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torney Cho's Strange Trip to Busan 1
존재가 너무 버거워서 그만 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생각보다는 꽤나 자주요. 조변호사가 충동적으로 부산행 티켓을 끊은 그 일요일의 아침 또한 그랬습니다. 이 이야기는 조변호사가 부산으로 떠나기 하루 전인 토요일의 사건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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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변호사는 법조인 분석철학 동호회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토요일은 격주마다 있는 모임 날이었지요. 그날은 인간의 의식(consciousness)을 둘러싼 심리철학의 기본적인 논쟁들을 소개하는 《심야의 철학도서관 A Dialogue on Consciousness》을 읽고 토론을 하기로 한 날이었습니다. 조변호사는 점심께 회원들을 만나 식사를 하고 카페에서 철학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아마추어들의 회동이 으레 그렇듯, 사실상 해답보다는 궁금증만 무수히 많아지는 자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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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약속을 앞두고 시간이 붕 뜨게 된 조변호사는 촌음을 서점에서 때우기로 작정합니다. 조변호사는 철학 동호회원이자 로스쿨 동기생인 친구와 함께, 1944년의 미 해병대가 아일랜드 하핑(island-hopping)을 하듯 서가에서 서가로 옮겨다니며 책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다 서점 끝자락에 놓인 문학 평대에서 조변호사는 밝은 주황빛 표지의 책을 한 권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그 책을 샀습니다. 별난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저 뒤표지에 원문으로 적힌 이 소설의 첫 문장들이 몹시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William Stoner entered the University of Missouri as a freshman in the year 1910, at the age of nineteen. Eight years later, during the height of World War I, he received his Doctor of Philosophy degree and accepted an instructorship at the same University, where he taught until his death in 1956.
그리고,
He did not rise above the rank of assistant professor, and few students remembered him with any sharpness after they had taken his cour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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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변호사는 저녁 약속 장소로 가기 전 잠깐 《스토너》를 읽었고, 저녁에 위스키를 마신 뒤,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은 채로 잠들었던 탓에 따가운 햇볕에 일찍 잠에서 깼습니다. 그 일요일 아침이었습니다. 조변호사는 대충 양치질을 하고 창가에 앉아 도림천을 내려다보다가, 좌식 테이블에 얌전히 놓인 주황색 빛깔의 양장본을 다시 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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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변호사는 한때 자신의 삶이 1944년의 독일 국방군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로스쿨 입학을 마지막으로 그는 그 어떤 인상 깊은 성취도 이루어내지 못하였고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북아프리카의 모든 전선에서 패퇴하던 1944년의 독일 국방군처럼 학업과 커리어, 그리고 가족, 우정, 연애를 포함한 각종의 인간관계에서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변호사시험이 종료하자 패색은 외려 짙어졌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해방과 많은 시간은 얼마 못 가 권태로 바뀌었습니다. 시험이 끝나도 삶이 극적으로 나아지지 않는다는, 전에는 어렴풋하던 그 사실이 더없이 명료해졌습니다. 학생도 변호사도 아닌 어정쩡한 지위에서 오는 불안감과 이제 자신의 삶에 ‘상승’이란 없다는 무력감, 모순된 두 감정이 기묘하게 뒤엉켜 조변호사를 짓눌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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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변호사가 로펌에 입사하여 주니어 변호사가 되자 후자의 무력감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시절에는, 대학에 입학하거나 로스쿨에 입학하거나 로스쿨을 졸업하여 변호사가 되면 삶이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즉,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근거해 현재를 정당화할 수 있었습니다. 변호사가 되어 입사가 확정되자 조변호사는, 더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삶이 여기서 더는 나아가지 않는다는 냉정한 자각, 즉 지금의 이 루틴한 일상을 앞으로 최소 30년 이상 더 견뎌야 한다는 자각은 권태와 무력감을 함께 가져왔습니다. 이 권태는 이를테면 단순한 심심함이나 연인간의 권태(기)와는 미묘하게 다른 유형의 감정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다는 감각, 그래서 삶에 의미를 부여할 구석을 찾을 수 없다는 그런 감각이었습니다. 카뮈가 《시지프 신화》에 썼던 그 “권태” - 놀라움을 동반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 라고 할까요.
