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roll down happiness lane
※ 힘들어하는 로스쿨 후배에게 개인적으로 써줬던 글인데, 이제 공개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하 본문.
서울대 철학과에 다니는 군대 후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은 이 친구가 20세기의 위대한 철학자인 칼 구스타프 헴펠의 책을 읽고 와서는 제게 모종의 정신병적 증세를 호소한 적이 있습니다: “조상병님, 까마귀 역설을 읽고 나서 하루 종일 머릿속에 까마귀들이 날아다닙니다.” 독자님과 행복에 관해 짧은 몇 마디를 나누고 난 뒤 제 머릿속에는 한동한 행복이 날아다녔다(?)고 하여도 지나친 과장이 아닐 것 같습니다. 사실 평소에 행복에 관해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었거든요. 그러게, 행복이 뭐지? 그리고 꼬리를 무는 질문들 -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행복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도 될까?
이 글은 머릿속을 헤집으며 날아다니던 생각들을 붙잡아 단정하게 오와 열을 맞춰 보려 고 썼습니다. 마키아벨리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목욕을 하고 비단옷을 입었다고 하더군요. 저는 정장을 갖추어 입고 이 글을 썼습니다. 근무시간에 심심하면 틈틈이 썼거든요(월급을 횡령한 행위와의 상상적 경합이 되겠네요). 이처럼 깊은 고민 없이 가볍게 썼으므로 특별한 주장이나 짜임새는 없습니다. 일부러 참고한 문헌도 없습니다. 일부 인용한 내용은 손 닿는 곳에 있는 책에서, 구글에서, 혹은 그냥 머릿속에서 끄집어낸 것입니다(그래서 부정확합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도 없고... 사실 이 필자의 글이 대체로 그렇듯 딱히 읽을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니 오솔길이나 동네 골목길을 따라 걷듯 가볍게 읽고, 또 가볍게 잊어 주시길 바랍니다. 에라스뮈스가 우신(愚神)의 입을 빌어 말했듯,
이렇게 엄청난 언어의 잡동사니를 늘어놓았으니 여태까지 한 말을 나 스스로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거니와, 내가 이를 기억하고 있으리라 기대한다면 이는 말도 안 되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옛말에 '같이 마시고 다 기억하는 놈 을 증오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를 새롭게 고쳐, '다 기억하는 청중을 나는 증오한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 안녕히! 박수치라! 행복하라! 부으라! 마시라! 나 우신의 교리에 탁월한 여러분이여.
사실 행복이 무엇인지에 관해 두 페이지에 걸쳐 장황한 분석과 논증을 쓰다가 다 지워 버렸습니다. 첫째로는 행복 개념을 정의하는 일이 너무나 어려웠기 때문이죠. 제 논리에 스스로 걸려 넘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편 개념 정의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포터 스튜어트 연방대법관은 '음란(obscenity)' 개념을 이렇게 정의해서 역사에 이름을 남겼죠: "I know it when I see it." 행복에 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이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언어적으로 명료하게 표현하기가 쉽지 않을 뿐이지요.
다만, 이왕 얘기가 나왔으니 간략하게나마 짚고 넘어가 봅시다. 행복은 순간의 감정적 반응을 의미할까요, 아니면 보다 연속적이고 장기간에 걸친 정서적 상태를 가리킬까요? 저의 대답은 간단한데, 둘 다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소고기를 먹을 때처럼 어떤 욕구를 충족하는 행위를 할 때 느끼는 만족감은 순간적인 행복입니다. 이를 가리켜 '공리주의적 행복(utilitarian happiness)'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한편 우리는 어떤 시절을 돌이키 며 '그 때는 행복했지'라고 회상하기도 합니다. 저의 경우 올해 2월 교토 여행을 갔을 때가 참 행복했어요. 그런데 이것이 교토에 머무르던 72시간 내내 욕구가 만족된 상태 에 있었다는 의미는 아니지요. 이 때의 행복감은 순간의 욕구 충족 여부와 큰 관계 없이 장기간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정서적 상태에 가깝습니다. 통상 우리는 두 경우 모두 '행복'이라고 부르지요. 행복은 이처럼 단순하게 정의될 수 있는 개념도 아니고, 행복에 이르는 유일하고 확실한 길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 개념을 분석하려는 시도 - 행복 개념의 필요충분조건의 집합을 진술하려는 시도 - 는, 이쯤에서 그만두겠습니다. 어차피 별로 중요한 문제도 아니잖아요. 그보다 독자님에 게 더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일 테니까요.
