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답 노트

by 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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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꽤 주룩주룩 내리는 날이야. 더위가 가시다 못해 춥기까지 한 걸 보니 제법 비다운 비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예전의 너라면 오만 핑계를 대서라도 취소했을 테지만 이 비를 뚫고 필라테스하러 꼭 가겠다는 너의 다짐이 대단해서 기꺼이 걸음을 옮기는 중이지.


필라테스용 양말을 손에 쥐고 물 묻은 발을 닦겠다며 야무지게 손수건을 챙기는 모습이 꽤 기특했어. 어떻게든 젖지 않겠다는 다부진 마음과 누군가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거니까.


오늘은 아무도 수업에 나오지 않아서 조금 많이 어색하고 당황스러웠지? 1:1 수업은 어떻게 매번 해도 적응이 안 될까. 사실 한 타임에 수강생이 두 명 이하면 수업을 취소하는 게 맞는데, 그대로 진행해 주시는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면서도 부담스러운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 너도 절로 뚝딱이가 되더구나.

그래도 오늘 동작들 꽤 잘 해내서 칭찬을 잔뜩 받았어. 그거 기억해? 예전에 테이블 탑(기본동작)도 못 했던 거. 유연성이 부족해서 그냥 다리 펴고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어했잖아. 그때를 떠올리면 이건 거의 기적이야! 이제는 목이랑 어깨 통증도 많이 줄어서 더 이상 신경차단술을 받지 않아도 되잖아. 얼마나 다행인지. 잘했어, 꾸준히. 1년 반이라는 시간이 헛되지 않았네.


처음 한 달만 등록했을 때 사유에 ‘의지박약’이라고 적었던 게 생각난다. 그랬던 네가 그 어떤 공백기 없이 수업에 참여한 유일무이한 사람이 됐어. 이건 잘 해내야 한다는 마음을 버리고 3초만, 5초만 하며 천천히 나아간 덕분이야. 물론 더 잘하고 싶어서 남몰래 속상해하기도 했지. 예전과 다른 몸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어서 운동을 기피하기도 했고. 원래 운동신경이 뛰어났던 너였으니까. 그래도 숱한 어려움을 직면했고 놓지 않았어. 그걸로 된 거야.


오늘 수업에 이름을 붙이자면 오답 노트라고 하고 싶어. 이제껏 부족했던 부분을 보완하는 시간. 그래서 더 힘들기도 했지만 근사하게 끝냈다. 아주 멋있어, 당신. 정말 많이 성장했다고 칭찬받은 거 자랑해도 좋아.


필라테스하며 인생을 배우는 시간이 참 많은 것 같아. 10초를 다 버티지 않아도, 20개를 다 채우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그걸 알고 나니까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들도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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