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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G 저널 Jul 07. 2017

추억의 차, 갤로퍼를 돌아보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죠

“타세요. 역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항공사에서 정비 반장으로 일하던 이모부는 호탕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럼 신세 좀 질게요.” 자가용이 없어 전철로 서울-인천을 왕복해야 했던 우리 가족은 쭈뼛쭈뼛 그가 안내한 뒷좌석에 앉았습니다. 벽면에 붙어 있는 의자는 나무등걸처럼 딱딱했습니다. 울퉁불퉁한 도로를 달리는 차는 등으로, 엉덩이로, 발바닥으로 억센 진동을 전했습니다. 운전석에 앉은 이모부의 우렁찬 목소리가 묻힐 만큼 엔진 소리도 컸습니다. 말이 좋아 뒷좌석이지 화물칸이나 다름없는 그곳에서 엄마와 누나는 티 나지 않게 미간을 찌푸렸던 것 같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저는 이모부의 힘찬 등판 너머로 보이는 운전대며 계기류에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꼬맹이 눈을 사로잡은 남자의 차가 1980년대 초의 ‘찝차’임을 알게 된 건 어른이 다 돼서의 일이었습니다. 그 차가 당시 얼마큼 비쌌고 또 얼마나 장만하기 어려운 물건이었는지 역시도. 요즘 가장 자주 듣는 질문이 “왜 한국에선 왜건은 안 되는데 왜건과 비슷한 SUV는 잘 팔릴까요?”인데 어쩌면 이모부의 찝차에 그 단서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한국에 있어 찝차는 하나의 판타지입니다. 1950년대에 큰 전쟁을 치렀고 이후 1990년대 초까지 군사정권이 이어졌다는 역사에 근거해서 말이지요. 특히 그 시대를 살아온 부모 세대에게 찝차는 권세와 권력, 경제력까지 지닌 성공한 자의 상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30대 초반에 이미 항공사 정비 반장이라는 높은(?) 직위에 오른 30여 년 전의 이모부가 찝차를 끌었던 것처럼 말이죠. 




1990년대가 되자 우리 가족에게도 자가용이 생겼습니다. 손으로 땅을 짚으면 길모퉁이를 더 빨리 빠져나갈 수 있다던 경차였습니다. 옆집 민수네, 뒷집 선화네도 뒷자리가 넉넉한 소형 세단을 장만했습니다. 매끈하고 넓은 포장도로가 늘어나고, 한집 걸러 하나는 자가용을 갖기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시장 언저리 연립주택 2층에 사는 규호네는 그 중에서도 특별한 관심을 받았습니다. 규호네 차는 단단해 보이고 창문이 큼직한 찝차였습니다. 아니, 찝차처럼 단단해 보이지만 훨씬 길고 웅장한 분위기의 오프로드 ‘풍’ 자동차였습니다. 바닥이 높은 왜건인가 싶기도 했습니다. 신문 광고는 그 차를 ‘다목적 승용차’로 소개했습니다. 그게 무엇이든 마이카 붐이 인 동네에서도 단연 돋보였던 규호네 차는 현대 갤로퍼였습니다.


규호네 갤로퍼는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보이질 않다가 기습적으로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나타나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몇 날 며칠 자취조차 없던 규호 아빠도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다른 집 아빠들은 회사에 있을 시간에, 헐렁한 반바지 차림인 채로. 친구들은 규호 아빠 직업을 두고 내기를 했습니다. 한 놈은 팔자 좋은 한량이라 했고, 다른 녀석은 서울 어느 가게에 대량으로 채소를 대는 농사꾼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주 용돈의 절반을 한량에 걸었습니다. 모두가 규호의 입만 바라봤습니다. “우리 아빠 건설회사 다녀. 아파트 공사현장을 감독해야 해서 출장이 잦은 편이고.” 내기 판돈을 가져간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1990년대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1980년대의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온 나라가 정비되고 살찌어가던 시대. 기업의 수출 활동은 본격화됐고 국민소득은 나날이 올랐으며, 자동차의 소유 역시 더 이상 특권이 아니었습니다. 자동차를 통한 문명화, 즉 한국의 본격적인 모터리제이션(motorization)은 이때부터라 해도 좋았습니다. 자동차는 가짓수뿐 아니라 종류도 다양해졌습니다. 세단은 작은 것과 고급의 구분이 더욱 명확해졌고, 스포츠 드라이빙의 열망을 담은 스포티 쿠페와 스포츠 모델 출시도 줄을 이었습니다. 




