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단상
아이를 가지는 것과 마약을 하는 것의 차이점이 뭘까요?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 첫 문장을 보자마자 ‘뭐 이딴 질문이 다 있지?’라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차이점이 뭐냐고 물을 게 아니라 도대체 그 둘 사이에 공통점이랄 게 있는지를 물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저는 아이를 갖는 것이 아주 중요한 면에서 마약을 하는 것과 동일하거나 최소한 구조적으로 유사하다고 주장할 작정입니다.
저는 아이를 꼭 낳아야겠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술자리에서 이런 생각을 피력할 때마다 꼭 듣는 말이 있습니다. ‘나도 원래는 너와 같은 생각이었는데, 막상 아이를 낳고 보니 이제는 아이 없이 살 수 없을 지경이다. 도대체 왜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했는지 과거의 나에게 꿀밤을 먹여주고 싶을 정도란다.’ 저는 이런 주장이 100% 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100% 진심이라고 믿을 뿐 아니라, 저 또한 막상 아이를 가지게 되면 그와 똑같이 생각하게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웬만하면 갖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여전합니다. 그 이유를 천천히 풀어보겠습니다.
철학자 L. A. 폴은 〈What You Can't Expect When You're Expecting〉이라는 논문에서, 아이를 가질지 여부에 관하여 사전에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표준적인 의사결정모델에서 합리적인 의사결정이란, 단순히 말하면 가능한 대안들의 기댓값을 계산한 다음 기댓값이 더 큰 대안을 선택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우리의 통속적인 관념에도 잘 들어맞습니다. 예컨대 칼럼니스트 셰릴 스트레이드(Cheryl Strayed)는 아이를 가질지 고민하는 남성에게, 아이를 가졌을 때의 삶과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했을 때의 삶을 상상해 본 다음 자신에게 더 끌리는 쪽을 선택하라고 조언합니다. 결국은 기댓값이 더 큰 쪽을 선택하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폴 교수님은 이러한 방법이 아이를 가지는 결정에 관해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아이를 가지는 일은 이른바 "인식적으로 전환적인(epistemically transformative)"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가지는 일은 그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꿉니다. 아이를 가져본 후의 나는 아이를 가져보기 전의 나와는 사실상 다른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아직 아이를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 아이를 가지게 된 후의 – 따라서 인식론적 전환을 경험한 후의 – 기댓값을 상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바나나를 평생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바나나가 과연 맛있을지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요. 따라서 아이를 가지기 전에 아이를 가질지 여부를 합리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폴 교수님에 따르면 불가능합니다. 물론 사회적, 종교적, 도덕적 이유로 아이를 가지거나 가지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전통적인 의미에서 합리적인 결정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은 폴 교수님과 동일한 관찰에서 출발하지만 논증의 구조나 도달하는 결론은 조금 다릅니다. 우선 저는 아이를 가지는 일이 인식적으로 전환적인 사건이라는 관찰에는 동의합니다. 다만 그 “인식적 전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제 생각은 폴 교수님과 약간 결이 다른데, 이를 이렇게 정리하고자 합니다: ‘아이를 가지는 일은 관련된 2차 욕구에 관한 반성적 승인을 실질적으로 무력화한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그 원인은 생물학적입니다.
우선 “2차 욕구”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철학자 해리 프랭크퍼트(Harry Frankfurt)는 <Freedom of the Will and the Concept of a Person>이라는 논문에서 1차 욕구(first-order desire)와 2차 욕구(second-order desire)를 구분합니다. 1차 욕구는 우리가 가장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욕구입니다. 감자탕이 먹고 싶거나 위스키가 마시고 싶다면 바로 그것이 1차 욕구입니다. 2차 욕구는 메타적 욕구, 즉 1차 욕구에 대한 욕구입니다. 감자탕이 먹고 싶기는 하지만 저속노화를 해야 하니 참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닭가슴살 샐러드를 대신 주문했다면, 여러분은 2차 욕구를 바탕으로 특정한 1차 욕구를 반성적으로 승인(reflectively endorse)한 것입니다.
