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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헤겔, 『법철학 강요』 서문 리뷰

by 이희연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법철학 강요』 서문 리뷰


250814 작성 完


1. 레퍼런스 찾기


세계체계론을 배우는 사회변동 시간에, 선생님께서 이 이론에게 가능한 지적으로는 "동일물의 영원회귀"가 주된 레토릭으로 꼽히고, 이러한 미래 예측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가능하다고 하셨다. 더욱이, 미래에 이 이론이 맞을지 틀릴지도 모르지 않느냐는 지적이 가능하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역사의 선배들은 우리가 이런 이론들을 가지고 과거를 진단하고, 미래를 예측하거나 혜안을 가지려는 시도에는 언제나 변명거리가 존재한다는 맥락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헤겔을 인용하셨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녘에 비로소 날개짓을 한다"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이론은 절대 역사를 선행할 수 없으며,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미래예측에 실패할 수 밖에 없지만 이러한 이론을 정리함에 있어서 가지는 '질문들'은 여전히 유효하기에 우리는 이론을 배우는 것이다라고 하신 것이 기억난다.

수업시간의 적지 않은 내용은 휘발되고 없어졌지만, 이 이야기를 들었던 시간은 아직도 기억난다. 그렇기에 언젠가는 저 문장의 맥락을 이해해야지 하는 마음이 오래 있었고, 그런 이유로 『법철학 강요』를 펼쳐들었다. 안타깝게도 내 목표는 법철학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니, 미네르바의 올빼미 이야기가 나오는 서문을 재삼 읽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2. 오독하기


여전히 핵심을 관통하지 못했으리라. 『법철학 강요』에서 다루는 '법'과 '국가'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개념과 다르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겠고,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손에 담긴 것만 취하려고 한다.

생각 이상으로 헤겔의 문장은 아름다웠다. 대륙철학에서 '헤겔' 그의 이름을 빼 놓을 수 없었던 것에는 학자들 미감에 부합했기 때문이었을지도.

사항의 개념은 우리들에게 천성적으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인간에게든 손가락이 있고, 붓과 그림물감을 가질 수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아직 화가는 아닌 것처럼, 사유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법의 사상은 결코 누구라도 처음부터 손에 갖고 있는 그러한 것은 아니다. 올바른 사유는 사항을 알며 인식하는 것으로서, 그러기에 우리들의 인식은 학문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13-14쪽


붓과 그림물감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직 화가가 아니다. 더욱이, 알기 위해서 부단히 학문적인 태도로 임해야 한다.


3. 앎을 다듬으면 이론


여기에서부터 출발하자. "우리들의 인식은 학문적이어야 하는 것이다(14쪽)". 앎, 현실, 이성. 반지성주의, 모럴. 서문 전체에서 '천박함'이 수 차례 언급되는데, 내가 생각하는 '천박함'과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겠으나, 편의상 같다고 전제한다. 동시대의 맥락에서, 느린 것 보다는 빠르고 직접적이며, 도파민이라는 이름으로 감정이 우선하고, 합리와 이성을 배격하는 오늘.


그 위에 또 현재의 세계에는 하나의 절박한 필요성이 있다. 왜냐하면 옛날엔 아직도 기존의 법률에 대한 존경과 외경(畏敬)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의 형성과 교양이 방향전환을 하여, 사상이 일체의 당위성을 가져야 할 것의 정점에서 위치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온갖 이론이 현실로 존재하는 것에 자신을 대치(對置)하고, 즉자이며 대자적으로 바르고 필연적인 것으로서 나타나고 싶어한다.
13쪽

천박성이라는 것의 주된 생각은 학문을 사상과 개념의 전개 위에 세우는 대신 오히려 직접적인 각지(覺知)와 우연적인 힌트 위에 세우고자 하는 일이다.
[...]
그와 같은 생각에 의하면, 윤리적 세계는 에피쿠로스에 의해 세계가 대체로 그러했듯이 의견과 자의(恣意)의 주관적 우연성에 맡겨지는 반드시 그러한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러나 그렇다는 것이 되리라. 이 간단한 자가제(自家製)의 만병통치약은 이성과 그 오성의, 더구나 수천 년의 노작(勞作)인 바의 것을 「감정」 위에 세우겠다는 셈이므로, 사유하는 개념에 의해 인도된 이성적 통찰과 인식의 노고는 물론 모두 생략되어 있다.
15쪽


피에르 부르디외는, 제자 바캉과의 대담에서, 이론은 반드시 추상성을 지양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나는 사회학이 고도로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수준에 머무른다면 사회학의 진보에 아무런 기여도 할 수 없다고 믿는다. 실제 삶의 핵심에까지 내려갈 때, 그것은 사람들이 거의 임상적인 목적으로 스스로에게 적용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 피에르 부르디외, 로익 바캉, 『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 324쪽


그런데 헤겔 역시 정확하게 같은 맥락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절대 추상성에 머무르지 말 것. 현실에 뿌리박을 것을 거듭 강조한다.


