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813 작성 完
『변화하는 행성 지구를 위한 문학』
환경 담론, 문학. 문지 채석장 시리즈. 안 살 수 없죠?
『명상하고 달리고 쓰기』
작년 가을학기 비평 시간에 '제목의 중요성'을 이야기 할 때 이우성 시인이 언급되었던 걸로 처음 그를 알게 되었다. 하긴, 신춘문예 등단작 제목이 굉장히 인상적이긴 했다. 가만 보면 이우성 시인, 내가 닮고 싶은 것들을 정말 많이 가진 사람이었다. 시인인데, 잘생겼다. 잡지 에디터를 할 정도로 미감도 있다. 내가 가지고 싶은 타이틀을 모두 갖춘 것만 같았다. 박소란 시인 이야기를 읽기 위해 『나는 매번 시 쓰기가 재미있다』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이 책에 실린 이우성 시인의 이야기를 보고, 그가 밉지만 결국 나는 그를 동경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최근 루티널한 삶과, 고독/자극 없는 순간 감당하기, 운동, 유연한 몸과 마음이라는 키워드에 관심이 생겼고, 고민의 화두가 되었다. 그런 차원에서 방법론으로서의 요가와 명상에 관심을 가져봐야겠다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고독을 감당하는 것과 정서를 배워내는 일이었다. 삶을 지속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시키는 것과 다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혼자 해내는 싸움을 감당해 내는 방법을 온 몸으로 터득하고 싶었다.
마르크스의 『자본』과 발리바르를 읽으며, 비판적 수용이 중요함을 아프게 배우고 있는 지금, 살아남기 위해서와 스스로가 지속할 수 있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모색하려 한다.
이런 생각을 하던 중, 질투하는 인물의 명상과 달리기에 대한 책이 나왔다...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지혜를 구하자 문제를 주셨습니다』
장원영 때문에 『초역 부처의 말』이 그렇게 많이 팔렸다고 한다. 초역이 뭘까. 초월번역이라고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초역 니체를 썼다고 한다. 책의 컨셉은 외경을 포함한 복음서에서 예수가 한 말을 마치 선문답의 형식으로 만들어놓은 것 같다. 가장 중요하게 보고 싶은 것은, 무엇에 중점을 두어 번역했는지 살펴보고 싶다.
근래에 이런 밈을 본 것도 같다. 서울국제도서전을 간 10명,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을 간 10명, 서울국제불교박람회를 간 10명을 한 자리에 모아두면 12명이 된다는 말. 나는 이 말을 참 좋아한다. 지금 힙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여기에 다 있겠지. 여기에 딸려오는 명상과 요가, 그리고 번화가 뒷골목에 있는 예쁜 카페에서 피우는 인센스는 같은 맥락일까. 나도 이런 것들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긴 어려워 보인다. 물론 이런 hype이 불교 신자의 유입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기사를 봤다. 68의 맥락이 우리와 완전히 같지는 않은 모양인가보다. 아무튼, 이런 책의 예나, 교계 내 젊은 목사들의 몇몇 시도가 교회의 문턱을 낮추거나 이미지 개선을 할 수 있을까? 브뤼노 라투르가 근대성이 무너지고 나서 기후정치시대에 새로운 Incarnation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교회들에게 열렸다고 했는데, 과연 그게 가능할까?
서문만 읽었는데, 인상적인 지점이 하나 있었다. "예수"를 인간으로 이해해보려는 시도가 내게 전무했다는 것과 함께, "청넌 예수"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 다른 성인들은 장년의 나이였는데, 청년 예수는 젊고 혈기가 넘쳤고, 불온했으며, 혁명가였고, 뜨거웠다. 그런 사실을 전혀 감각하지 못했다. 그럴만도 하다. 그도 감당하기 어려운 큰 일 앞에서 두려워하는 청년으로 생각해 볼 수 있었는데.
여기에서 더 나아가, 그의 제자들도 "청년"들이었음을, 아니 내 또래였음을 새로이 감각한다. 두려움에 떨었을 20대 중반의 제자들. 곧 나다.
우리 또래에게, 우리보다 조금 더 나이 많은 청년 예수가 한 말이 2천 년을 살아남았다. "동년배"라는 사실에 집중하여 초역 예수를 읽어야겠다.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