인간은 다른 조건이 같다면 누구나 쾌락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최소화하고 싶어합니다. 또한 우리는 마약이 지금까지 경험해 본 것과는 차원이 다른 엄청난 쾌락을 가져다준다는 사실도 압니다. 그렇다면 삼단논법에 의해 인간은 누구나 마약을 해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 마약에 손을 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반면 마약에 한 번 손을 댄 사람은 그만두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1차 욕구와 2차 욕구의 도식은 이러한 현상을 잘 설명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쾌락을 극대화하고 싶은 1차 욕구가 있지만, 쾌락에 종속되고 싶지 않다는 2차 욕구 또한 있으며, 이를 통해 마약을 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반성적으로 승인합니다. 문제는 마약에 일단 손을 댄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중독이라는 생화학적 기전 때문에 2차 욕구에 따라 자율적으로 1차 욕구를 선택하는 능력이 무력화됩니다. 따라서 쾌락의 극대화라는 1차 욕구의 추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저는 아이를 낳는 경험이 이런 측면에서 마약에 손을 대는 경험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낳는 일과 마약을 하는 일이 질적으로 혹은 도덕적으로 유사하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전자는 큰 축복이고 후자는 상상하기도 싫은 나쁜 일입니다. 다만 양자 모두 2차 욕구에 근거한 성찰을 어렵게 만들고, 그 기전이 생물학적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마약에 한 번 손을 대면 ‘마약에 대한 욕망을 욕망해도 좋은가’라는 2차 욕구가 무력화되듯, 아이를 한 번 가지면 ‘아이를 가지는 일을 욕망해도 좋은가’라는 2차 욕구가 무력화된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는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저조차 조카를 보면 조카를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트럭에 몸을 던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아이가 아닌데도 그렇습니다. 제 아이면 오죽하겠어요? 막상 제 아이를 가지게 되면 너무나도 기뻐할 제 모습이 눈에 선하고, 인식적 전환이 어쩌구 2차 욕구가 어쩌구 웅앵웅 인스타에 똥글을 쓰던 시절을 반성할 제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를 가지는 경험은 인식적으로 전환적인 경험이고, 그 경험은 저의 가치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정렬함으로써 ‘아이를 가지는 것을 욕망해도 좋은가’에 관한 2차 욕구를 무력화, 아니 더 정확하게는 특정한 1차 욕구를 승인하게 하는 구조적 편향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걸 무력화라고 하는 게 정확한지, 특정한 1차 욕구를 승인하게 하는 구조적 편향을 일으키게 한다고 하는 게 정확한지, 아니면 다른 어떤 더 정확한 표현이 있는지는 더 고민해봐야 합니다. 아직은 엄밀한 논증이 아니라 그냥 소묘에 불과해서요.) 여기에는 생물학적인 근거도 있습니다. 아이를 가지는 경험은 상당한 뇌의 변화 및 심리적 변화를 수반한다는 연구결과가 아주 많습니다. 즉 우리는 일단 아이를 가지면 '아이를 가지는 것'에 최우선적인 가치를 부여하도록 생물학적으로 hard-wire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이 논증(논증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죠)의 범위를 명확하게 한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논증의 요점은 아이를 갖지 않는 것이 갖는 것보다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도 아닙니다. 제가 보이고자 하는 요점은, '나도 원래는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았는데, 막상 아이를 가지고 보니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소위 '유부남의 간증'(?)이 합리적인 설득력이 없다는 점입니다.
'유부남의 간증'이 설득력이 없는 이유는, '유부남'이 되는 순간부터 이미 특정한 1차 욕구를 승인하게 하는 구조적 편향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유부남이 된 내가 중립적일 수 없듯이, 유부남이 되기 전의 나도 아이를 낳는 경험을 해보지 못한 상태이므로 완전히 중립적일 수는 없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립성을 흑백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로 생각한다면, 아이를 가짐으로써 일어나는 생물학적 re-wiring을 경험하지 않은 상태의 내가 유부남이 된 나보다 상대적으로 더 인식적으로 중립적인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충분히 합리적입니다. 같은 반론을 마약에 대입해 보면 이 반론의 문제점이 더 명확히 드러납니다: ‘너도 마약을 해 보지도 않았으면서 그에 관한 의사결정을 하고 있는 셈이니 중립적이지는 않잖아?’
그러니 다음에 술자리에서 누군가가 '일단 낳아보면 안다'고 말한다면, 저는 이렇게 되물으며 이 글을 보여줄 작정입니다: ‘형, 마약 해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