타인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정말 좋아하지 않지만, 이번 한 번은 결례를 무릅쓰고 독자님에 대해 몇 가지 단언을 해보겠습니다. 일단 독자님은 지금 행복하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독자님은 행복해지고 싶죠. 행복이 단절적이냐 아니면 연속적이냐 하는 화두도, 결국에는 어떻게 해야 행복을 찾을 수 있는지 고민하는 와중에 생각나신 거죠? 소고기 먹는 횟수를 늘려야 할지, 아니면 여행... 은 못 가니까, 예컨대 책을 읽거나 해서 정서적인 상태를 다스려야 할지, 뭐 그런 고민 했죠?
기든 아니든, 일단 멋대로 넘겨짚어서 미안합니다. 그래도 앞으로 제가 할 얘기를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봐 주세요.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지 이야기하기에 앞서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한 번 고찰해 봅시다. 행복은 삶의 목적일까요? 제 대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행복은 분명 바람직한 정서적 상태이고, 살아가면서 최대한 추구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것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즉, 행복은 삶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유일한 목적은 아닙니다. 우리는 살면서 행복 말고도 여러 가지 다른 목적들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감정이나 욕구, 정서적 상태와는 별 상관이 없는 것들, 예컨대 직업적·학업적 성취라든지 혹은 다른 사람을 돕거나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도 정열을 쏟습니다. 그러한 추구의 결과 내지는 부산물로 행복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이때에도 행복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요.
행복보다 더 크고 의미있는 목적을 추구하라거나, 훗날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지금의 행복을 희생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속편한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입니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얘기가 저런 속편한 얘기들입니다. 남의 일 이라고 쉽게 말하는 저런 사람들하고는 어울리기도 싫어요. 독자님은 제가 불과 얼마 전 에 밟아온 길을 그대로 뒤따라오고 계시기 때문에 그 과정을 견디는 게 얼마나 뭣같은 일인지 저는 조금이나마 이해합니다. 변호사 자격증 따위로 그 젊음과 인고의 세월을 보상받는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닥 낭만적이지도 않은 미래를 위해 청춘을 독서실의 퀴퀴한 공기와 맞바꾸는 일은 지금 생각해도 좀 별로입니다. 내일이 아무리 중헌들 그보다 더 중요해서 도저히 내일에 내줄 수 없는 오늘만의 것들, 예컨대 오늘의 포근한 햇살이나 비 온 뒤의 짙은 풀내음 같은 것들이나 가슴을 뛰게 하는 책 속의 문장들이 분명 있을 텐데요. 어차피, 케인즈의 말마따나, 장기적으로 우리는 다 죽어요(in the long run, we're all dead). 그래서 저는, 꽉 찬 진심으로, 지금 그리고 여기(hic et nunc) 의 독자님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다만 행복에 지나치게 높은 가중치를 부여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를 행복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겁니다. 행복은 다만 삶의 여러 가치나 목적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행복이 우리 삶에서 약간 특별한 지위를 갖는 것 같기는 하지만, 행복도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행복에 강박적으로 매달릴 필요도 없고, 결코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불행의 주된 원인 가운데 하나는 가질 수 없는 것에 집착하거나 바꿀 수 없는 결과에 연연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도무지 행복을 누리기 어려운 여건에서 자꾸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면 외려 더 불행해지기만 하는 역설이 발생합니다. 이 이야기는 뒤에 가서, '어떻게 행복해질 것인가' 하는 물음에 답하면서 좀 더 하도록 하죠.