앎은 자연 속에 현실로 있는 이 「현실적인」 이성을 포착하지 않으면 안된다.
11쪽

바로 이 「현실에 대한 철학의 입장」이야말로 온갖 오해가 발생하는 곳이다. 그래서 나는 앞에서 말한 것으로 되돌아간다. 즉, 철학은 「이성적인 것의 근본을 규명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현재적」이며 「현실적인」 것을 「파악하는」 것으로서, 「피안적인」 것을 수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 피안적인 것이 대체 어디에 있는가는 신만이 알고 있다--아니면 실은, 세상 사람은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말할 수가 있다. 즉, 일면적으로 공허한 이유붙임만을 하는 사유의 오류 속에 있는 것이다.
20쪽

이성적인 것이야말로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이야말로 이성적이다.

얽매이지 않는 의식은 어느 것이나 철학이 그러하듯이 이 확신에 서 있는 것으로서, 철학은 「자연적」 우주의 고찰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우주의 고찰에 있어서도 이 확신으로부터 출발한다.
만일 반성이라든가 감정이 혹은 주관적 의식이 갖는 어떠한 형태라도 「현재」를 「공허」한 것으로 간주하고 현재를 넘어 좀더 잘 알고 있는 척한다면, 그것은 자기가 공허한 것 속에 있는 셈이다. 또한 그것은 현실을 단지 현재 속에서밖에 갖지 않는 것이므로 그것 스스로가 다만 공허성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21쪽


현재를 공허한 것으로 간주하고, 잘 알고 있는 척한다면, 그것은 공허한 것 속에 잇는 셈이다. 이 얼마나 아프고 벼린 말인가.


4. 영원해서 헛된 것들.


"자, 이번에는 금지어 미션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는 단어는 시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세계, 미래, 사랑, 기계, 영원, 천사, 바다, 숲, 여름, 겨울, 비, 눈, 유령, 죽음!”

- 고선경, 「스트릿 문학 파이터」 中, 『샤워젤과 소다수』


영원한 헛것. 그러기에 전혀 영원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우리네를 배회하고 있다. 현실과 상관 없는 것들을 헤프게 먹고 있는 내일. 영원하고 헤프고 헛된 것들은 당연히 잡히지 않을 것이고, 너무 현실적이어서 물성 띄는 것들은 우리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헛된 영원으로 가득한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곳이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23쪽


헤겔은 이것을 바꾸면 "여기에 장미가 있다. 여기서 춤을 추라."라고 했다. 이 말을 조금 더 요즘 말로 바꾸어 보자.


"그래서 난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춤을 추는 거야"라고 양 사나이는 말했다. "음악이 울리는 동안은 어쨌든 계속 춤을 추는 거야. 내가 하는 말 알아듣겠어? 춤을 추는 거야. 계속 춤을 추는 거야. 왜 춤추느냐 하는 건 생각해선 안돼. 의미 같은건 생각해선 안 돼. 의미 같은건 애당초 없는 거야. 그런 걸 생각하기 시작하면 발이 멈춰 버려.

- 무라카미 하루키, 『댄스 댄스 댄스』 상권, 180쪽


왜 춤을 추어야 하느냐, 오늘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치열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철학이 그 현재의 세계를 뛰어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개인이 그 시대를 뛰어넘고 로도스섬을 뛰어넘어 밖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망상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어리석음이다. 그 개인의 이론이 실제로 그 시대를 뛰어넘는다고 하면, 그리하여 그가 하나의 「있어야 할 세계」를 설비한다고 하면, 이 있어야 할 세계는 과연 존재하고는 있지만 단지 그가 생각하는 것 속에 존재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23쪽


그러나 아무리 치열한다고 한들, 역사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초월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동시에 최선을 다해 '의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5. '아싸리' 차갑거나, 혹은 아주 뜨겁게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으며, 그러므로 뱉어내는 듯한것인 진리에 차츰 가까워지는 철학 등을 갖고서는 이성은 만족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 또 이 현세에선 확실히 만사가 지독하든가 고작 중간쯤의 상태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곳에서는 어차피 좀더 낫다고 생각되는 것은 얻어지지 않게 마련이고, 그러므로 다만 현실과의 평화가 유지되기만 하면 좋다는 듯한 차가운 전망으로써도 이성은 만족 하지 않는다. 인식이 얻게 해주는 것은 좀더 뜨거운 현실과의 평화이다.
25쪽


