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테뉴, 《에세》
밤새 한 권의 책만 가지고 대화를 나눠야 한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몽테뉴의 《에세》를 고르겠다. 나는 몽테뉴와 《에세》에 관해서라면 정말로 밤새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에세》를 12년 전 군대에서 처음 읽었다. 그 때는 그 책이 《에세》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고(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판본의 제목은 일본식 번역어인 《수상록》이었다), 완역본도 없었다(내가 가지고 있던 판본도 편역본이었다). 일과가 없는 주말 아침에는 어깻죽지에 그 두꺼운 책을 낀 채로 사무실에 청소를 하러 갔다. 청소를 대충 끝내고는 오후 5시에 영내 스피커로 애국가와 ‘The Star-Spangled Banner’가 울려퍼질 때까지 몽테뉴의 글을 읽다 나오곤 했다.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러 몽테뉴의 책도 《에세》라는 원래 제목을 되찾았고, 우리말 완역본(심민화, 최권행 선생님 번역)도 나왔다.
《에세》는 길고 짧은 수십 편의 에세이를 모은 선집이다. '에세이(essay)'라는 단어와 형식의 기원이 바로 《에세》다. 그래서 한번에 정독할 필요가 없고 내키는 대로 골라 읽어도 된다. 다만 순서대로 읽어야 몽테뉴가 수십 년에 걸쳐 이 책을 쓰면서 겪었던 변화와 성장의 자취를 그대로 따라갈 수 있다. 몽테뉴는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에세이를 추가했을 뿐 아니라 과거의 에세이도 여러 차례 수정했는데, 제대로 된 번역본에는 몽테뉴가 언제 어느 부분을 수정했는지 본문에 전부 표시되어 있다. 어떻든 《에세》는 가벼운 마음으로 하루에 한두 편씩 읽으며 다른 책과 병행 독서하기에도 참 좋은 책이니, 이는 나의 최근 저녁 루틴이기도 하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고 실로 전혀 어렵지 않은 책이지만 그렇다고 이 작품의 무게까지 가벼운 것은 아니다. 블레즈 파스칼은 "그 책을 읽으면서 내가 발견한 것은 모두 몽테뉴의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라고 썼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몽테뉴의 전기인 《위로하는 정신》에서, 《에세》를 읽다 보면 그와 몽테뉴 사이에 놓인 400년의 시간이 "연기처럼 사라진다"고 했다. 이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에세》를 직접 읽어보는 수밖에 없다. 나는 《에세》를 읽으며 무릎을 치며 박장대소하기도 하고, 괴로운 마음에 빠지기도 하며, 몽테뉴와 대화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기도 한다. 400년 전 보르도의 은퇴 귀족이 쓴 글의 행간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는 일은 짜릿한 경험이다. 나는 개나리색 형광펜으로 중요한 부분을 표시하며 읽는 것을 좋아하는데, 《에세》를 읽다 보면 모든 문장에 줄을 치고 싶어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전혀 줄을 긋지 못할 때가 왕왕 있다.
"기억력에 대한 이야기에 끼어들기에 나보다 더 적절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게서는 기억력의 흔적도 찾기 어려울 정도이며 그 심각한 처지가 나만큼 끔찍한 정도인 사람을 찾기도 어려우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몽테뉴는 《에세》 1권의 9장을 당황스러울 정도로 솔직한 고해성사와 함께 시작한다. 이후 몽테뉴는 기억력이 좋지 않아 겪게 되는 불편함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억울한 상황에 대해 한탄을 늘어놓는다. "기억력이 없는 것을 가지고 그들은 내 마음가짐을 비난하며, 타고난 결점을 가지고 양심이 삐뚤어졌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그 사람 이런 부탁, 저런 약속을 잊어버렸어.' 하고 그들은 말한다. 나는 확실히 쉽게 잊곤 한다. 그러나 친구가 맡긴 일을 소홀히 하다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가련한 내 처지를 받아 주어야지, 그걸 악의로 여겨서는, 더구나 내 기질과는 상극인 그런 악의로 여겨서는 안 된다." 나 또한 기억력이 좋지 않아 준비물을 자꾸 까먹는 바람에 중학교 담임선생님께 혼난 적이 있다. 그 때 선생님이 한숨을 쉬며 했던 말이 아직도 정확히 기억난다. "Juno, I am sick from the back tooth of you forgetting your notes." 몽테뉴의 억울한 호소가 너무나도 내 마음과 같아서 내 속마음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
다음으로 몽테뉴는 기억력이 좋지 않아 다행인 점도 있다고 말한다. 우선 기억력이 좋지 않기 때문에 일찌감치 야심을 포기하는 법을 배워 다행이라고 한다. (그는 삼십 대에 법관직을 그만두고 은퇴한 뒤 방에 틀어박혀 글을 썼다.) 또한 기억력이 좋지 않은 탓에 자신이 당한 모욕을 잘 기억하지 못해 무던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고도 한다. 또한 기억력이 좋지 않기 때문에 거짓말을 잘할 수 없어 거짓말하는 습관을 들이지 않아 다행이라고도 말한다. 여기서 몽테뉴는 마치 20세기 옥스퍼드 일상언어철학자라도 된 것처럼 "거짓을 말하는" 것과 "거짓말하는" 것의 개념을 분석하여 구분한다. 전자는 진실이라고 믿으면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후자는 진실임을 알면서도 자기 양심을 거스르는 짓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나는 이 두 개념의 틈새에서 '진리값과 무관한 태도로 발화하는 행위'(이른바 "개소리"(bullshit))를 발견한 철학자 해리 프랭크퍼트(H. Frankfurt)가 《에세》 1권 9장에서 영감을 얻은 것은 아닌지 상상한다.