앞서 삶에는 여러 목적과 가치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행복이 유일한 목적은 아니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반론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결국 그 다양한 목적과 가치들은 궁극적으로는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 이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결국 인생의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목적은 행복한 삶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몽테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Our great and glorious masterpiece is to live appropriately."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사는 것(living)에 관한 한 몽테뉴는 제 최고의 스승입니다. 삶이 못살게 굴 때 저는 항상 몽테뉴로 도피합니다. 거기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발견하고, 따스한 위안을 얻고, 무엇보다 나 스스로를 발견합니다. 16세기의 프랑스인이 쓴 문장 사이사이에서 나를 발견하는 일은 굉장히 짜릿한 경험이죠. 몽테뉴를 마주하면, 슈테판 츠바이크가 썼듯, "400년의 세월이 연기처럼 사라집니다." 시종일관 겸손하고 솔직한 몽테뉴도 사는 일에 관해서만큼은 이렇게 자신있게 선언합니다: "my art and profession is to live." 이런 분께서, 삶의 목적이 "to live happily"가 아닌 "to live appropriately"라고 했다면, 즉 단순히 행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올바르게 살아 야 한다고 가르쳤다면,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올바르게 산다는 것은 도대체 뭘 뜻할까요. 도덕적으로 살라는 꼰대질은 당연히 아닙니다. 몽테뉴는 르네상스인답게 헬레니즘의 사상들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 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자와 문인들이 《에세》 구석구석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죠. 고대 그리스인들은 삶의 궁극적인 목적에 관하여 꽤나 일관된 견해를 공유했습 니다. 그들은 '에우다이모니아(εὐδαιμονία)'가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했죠. 에우다이모니 아는 종종 '행복'으로 번역되곤 합니다. 하지만 에우다이모니아에는 오늘날의 '행복' 개념, 특히 공리주의적 행복 개념에 전혀 포섭되지 않는 의미들도 있습니다. 예컨대 도덕적 고결함이나 탁월한 성품과 인격의 성취 같은 것들이죠. 그러므로 에우다이모니아에 대한 올바른 번역어는 '행복'이 아니라 '좋은 삶(the good life)'입니다.
좋은 삶의 이상은 단순히 '옳은 행위'에 대해서만 말하는 근대 이후의 윤리학과도 다르고, 신을 위해서 살라거나 국가나 민족이나 당(party)이나 심지어는 이웃을 위해서 살라는 종교 혹은 이데올로기와도 다릅니다. '행복', 성공, 명예, 돈, 커리어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싸구려 자기계발과 self-help가 범람하는 시대의 인생관과도 전혀 다릅니다. 이런 것들은 자꾸만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위해 살라고 합니다. 삶을 외부적 잣대에 비추어서 조직하고 평가하라고 압박하죠. 그러나 에우다이모니아는 휴머니즘의 정수입니다. 삶의 목적이자 평가 기준은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사는 것, 내면의 자아를 가능한 최선의 모습으로 빚어나가는 것, 충만한 인간성의 발현(manifestation of humanity)입 니다. 몽테뉴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이런 '삶의 윤리'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그 또한, 자기를 발견하고 가장 자기답게 사는 삶을 가장 훌륭한 삶이라고 보았으니까 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경험은 자기가 저 자신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몽테뉴처럼, 제가 생각하는 좋은 삶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삶, 자기답게 사는 삶, 어떤 환경에서도 자기 자신을 지켜내는 삶입니다. 행복은 그 길을 따라 피어난 코스모스나 맑은 개울물 같은 거죠. 내면에 중심을 세운 사람은 행복 그 자체를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지 않지만 오히려 행복만을 위해 내달리는 사람보다 더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자기를 이해하는 사람은 또한 인간을 이해하기 때문에 행복으로 향하는 길을 더 쉽게 찾을 수 있거든요. 