무대 장치가 문득 붕괴되는 일이 있다. 아침에 기상, 전차로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진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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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변호사가 거의 유일하게 기쁨을 누리는 시간은 바로 철학을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조변호사는 철학 모임이 참 좋았습니다. 철학적 문제를 생각할 때에는 마치 우주에 둥둥 떠다니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의식이란 무엇일까? 자유의지란 있을까? 수(數)는 존재할까?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 사람일까? 이런 고민을 하다 보면 조변호사를 괴롭히는 문제들이 더없이 사소해 보였습니다. 조변호사는 대학원으로 돌아가 철학을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결심하자마자 현실이 조변호사를 다시 지상으로 끌어내렸습니다. 학비와 생활비는 어떻게 마련하지? 결혼은 할 수 있을까? 철학은 삶의 의미의 원천이었지만 손을 뻗어 가닿으려고 하면 다시 괴로움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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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단위로 반복되는 이 짓을 30년을 더 하라고? 이렇게 자문하는 순간 존재가 터무니없이 버겁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조변호사는 건물주가 아니었기 때문에 하기 싫다고 그만둘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습니다. 이런 일상은 말 그대로 목숨에 조건부로 붙어있는 부관(附款)이었으므로 쳇바퀴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살기를 멈추는 것뿐이었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윌리엄 스토너는 과학적 농업을 배우려고 미주리 대학에 입학합니다. 2학년 1학기에 수강한 영문학 개론 교양 수업. 담당교수인 아처 슬론은 소네트 한 편을 낭독합니다. 셰익스피어의 73번 소네트. 그리고는 스토너에게 묻습니다. 스토너 군, 이 소네트의 의미가 뭐지? 스토너는 대답하지 못합니다. 대신 그는 모든 감각 기관이 그 순간의 가장 미세한 떨림에까지 활짝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한 학생이 눈을 깜박이자 가느다란 그림자 하나가 뺨에 내려앉았다. 햇빛이 뺨의 솜털에 붙들려 있었다”라는 묘사는 압권입니다.) 슬론은 그에게 재차 묻습니다: “셰익스피어가 300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네. 스토너 군. 그의 목소리가 들리나?” 스토너는 끝내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습니다. 스토너는 문학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 시간 이후 스토너는 주전공인 농과대학의 수업 내용이 생경하게 다가오는 것을 느낍니다. 그는 다시 이전의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부모의 농장으로 돌아가는 대신 대학에 남아 영문학을 더 공부하기로 선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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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부에 등장하는 이 이야기는 400페이지에 걸친 장편 전체를 통틀어 가장 순수하게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비극적이기까지 합니다. 결말이 이미 정해진 이야기인 까닭입니다. 독자는 이 장면을 읽으면서 스토너가 당대의 저명한 영문학자로 이름을 날리지는 못하더라도 의미 있는 무언가를 남기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낭만적인 기대를 품게 됩니다. 그러나, 자못 사무적인 문체로 쓰인 첫 문단이 기술하는 대로, 스토너는 영문학 선생이 되지만 조교수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이내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집니다. (“He did not rise above the rank of assistant professor, and few students remembered him with any sharpness after they had taken his courses.”) 《스토너》의 독자는 이토록 아름다운 장면을, 이처럼 건조하기 짝이 없는 결말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채로 읽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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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전개되는 스토너의 인생에는 별다른 이변이 없습니다. 그의 삶은 약간의 불안한 기쁨과 확실하지만 그를 죽음으로 몰아갈 정도는 아닌 슬픔으로 채색되며 예견된 결말을 향해 차분하게 나아갑니다.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하여 문학을 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조변호사의 경우는 그 반대였습니다. 그는 삶을,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문학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에게 현실도피는 문학이 아닌 철학이 해낼 몫이었습니다.) 조변호사는 “인생을 한 꺼풀 벗겨낸 듯한” 그런 소설을 좋아한다고 곧잘 말합니다. 인생을 정직하게 비추지 못하는 문학은 일종의 기만이라고 조변호사는 생각했습니다. 그는 문학 작품이 독자를 기만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삶을 논증이 결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려내 주기를 바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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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가 이러하니 조변호사가 《스토너》의 첫 문단에 끌린 것도, 문제의 일요일 아침에 그 책을 100페이지쯤 읽고 걷잡을 수 없는 생의지의 상실에 휘말린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조변호사가 이 소설을 대번에 마음에 들어 한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뒤표지에 적힌 문장 - “He did not rise above the rank of assistant professor,” 이 문장은 냉담함이 느껴질 정도로 현실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스토너》에 마음이 끌렸던 것입니다. 한편 정확히 같은 이유로 조변호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살기 싫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첫 문단부터 음울한 결말을 알려주고 시작하는 소설이 몇이나 되는가요? 윌리엄 스토너가 “삶이 여기서 더는 나아가지 않는다는 냉정한 자각, 즉 지금의 이 루틴한 일상을 앞으로 최소 30년 이상 더 견뎌야 한다는 자각”을 날카롭게 벼린 다음 조변호사의 멘탈을 난도질하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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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삶이 여기서 더는 나아가지 않는다는 자각”은 권태와 무력감과 더불어 부조리(absurdity)의 인식으로도 이어집니다. 카뮈가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시작된다고 했던 것이 바로 부조리의 인식이지요. 카뮈의 부조리는 필사적으로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형이상학적인 충동과 끝내 응답하지 않는 세계 사이의 영원한 긴장을 가리킵니다. 조변호사의 서사는 이렇게 영웅적이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조변호사는 카뮈와 같은 지성이 아닌 소박한 소시민에 불과하다는 점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변호사를 괴롭히는 부조리란, 조변호사가 바라고 욕망하는 것과 그의 현재 상태에 간극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삶이 여기서 더는 나아가지 않”으므로 그 간극이 이제는 영원히 메워질 수 없다는 자각이었습니다. 카뮈의 고뇌처럼 영웅적이지는 않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비슷하긴 합니다. 이 무렵 조변호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예민하게 그러한 부조리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스토너》는 그 인식을 더 생생하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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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두 시 경이었을 겁니다. 조변호사는 그만 책을 덮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부산에 사는 형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는 살기가 싫어졌다고 말한 다음, 오늘 또는 내일, 가능하면 오늘 부산에 내려가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조변호사는 16시 30분에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KTX표를 끊고 《스토너》를 챙겨 길을 나섰습니다. 이 사달의 원인이 된 그 책을 챙긴 이유는 띠지에 적힌 이동진 평론가의 추천사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끝내 위엄을 잃지 않은 인간에 대한 성실하고도 위대한 문학.” 이동진 평론가가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면, 이 책이 앗아간 삶의 의욕을 결국에는 이 책에서 다시 건져내야만 할 것 같다고 조변호사는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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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후, 그렇게 조변호사의 부산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살기 싫어져서 갑자기 떠난 여행이란, 기묘하기 그지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