도달한 결론은 이것이다. 니힐 해서는 아니 될 것. 최인훈의 극 초기작 『그레이 구락부 전말기』의 주인공 '현'은 지나치게 조숙한 고로 인하여 허무주의로 일관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현은 끝내 책을 버리고 말았다. 책을 아무리 봐도 책에서 얻고 싶었던 것은 얻어지지 않았다. 책이 쓸모없음을 안 것이 아마 책의 쓸모의 모두였다. 우스개 같지만 정말이었다. [...] 누리가 유리 실로 만든 실공이기나 하듯, 처음과 끝이 돌고돌아 비끄러매진 마지막 매듭까지 보아버렸노라고 현은 생각했다. 한마디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그 모른다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다는 것, 두 겹으로 싸인 덫에 치어 발버둥치는 꼴, 그것이 자기였다.

- 최인훈,「그레이 구락부 전말기」 中


그러나, 그와 그의 '구락부'와 여자 한 명 사이에서 일어난 일로 인해, "그저 사람인 것을 느끼"게 된다. 여기에서부터 치열한 현실인식이 시작된다. 충분히 어리지만 지금보다 더 치기 어렸던 시기에는 모든 것을 깨달아 세상이 지루해 염세하는 사람이 멋있게 느껴졌다면, 이제 그런 사람은 너무나도 현실감각이 없다고 느껴진다.


"무얼 던졌나?"
그가 이상한 억양으로 내게 물었다. 나는 약간 쓸쓸하였다. 그러나 애써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감상과 허영을요. 익기도 전에 병든 내 지식을요."

- 이문열, 「그해 겨울」, 239쪽


차라리 이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리고 헤겔은 실패해도 괜찮을 근거를 충분히 제시해 주었기에 감사를 표하고 싶다.


세계가 어떻게 있어야만 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에 한마디 더 덧붙인다면, 그러기 위해서는 철학은 애당초 언제나 너무 늦게 도착하는 것이다. 철학은 세계의 「사상」인 이상 현실이 그 형성과정을 완료하여 자기를 완성시킨 뒤에야 비로소 철학의 시간 속에 나타난다.
[...]
철학이 그 이론의 잿빛에 잿빛을 겹쳐 그릴 때 삶은 이미 늙어버린 모습이 되어 있을 뿐이며, 잿빛에 잿빛으로써는 그 삶의 모습은 젊어지거나 하지는 않고 다만 인식될 뿐이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찾아와야 비로소 날기 시작 한다.
25쪽


부르디외는 이론에 능한 학자들이 "공식적으로 인가받은 예언자" 역할을 하는 것을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안다고 앉아서 삼라만상을 논하는 거만한 치들.


사람들은 사회학자에게 사회적 존재의 모든 문제에 일관되고 체계적인 대답을 제공할 수 있는 예언자의 역할을 부여한다. 이러한 기능은 불균형하며 유지될 수도 없다. 그것을 아무에게나 부여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각주 - 부르디외는 “공식적으로 인가받은 예언자”의 망토를 두른 사회과학자들을 경멸한다.)

- 피에르 부르디외, 로익 바캉, 『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 305쪽


그건 아마도 이런 모양이겠지.


나는 유키의 부친이 쓴 소설을 예전에 몇 권인가 읽은 적이 있다. 젊은 시절에 쓴 두 권의 장편과 한 권의 단편집은 나쁘지 않았다. 문장도 시점도 신선했다. 그래서 책은 웬만큼 베스트셀러가 됐고 그도 문단의 총아 같은 존재가 됐다. 텔레비전이니 잡지니 하는 여러 곳에 얼굴을 내밀고 사회의 온갖 것들에 관해 의견을 말했다.

- 무라키미 하루키, 『댄스 댄스 댄스』 상권, 236쪽


그렇기에 아마 헤겔도 "공식적으로 인가받은 예언자"이 망토를 두른 이들이 "여러 곳에 얼굴을 내밀고 사회의 온갖 것들에 관해 의견"을 말하는 것을 마땅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그렇기에 내게 가능한 것은 다만 현실을 재바르게 좇는 일일 것이다. 그 다음 해야 할 일은 황혼이 지나 어둠이 내리깔린 밤에도 길을 잃지 않게 눈을 바로 뜨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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