몽테뉴도 이렇게 말했죠: "the most certain sign of wisdom is cheerfulness." (아, 몽테뉴에 대해서는 정말 밤새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치만, 그런 삶의 방식은 행복하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몽테뉴적인 삶의 진짜 위대함은 행복하지 않아도 자기를 지켜낼 수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몽테뉴는 암흑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르네상스가 유럽에 꽃피운 인본주의와 자유로운 정신은 그가 태어날 즈음에 이미 빛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종교개혁과 뒤따른 종교전쟁으로 온 유럽이 둘로 나뉘었습니다. 몽테뉴의 조국 프랑스도 갈가리 찢어졌습니다. 가톨릭교도들이 신교도(위그노)들을 학살하고, 신교도들이 반격하면서 내전이 일어나고, 평화 협정이 맺어지고, 이번에는 위그노들이 가톨릭교도들을 학살하면서 이 모든 과정이 반복 되는 일이 수십 년에 걸쳐 몇 번이고 되풀이되었습니다. 편가르기와 종교적 맹신과 집단 광기의 시대 한가운데에서 몽테뉴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살았습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몽테뉴의 전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시대로 인해 자신의 인간성을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의 모든 문제는 단 한 가지로 집중된다. 곧 ‘어떻게 하면 나는 자유롭게 남아 있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말할 때나 행동할 때에 나의 가장 깊은 내면의 자아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더 나아가지 않도록 어떻게 나 자신을 지킬 수가 있는가?... 나의 자아가 어떻게 하면, 외부에서 정해주는 척도를 따르는 태도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우리가 예술가인 그를 사랑하고 무엇보다 존경한다면, 그 까닭은 그가 다른 누구보다도 삶의 최고 기술을 위해 자신을 바쳤기 때문이다. ‘자신을 지킨다는 가장 높은 기술(le plus grand art rester soi-même)’에 말이다.
그 기술이란 내면을 꾸밈없이 들여다봄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발견하고 솔직하게 껴안는 것이었습니다. 몽테뉴는 틀이나 체계를 싫어했습니다. 그는 여러 고대 철학자들 중에서도 특별한 이론 체계를 세우지 않고 내키는 대로 말하고 다녔던 소크라테스를 가장 좋아했습니다. 그는 비일관성에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에세》에서 스스로를 묘사할 때도, 앞에서는 이렇다고 했다가 뒤에서는 저렇다고 하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는 세상이 변화무쌍한 것처럼 세상의 일부인 자아 또한 고정되고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과정 자체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관찰하는 순간순간마다의 자기의 모습을 가감없이 기록했습니다. 자기의 가장 내밀한 단점까지도 하나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기억력이 얼마나 한심할 정도로 나쁜지, 늘 우울하고 굼뜨고 졸리고 게으른 천성 탓에 학교생활이 얼마나 괴로웠는지, 손재주가 얼마나 형편없는지 (자기가 쓴 글씨를 자기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고 하네요) 그는 소상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심지어는 키가 너무 작아서 볼품이 없다(!)는 사실까지요. 나는 이 때는 이렇고, 저 때는 저렇다. 나는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나다. 숨길 필요도, 정당화할 이유도 없다. 이것이 몽테뉴의 자아관이자 인생관이었습니다.
세상은 영원한 움직임일 뿐이다. 대지, 코카서스 산맥의 바위, 이집트의 피라미드 등 모든 것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함께 움직이는 동시에 각기 움직인다. 불변성이라는 것도 실은 비교적 느릿느릿한 움직임일 뿐이다... 나는 머물러 있는 상태를 묘사하지 않고, 변화하는 과정을 그린다.
누구든지 몽테뉴처럼 자기의 내면을 세심히 들여다보면 모순덩어리인 자아를 발견하게 됩니다. 몽테뉴를 처음 발견할 무렵의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2013년이었답니다). 당시 이등병이었던 저는 부대 안의 나와 휴가 나갔을 때의 내가 너무 달라 당황했습니다. 한편 이 친구와 있을 때는 이 친구의 말투를 닮아가고, 저 친구와 가까이 지내면 저 친구의 말투를 닮아가는 제 모습을 발견하고 절망감 비슷한 것에 사로잡히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내 말투’는 그럼 뭐지? 나는 그냥 앵무새인가?) 얼마 전에는 그 당시에 쓴 일기들을 읽어보다가 2014년까지만 해도 제가 꽤나 강단 있는 보수주의자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도 마음 한켠에는 – 보다 지금의 모습에 가까운 - 인간에 대한 연민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도요.
