶기도 하다. 라는 생각은 무의미하겠지. 더 생각해 보니 내가 조금 어렸더라면 미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이 감정을 통해 나도 더 멀리 가도록 추동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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