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공허함
13개월 차이 연년생을 키우고 있다. 아직 21개월, 8개월이라 엄마의 손을 너무나 많이 필요로 한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부터 저녁에 다시 잠드는 순간까지 이 녀석들에게 내 손길이 닿지 않는 시간은 없다. 호기심 많은 21개월과 활발히 기는 걸 넘어 모든 물건을 잡고 먹는 8개월. 두 아이 뒤를 따라다니다 보면 하루가 다 가 있다.
21개월 첫째를 안아 재울 때 힘들었지만 참 행복했다. 내 품에서 새근새근 잠드는 아이를 보고 있노라면 황홀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요즘은 절대 안겨 잠들지 않는다. 혼자 잠드는 게 편해진 거다. 아쉬웠다. 그래서 8개월 둘째를 굳이 안아 재운다. 금세 내 품을 떠나 혼자 잠드는 걸 편해할 걸 알기에, 잠드는 시간조차 엄마가 필요치 않는 순간이 올 것을 알기에, 이 기간을 어떻게든 좀 붙잡고 싶다.
엄마의 마음이란 이렇게 늘 아쉬운 걸까.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정봉이(안재홍) 엄마(라미란)는 외할머니가 발목을 삐끗했다는 이야길 듣고 이틀 동안 시골에 내려간다. 남편과 두 아들에게 자신이 없어도 잘 있어 줄 것을 당부하면서. 물론 남편과 두 아들은 엄마 없는 자유를 누리며 지냈다. 그리고 엄마가 온다는 연락을 받고 집을 치우고 정리하고 엄마가 요구했던 모든 것을 충족시켜 놓는다. 그 모습을 확인한 엄만, 이상하게 기분이 좋지 않다. 그 모습이 의아한 둘째 아들, 정환이(류준열)는 친구 도롱뇽(이동휘)과의 대화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왜, 왜 (엄마의) 기분이 안 좋지?”
“집이 개판인가 보지 뭐.”
“웬열. 싹 다 치웠거든? 청소, 설거지, 빨래 완벽해. 연탄불도 다 갈고 엄마가 먹으라는 반찬도 다 먹고. 엄마도 놀랐을걸? 우리 엄마 손가락 까딱 안 해도 돼.”
“저기, 정환아. 너네 엄마가 왜 기분이 안 좋은지 모르겠냐?”
“몰라.”
“식구들이 너무 잘 있어서. 엄마가 없는데도, 식구들이 너무 잘 있어서.”
-드라마 <응답하라 1988>
그러면서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지금 엄마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면 그저 ‘나 지금 엄마가 필요해요.’ 그 한마디면 충분하다고.
지금처럼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하지 않던 엄마의 시절엔, 그리고 엄마의 엄마 시절엔 엄마가 자녀들만 온전히 양육하는 게 당연했다. 경제적인 부분과 성취의 개념은 온전히 아빠만의 몫이었다. 그래서 지난 세대의 엄마들은 자녀가 출가할 때가 되면 섭섭함을 넘어 적적함에 힘들어했다. 그때 엄마들에게 자녀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자 자신의 존재 이유였다. (물론 지난 세대의 아버지들 역시 비슷한 이유로 헛헛함을 느꼈다.)
“어느 순간 자녀들이 내 손을 필요로 하는 일이 줄어들고, 결국 내 손을 떠나는 날이 오더라. 옛날 어른들은 그 허무함을 뭐로 달랬는지 몰라. 너는 아이에게 너무 매여 살지 말어. 언제나 네 행복과 네 미래를 그리며 살어.”
어느 날 갑자기 엄만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사랑하는 손주를 앞에 두고도 매여 살지 말라 했다.
엄만 혹여 딸이 그 공허함을 알게 될까 염려되는 듯 보였다. 나 역시 그 공허함을 여러 매체를 통해 너무나 많이 들어왔기에 스스로 겸비하기에 힘쓰고 있다. 이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이 아이들에게 내가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내 일을 찾아 나서는 거다. 아이들이 장성하여 내 곁을 떠나도 사랑하는 남편과 내 일이 있다면 조금 덜 헛헛할 것 같아서.
“내가 입덧이 너무 심한데 우리 친정엄마가 해주는 겉절이 한 입만 먹으면 입덧이 멈출 것 같아. 근데 엄마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내가 열여덟에. 그때 너무 원통해서 우리 딸이 여섯 살 때 색색 자는데 우리 딸 손가락을 걸고 내가 맹세를 했어요. 주리야, 너는 네가 먼 훗날 아기를 가져서 입덧할 때 엄마가 해주는 그 반찬이 정말 먹고 싶다 그럴 때 엄마는 항상 거기서 너를 지키고 기다리고 있으마. 내가 맹세를 했어요. 그래서 요즘 우리 딸이 오면요, 친정에 오면 엄마 뭐해줘, 부추 조림해 줘, 굴비를 좀 바싹 구워줘, 이러면요, 그러고 배 터지게 먹고 소파에 누워서 늘어져서 자면요, 저는 화장실에 가서 울어요. 수미야 잘 참았다. 행복이 별거냐. 바로 이거야. 그러고 엉엉 울었는데 우리 딸은 모르죠.”
-TV 프로그램 <미운 우리 새끼>
배우 김수미 인터뷰
친정에 가면 늘 냉장고가 꽉 차 있었다. 하다못해 생수까지 비싼 생수로 완비돼 정렬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친정에 가면 엄마가 사다 놓은 음식들을 쏙쏙 빼 먹었다.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겨두고 누워보는 내 침대. 그리고 그 침대 위에서 까먹는 엄마의 손길들. 나는 그 시간을 즐기며 행복이 별거냐 이게 행복이지 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보는 게 행복이다 했다. 내가 집에 와서 먹을 걸 찾으며 냉장고를 뒤적거리고, 마음에 드는 음식을 골라 먹고 마시고 늘어져 있는 걸 보는 게 엄마의 행복이라고. 그래서 엄만 내가 친정에 간다고 하면 미리 냉장고를 채워 놓는다고 했다. 그걸 준비하는 게 기쁨이라 했다. 엄마가 이 말을 하기 전엔 ‘엄마가 먹고 싶어 사 온 건데 내가 너무 먹나’ 싶을 때가 열에 한 번은 있었다. 그런데 엄마의 말을 듣고, 더 열심히 먹어야지, 더 열심히 냉장고를 뒤져야지 싶었다.
나는 죽을 때까지 엄마의 손길을 필요로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