몽테뉴는 이런 발견에 당황할 필요가 없다는 위대한 진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모순이 나의 존재의 양식이라는 자각, 삶은 틀에 가둬 길들일 수 없다는 깨달음은 유쾌하고도 해방하는 경험입니다. 세상이 부과하는 규격에 나를 맞출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좌절할 이유도 없습니다. 다만 온전히 나로서 사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것은 또한 가장 인간답게 사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 경험은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도 변화시킵니다. 삶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입니다. 바로 그 다채로움이 삶을 흥미롭게 만들기도 합니다. 또한 삶은 어떤 고정된 상태라는 목표 – 이를테면 행복? - 에 이르기 위해 달리는 것이 아니 라 그 과정 자체, 지금 그리고 여기(hic et nunc)를 순수하고 밀도 있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힘닿는 데까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행복만큼이나 슬픔, 분노, 권태, 우울, 고통도 각자의 빛깔을 가진 삶의 일부입니다. 심지어는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몽테뉴는 한때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받아 ‘잘 죽는 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는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몽테뉴는 죽음조차도 삶의 자연스러운 연결선상에 놓인 하나의 경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어떻게 죽어야 할지 모르더라도 걱정하지 마라. 그때가 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자연이 소상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일러줄 것이다. 자연이 그 일을 완벽하게 처리할 테니 그 문제로 고민하지 마라."
우리가 죽음을 피하기 위해, 혹은 ‘잘 죽기 위해’ 고뇌하고 발버둥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반드시 행복해야만 한다는 강박으로 스스로를 짓누를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상에 단 두 가지 진리가 있다면, 첫째는 우리가 모두 죽는다는 것이고, 둘째는 인생이 항상 행복할 수만은 없다는 것입니다. 행복한 순간들이 있듯 우울하고 슬프고 권태로운 국면들이 반드시 있을 겁니다. 행복은 오로지 개인의 의지에 달린 문제이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는 식의 가르침은 끔찍한 거짓말입니다. 네가 행복하지 못한 것은 오로지 네 마음의 문제이고, 너도 마음을 ‘긍정적’으로, ‘매사에 감사하는 태도’로 고쳐먹기만 하면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어. 이런 말은 불행의 모든 책임을 오롯이 개인에게 돌리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합니다. 독자님도 경험하셨듯, ‘행복하 길’이라는 말을 주문처럼 왼다고 행복해질 수는 없습니다. (그게 된다면 세상에 불행한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고, 변호사들은 전부 실업수당을 신청하고 있을 겁니다.) 삶에는 노력으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불행들도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런 상황에 서 자꾸만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면 오히려 더 불행해집니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집착은 불행의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이니까요.
몽테뉴는 이 점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중요한 것은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대신 삶의 일부인 이 어둠을 그대로 직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의외의 이점도 숨겨져 있습니다. 자기 내면의 어떤 모습들은 오로지 어둠 가운데 있을 때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밝은 곳에 있을 때만큼이나 어둠 속에 있을 때도 우리는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배울 수 있습니다. 한 발짝 더 나아가, 세상에는 행복한 사람이라면 결코 해낼 수 없는 위대한 성취들도 있습니다. 윈스턴 처칠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우울증에 평생 시달렸습니다. 어찌나 끈질기게 주변을 맴돌았는지 그는 자기의 우울증에 ‘검은 개 (black dog)’라는 애칭까지 붙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영국의 정신분석학자인 앤서니 스토는, 절멸을 목전에 둔 순간 처칠로 하여금 믿을 수 없는 용기를 발휘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그 검은 개였다고 말합니다. 