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의 총량에 대해서
동네 카페에 들러 책의 원고를 마무리하고 따릉이를 대여해 집에 가던 중이었다. 코너를 돌자 노을이 지는 청명한 겨울 하늘이 나타났다. 그때 마침 에어팟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전거와 풍경과 노래다. 이런 완벽한 삼위일체는 흔하게 있는 일이 아니다. 실시간으로 노을이 지는 하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다. 특히 저녁 시간대엔 늘 어두운 사무실에서 편집을 하고 있는 나에겐 더 희귀한 장면이다. 그리고 나는 에어팟 배터리 충전을 자주 까먹는데 그날따라 충전이 잘 되어있던 것도 다행인 일이다. 2일 전까지만 해도 칼바람과 영하의 날씨에 따릉이는 쳐다도 안 봤다. 그런데 마침 어제 날이 좀 풀려서 따릉이를 탈 수 있을 정도의 기온이 된 것도 얼마나 더 기막힌 우연인가. 집에 가는 길에 있는 공원에 일부러 들려 몇 바퀴 더 돌면서 오늘 정말 행운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집에 도착해서 씻고, 뜨끈한 된장찌개와 삼겹살을 먹고, 수면 잠옷으로 갈아입고 귤을 까먹고 있었다. ‘지잉’ 따릉이 알람이 울렸다. 아직 반납이 안 됐다는 공지였다. 하늘을 감상하는 것에 정신이 팔려서 따릉이 반납 래버를 안 내리고 칠렐레 팔렐레 집으로 간 것이다. 온돌 바닥에 따뜻하게 데워진 수면바지를 겨우 벗고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답답한 패딩을 챙겨 추운 밤 다시 집 밖을 나갔다. 내가 탔던 따릉이는 다행히 그 자리에 있었고 반납 래버를 내리자 초과 이용 600원이 부과됐다는 알람이 왔다. 아무튼 참 완벽한 하루란 없다.
예쁜 하늘을 만난 행운만큼 성가신 불행이 온 거다. 나는 이걸 행운 총량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행운에는 총량이 있어서 큰 행운이 오면 언젠가 큰 불행이 온다고 생각한다. 나 혼자 믿는 미신이니 과학적 근거는 없다. 이 미신은 몇 년 전 나에게 큰 불행이 왔을 때 지어낸 것이다. 우리 가족을 모두 힘들게 했던 그 불행은 꽤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큰 불행이 왔으니까 이 정도의 큰 행운이 곧 올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그 시절을 버텼다. 그 후 PD가 되고 입봉도 하는 행운을 얻었으니 그때 얻은 불행만큼 행운이 채워진 거라고 믿는다. 그런데 반대로 큰 행운이 오면 언젠가부터 불안해졌다. 이 정도의 불행도 곧 올 텐데 어쩌지? 그래서 나에게 큰 행운이 온 날은 이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떼어줬다. 인센티브를 받은 날에는 가족과 지인들에게 줄 선물을 샀다. 큰 상을 받은 날에는 팀원들과 상금과 성취를 나눴다. 행운을 적당히 써버려서 남은 만큼의 불행이 나에게 오도록 하는 작전이다.
자기 전에 누워서 명상을 하는데 오늘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딱 오늘 하루 정도의 행운과 불행만 왔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림 같은 하늘을 마주하며 집에 돌아가는 정도의 행운과 따릉이 래버를 안 내려서 다시 수고해야 하는 정도의 불행. 큰 불행이 왔을 때 행운은 언제 오는지 목 빠지게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큰 행운이 왔을 때 다음 불행은 무엇일까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 정도의 총량이 내가 감당하고 싶은 즐거운 하루다. 행운과 불행의 총량이 완벽했던 오늘을 기록하기 위해 완성했던 원고 파일을 다시 열어 마지막 글을 남긴다.
Side note:
인동 1위의 행운도 자주 와줬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