우리 머릿속에 ‘성공한 자의 표식’으로 각인돼 있는 찝차도 변화를 겪었습니다. 당장 전장을 누벼도 어색하지 않은 험로주파용 자동차에서 세상 모든 도로에 어울리는 전천후 승용차로 거듭난 것이지요. 이 의미 있는 변화의 한복판에 갤로퍼가 있었습니다. 당시는 지프형 자동차가 전부였던 터라 ‘다목적 승용차’라는 타이틀을 내건 갤로퍼는 그 등장만으로도 매우 신선했습니다. 제품 역시 광고에 걸맞은 모습이었습니다. 기술제휴를 맺은 원형 모델(미쓰비시 파제로)의 롱 보디 버전을 토대로 해 실내가 넉넉했고 저속부터 충분한 힘을 내는 디젤 엔진 덕분에 운전의 갑갑함도 적었습니다. 3열 의자를 둔 6인승 자동차라는 점도 빠지지 않는 장점이었습니다. 튼튼하고 질긴 ‘보디 온 프레임(프레임 위에 구동계와 차량의 외관을 얹은 형태)’ 구조를 기반한 험로주파 성능은 기본이었죠. 도로 환경을 가리지 않는 다목적 승용차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모습이었습니다.


시장은 빠르게 반응했습니다. 출시 첫해(1991년) 3개월 간 3000대 이상이 팔렸고 이듬해부터는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는 4WD RV의 지위를 차지했습니다. 갤로퍼 출시 이후 이와 비슷한 개념의 다목적 승용차가 잇따랐지만 무엇도 그 자리를 빼앗지 못했습니다. 1994년에는 누적 판매 10만대를, 1997년에는 20만대 판매를 돌파했습니다. 1990년대 4WD RV 시장의 맹주라 해도 과언이 아닌 성과였습니다.  




“갤로퍼요.” 지난해, 다시 만들어졌음 싶은 국산차가 있느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대한 저의 답이었습니다. 말한 제 자신도 깜짝 놀랐습니다. 국산차의 리바이벌이라면 1980년대 제품들에 관심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애틋하다거나 그립다고 말할 정도로 각별한 기억이 있는 자동차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제 입에서는 왜 반사적으로 “갤로퍼”라는 이름이 튀어나온 것이었을까요? 짚이는 바가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언젠가부터 갤로퍼라는 자동차가 현대자동차라는 브랜드를 완성하는 데 없어선 안 될 조각 중 하나라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현대자동차는 세계 자동차 역사에 있어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초고속 성장을 했습니다. 1990년 처음 100만대를 넘긴 전 세계 판매량은 최근 490만대 수준까지 확대됐고, 1970년대 단 하나의 독자개발 모델뿐이던 전시장엔 이제 전륜구동 소형차부터 후륜구동 고급세단과 다양한 크기의 SUV까지가 빼곡하게 전시돼 있습니다. 해외 기업에 기술을 빌려 쓰던 시절이 언제였나 싶을 만큼 기술 독립도 확실하게 이뤘습니다.


판매 규모나 제품의 가짓수, 기술력 등 정량적 측면에서 현대자동차는 이미 글로벌 톱 브랜드로 올라섰습니다. 여기에 브랜드의 가치를 더욱 값지게 만들어줄, 유산(heritage)과 같은 정서적 요소까지 더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유산은 선대가 물려준 사물이나 문화를 뜻합니다. 그 중엔 유익한 유산도 있고 해로운 유산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을 통해 브랜드의 깊이와 당위를 더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현대자동차에는 쏘나타나 아반떼, 그랜저 같은 훌륭한 헤리티지 모델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이 1990년대 이후의 성공한 세단 부류에 집중돼 있어 조금 아쉽습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거둬온 비약적인 성장사(成長史)를 감안하면 꺼내어 쓸 수 있는, 현대자동차라는 브랜드를 한층 비옥하게 만들어줄 유산이 얼마든지 더 있을 테니까요. 1990년대 국내에 ‘다목적 승용차’라는 시장을 열고 이후로도 오랫동안 시장의 강자로 군림해온 갤로퍼의 예처럼 말이지요. 




네, 갤로퍼는 그러기에 더할 나위 없는 현대자동차의 소중한 유산입니다. 2003년 이후 15년 여 자취를 감춘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요. 최근 SUV 시장의 양적·질적 성장에 비춰보면 갤로퍼의 부재는 더욱 아쉽습니다. 롱 보디와 숏 보디, 5인승에서 9인승까지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제품이 선보였던 과거를 활용해, SUV 서브 브랜드로 육성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에까지 다다르면 말이죠. 이런 아쉬움을 품고 있는 건 비단 저 하나만은 아닌 듯합니다. 차를 원래 상태로 되돌리고 싶어 사방에 흩어져 있는 부품을 그러모으는 오너들이 적지 않고, 심지어 현대식으로 개조한 갤로퍼를 수천만 원 가격에 판매하는 업체가 꾸준히 화제에 오르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글. 김형준

이 글을 쓴 김형준은 올해로 만 17년째 자동차 전문기자로 활동 중이다. 자동차 전문지 <카비전>과 <톱기어> 한국판, 남성지 <지큐>에서 일했다. 지난해 방영된 SBS <드라이브 클럽>의 고정 패널로 출연하며 자동차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냉철한 시각을 보여준 바 있다. 현재는 글로벌 자동차 전문지 <모터트렌드>의 편집장으로 자동차 문화에 대한 심도 깊은 기사를 만들고 있다. 



◆ 이 칼럼은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이며, HMG 저널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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