《처칠의 검은 개, 카프카의 쥐》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1940년에 영국이 온갖 역경에 처했을 때, 냉철한 판단력을 가진 지도자들이 ‘우리는 끝났다’고 결론지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40년에는 어떤 정치 지도자라도 마음속은 절망으로 가득 차 있지만 용기 있는 말로써 영국을 결집시키고 자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기 안의 절망을 알고 직시하는 사람만이 그런 순간에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 속수무책인 상황에서 한 가닥 희망을 본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만이, 적에 둘러싸여 포위되었을 때 용기가 이성을 넘어서서 공격심이 가장 맹렬히 불타는 사람만이 1940년의 위태로운 여름에 저항의 언어에 감정적 현실성을 부여해 우리를 결집시키고 지탱시킬 수 있었다. 처칠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처칠이 다른 사람들에게 절망은 극복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평생 절망과 싸움을 벌여온 까닭이다... 이 약점이 없었다면 처칠은 좀더 행복하고, 좀더 평범하고, 좀더 안정되고, 좀더 부족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정되고 침착한 사람이었다면, 처칠은 영국 국민을 고무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한 개인의 나락과 같은 우울과 절망, 그 끝을 모르는 어둠이 외려 전 세계를 어둠으로부터 구해냈다는 사실은 기묘하고도 위대한 삶의 모순입니다. 모순덩어리인 자아를 그대로 끌어안았듯, 몽테뉴는 이처럼 아리송한 삶을 하나의 총체로 받아들일 줄 알았습니다. 이러한 태도가 그를 보다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행복하지 않을 때 에도 자기 자신을 온전히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었음은 분명합니다. 흑사병이 그의 영지를 덮쳤을 때, 그는 평민들이 역병에 죽어나가는 끔찍한 광경을 목도합니다.
그들은 대부분 자신이 묻힐 자리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들은 들판에 널려 있는 시체로 짐승들이 몰려드는 걸 보면서 괴로워했다... 어떤 사람은 아직 건강한데도 자기가 묻힐 무덤을 파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아직 살아 있는데도 무덤 속에 누워 있었다. 내 일꾼 중 한 명은 죽어가면서 손과 발로 흙을 긁어모아 자기 몸을 덮고 있었다. 좀 더 평온하게 잠들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라도 몸을 덮으려는 것 같았다.
몽테뉴는 이 어둠을 똑바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직이 고백합니다.
나는 병에 걸리고 싶지 않다. 그러나 병이 나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싶다... 아프다는 걸 느끼고 싶다.
묵직한 주제를 다뤘으니, 이제 보다 소박하지만 실천적인 주제를 이야기해볼 참입니다. 바로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문제입니다. 저는 임상 심리학자가 아니므로 – 형수가 심리상담사이긴 합니다만 - 이 또한 아주 가벼운 제안으로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첫째, 행복해져야만 한다는 생각을 조금 내려놓아보면 어떨까요.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행복은 물론 소중한 인생의 목적이지만 유일한 목적도 아니고 궁극적인 목적은 더더욱 아닙니다. 지금 행복하지 않다고 잘못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인생이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불행하다는 감각도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더욱이 인생의 어떤 시점에서는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불행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로스쿨이지요.) 이 점을 인정하면 마음이 한결 편해질까요.
둘째, 우울을 똑바로 직시해보시면 어떨까요. (우울을 부러 부정하거나 숨기려 하지 않으 신다는 점에서, 이미 충분히 잘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지금의 불행과 우울이 나의 의 지와 노력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온 힘을 다해 그 렇게 하세요.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시선을 구름 너머의 가닿을 수 없는 행복에 두기보다는 내면으로 돌려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지 싶습니다. 죽음이 사방을 에워싸는 어둠 한가운데에서 몽테뉴가 “나는 병에 걸리고 싶지 않다. 그러나 병이 나면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싶다... 아프다는 걸 느끼고 싶다”고 고백하며 삶을 긍정하는 자신을 발견했듯, 우리의 어떤 단면들은 어둠 속에서 더 잘 보입니다. 나는 왜 우울한지,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고 있는지, 차분하게 한 번 살펴보시는 건 어때요. 그러다 보면 자기가 얼마나 복잡하고 다채로운 존재인지 깨달으면서 한 번 놀라고, 그런 우울 따위가 나의 가치를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위안을 얻게 될 겁니다. 내면을 들여 다보는 게 어렵다면 몽테뉴와 같은 거울에 비춰 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몽테뉴의 위로하는 목소리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너의 시대의 부조리와 야만성을 앞에 두고 어쩌자고 그렇게 힘들어하고 풀이 죽지? 그 모든 것은 너의 피부만을, 너의 외적인 삶만을 건드릴 뿐 진짜 내면의 자아는 건드리지 못하는데.” 그리고, “분별력이 있는 인간은 아무것도 잃을 게 없다.”