여기서 몽테뉴는 갑자기 거짓말에 대한 맹렬한 적개심을 드러낸다. "진실로 거짓말하는 것은 못된 악덕이다." 그는 거짓말이야말로 가장 끔찍한 악덕이므로 그 죄는 화형으로 다스려도 과하지 않다고 말하고, "어린 아이들의 죄 없는 실수를 엉뚱하게 처벌하면서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면서도(16세기 사람의 양육관이라고 보기엔 과하게 현대적이다) 거짓말하는 버릇만큼은 따끔하게 고쳐줘야 한다고 충고한다. 갑작스런 몽테뉴의 급발진을 목도하며 아리송해하고 있다 보면 곧 이 장의 제목이 <기억력에 관하여>가 아니라 <거짓말쟁이들에 관하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 수 장에 걸쳐 늘어놓던 기억력 얘기는 그냥 맥거핀이었구나. 아니면 의식의 흐름이었거나. 버지니아 울프는 몽테뉴가 의식의 흐름 기법을 최초로 시도한 작가라고 했다. 메를로-퐁티는 그를 두고 "의식이 인간 실존의 핵심이라는 사실에 경탄한" 작가라고 했다. 과연.
이어지는 성찰은 사뭇 진지해 앞서 흥미진진한 내용을 읽으며 달뜬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만약 진실과 마찬가지로 거짓도 단 하나의 얼굴을 가졌다면 대처하기가 나을 것이다. 거짓말쟁이가 하는 말의 반대를 사실로 여기면 될 테니까. 그러나 진실의 뒷면은 무수한 모습을 하고 있고 그 영역 또한 무한하다. 퓌타고라스 학파는 선을 확실하고 한정된 것으로, 악은 무한하며 불확실하다고 여긴다. 과녁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수히 많지만 과녁에 도달하는 길은 오직 하나이다... 옛날 한 교부(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뜻 모를 낯선 언어를 말하는 사람과 있기보다 평소 알고 있는 개와 함께 있는 것이 더 낫다고 말했다... 그리고 거짓된 말은 침묵보다 얼마나 더 상종하기 어려운가." 이 단락에 툭 던지듯 매달아놓은 고백은 마치 나에게 묻는 것 같다. "물론 나는 한 번의 뻔뻔스럽고 엄숙한 거짓말로 확실한 극도의 위험을 벗어날 수 있는 경우에도 끝까지 나를 지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는 자신이, 그리고 우리가 인간임을 잊지 않는다.
이 짤막한 글이 주는 즐거움과 지적 자극, 위로와 성찰은 열 장 남짓한 분량에 비해 너무나도 크다. 단 한 편의 에세이로 이렇게나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몽테뉴 이야기로 밤과 새벽을 채워도 모자란 이유다.
《에세》를 읽다 보면 군데군데에서 몽테뉴가 어떤 생각으로 이런 글을 썼는지 궁금해진다. 다른 대목에서는 몽테뉴가 정말로 전달하고 싶은 뉘앙스가 무엇인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펭귄에서 펴낸 《에세》 영역본과 몽테뉴에 관해 쓰여진 여러 책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와 함께 읽게 된다. 나는 정보를 습득하겠다는 목적으로 책을 빨리 읽을 때가 많지만 《에세》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는다. 읽으면 읽을수록 더 알고 싶고 대화하고 싶어진다. 느리게 읽어도 괜찮다는, 아니 오히려 그래야 좋다는 생각이 든다.
몽테뉴에 관하여 쓰여진 책으로 솔 프램튼의 《내가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고양이가 나를 데리고 노는 것일까?》, 그리고 사라 베이크웰의 《어떻게 살 것인가》를 추천한다. 특히 프램튼의 책은 《에세》자체만큼이나 가슴이 시리도록 아름답고 그 문장들이 선사하는 위로는 깊다. 베이크웰의 책 또한 워낙 이런 책을 잘 쓰는 훌륭한 저자가 쓴 모범적인 전기이기도 하고, 몽테뉴를 지성사의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돕지만, 에세이로서도 프램튼의 책 못지않게 빼어나다. 두 책 모두 여러 번을 거듭 읽어도 좋다. 모두 절판이지만(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중고로 구할 수 있다면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 다음에, 아니 그 전에 《에세》를 직접 읽어도 좋다.
《에세》는 다른 무엇보다 살아가는 것에 관한 책이다. "내 직업과 내 기술, 그것은 살아가는 것이다(my art and profession is to live)." 나는 여기서 "art"를 - 프랑스어 원문이 무엇이든 간에 - "기예"로 옮겼으면 더 적확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삶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과학이자 예술(art and science)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책에서 나 스스로와 내 삶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 배운다. 몽테뉴의 관점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살아가는 것에 관한 한, 몽테뉴는 우리 모두의 스승이다. 내 말이 객관적인 평가가 아니라 사심으로 가득 찬 사랑 고백으로 느껴진다면 어쩔 수 없다. 적어도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내게 동의할 것이다. 그는《에세》에 관해 이렇게 썼다. "재미를 찾는 아이처럼 읽지 마라. 야심 찬 사람처럼 교훈을 얻으려고 하지도 마라. 살기 위해서 읽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