셋째, 반복되는 이야기이지만, 몽테뉴가 했던 것처럼 자기가 누구인지를 탐색해 보세요.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진정으로 그리는 삶의 형태가 어떤 것인지를요. 우리는 결과로써 행위와 선택을 정당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아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때로는 강요하기까지 하는 사회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 열심히 공부합니까?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좋은 대학에 가야 하나요?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이지요. 왜 좋은 직장을 얻어야 할까요? 높은 연봉을 받고 결혼시장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입니다. 질문은 계속 이어지고, 답은 언제나 같습니다. 우리는 선택을 그 선택이 가져올 결과에 근거하여 정당화하는 일에 너무나도 젖어든 나머지, 그것이 하나의 삶의 양식(mode of life)이 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반드시 이런 물음에도 맞닥뜨리게 됩니다: 왜 사는가? 이때 우리는, 앞의 다른 질문들에 대답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는 이 물음에 대응할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 궁극의 질문에 대한 인류사의 가장 탁월한 대답은 CEO도 아니고 “검클빅”도 아니고 노벨상 수상자도 아닌, 세르반테스가 창조한 미치광이 방랑 기사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자신의 기행을 설명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 돈키호테는 기댓값과 결과값에 근거한 어떤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만 이렇게 대꾸할 뿐 입니다: "Yo se quien soy - I know who I am." 영감으로 가득한 방랑 기사의 응답은, 행위를 반드시 외부적 기준에 비추어 정당화할 필요가 없다는 위대한 진실을 일깨워 줍니다. 인간은 어떤 합리적 기대를 품고 행동하기도 하지만, 자기가 그리는 자아상에 충실하게 행동하기도 합니다. ‘왜 사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성공과 실패, 의미와 무의미, 행복과 불행, 풍요와 가난으로 삶을 재단할 수도 있지만, 내면에 스스로 세운 탁월함의 기준에 따라 삶을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돈키호테의 이야기는 "우리가 신뢰가 담보될 때에만 신뢰하고, 사랑을 되돌려받을 것을 확신할 때에만 사랑하며, 배움이 가치 있다고 여겨질 때에만 배운다면, 우리는 인간 본성의 불가결한 부분을 포기하게 된다는 것, 즉 결과와 상관없이 우리가 그리는 자아상에 충실하게 행 동하고자 하는 의지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시대의 광풍이 자신을 찢어놓을 듯이 잡아당기는 와중에 몽테뉴는 자기를 탐색하고 내면에 단단한 중심을 세움으로써 자기 자신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그는 가톨릭이냐, 위그노냐를 결정하고 서로를 찌르고 베어 죽이는 게임에 동참하지 않고 그저 인간으로 남았습니다. 독자님께서 줄세우기로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이 히스테리컬한 게임에 뛰어드는 대신 자기 자신을 지키고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로 결정하신다면, 더는 거기에 흔들릴 이유도 없습니다.
넷째, 맛있는 것을 자주 드시고, 가끔은 사람도 만나시고, 피곤하면 쉬세요. 그리고 먹거나 놀거나 쉴 때는 먹고 놀고 쉬는 일에 집중하세요. 그 경험을 꽉 붙잡으세요. 마음은 ‘공부해야 되는데...’하는 생각에 가 있고 몸은 놀고 있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것이 없습 니다. 그러느니 공부하는 게 낫지요. 반대로 책상에 앉아서 되지도 않는 공부를 어거지로 붙잡고 세월만 흘려보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느니 그냥 퍼질러지는 게 낫습니다. 이 말은 결국, 몽테뉴가 조언하듯, 지금 그리고 여기의 삶을 사시라는 겁니다. 《에세》는 빛나는 문장들로 가득하지만, 저는 이 짧은 문장만큼이나 삶과 지혜의 정수를 담은 것이 없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나는 춤출 때는 춤추고, 잘 때는 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