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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G 저널 Jul 12. 2017

여긴 오직 나만을 위한 공간이야

꽤 오래 전의 일입니다. 대학 시절 잠시 짝사랑했던 여자 동기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짝사랑을 끝낸 지는 오래고, 각자의 취업이나 이직, 연애 소식 같은 걸 주고받는 편한 친구 사이로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놀라운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조금 신경이 쓰입니다. “무슨 일 있어?” 제가 물었죠. 그러자 조금 뜸을 들이다가 “나, 오빠랑 헤어졌어.” 합니다. 5년 정도 연애를 하며 결혼 얘기도 나누던 사람이었는데, 아무도 몰래 1년 동안이나 바람을 피웠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군요. 뭐라고 위로해 줄 수 있을까, 속으로 말을 고르고 있는데 곧장 경쾌한 답변이 이어집니다. “그래서 내가 적금을 깨고 차를 사셨다 이말씀이다. 나와. 드라이브 가자!” 과연 그 차를 얻어 타도 괜찮을까 싶었지만, 새로 뽑은 차 구경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 앞섭니다. “오케이, 그럼 바다를 보러가자.”


그때는 제 주위에 운전하는 여자들이 좀 드물었습니다. 그래봐야 15년 전 쯤, 21세기가 막 시작된 때였지만 뭐, 그랬습니다. 익숙하게 도로를 달리는 그녀를 조수석에서 바라보니 왠지 낯설었습니다. 그리고 보기가 좋았습니다. “운전하는 거 보기 좋은데? 운전석에 앉아 있으면 어떤 기분이야?” 다시 생각하면 좀 이상한 질문이지만, 대견한 마음에 그냥 물어봤습니다. 당시의 저는 운전면허가 없었거든요. 그러자 그녀가 대답합니다. “응, 이상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나만의 방 같아. 버지니아 울프도 차가 있었으면 생각이 조금 바뀌었을 거야. 잘 샀어. 혼자서도 멀리 갈 수 있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나 도리스 레딩 같은 작가들과 작품들에 대한 농담을 하면서 깔깔대며 고속도로를 달렸습니다. 깔깔깔. 




사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본능적으로 ‘나만의 공간’을 필요로 합니다. 오로지 나만 존재하는,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내가 모든 것을 계획하고 운영하고 관리할 수 있는 공간. 예전에는 그게 ‘방’이었습니다. 특히 형제들과 떨어져 내 책상과 내 침대와 내 옷장이 있는 방. 그래서 집에서 독립해, 5평 남짓한 자취방을 구했을 땐 그저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습니다. 조금 나이를 먹자, ‘방’이 아니라 ‘집’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방 하나만 더 있으면 집이 될텐데, 생각하고 투룸 전세를 구하러 다녔습니다. 하지만 서울 한복판에서 전세를 구하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았습니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건대입구에서 신촌으로 가다보면 지상의 건물들이 화들짝 출현하는 구간이 있습니다. 손잡이를 붙잡고 ‘서울에 이렇게나 집이 많은데 내가 살 집은 없구나’란 생각을 몇 년 동안 했습니다.


제가 차를 산 것은 한참 뒤의 일입니다. 어쩌다보니 차를 사고, 어쩌다보니 차에서 시간을 오래 보내게 되었습니다. 틈날 때마다 서울 근교로 드라이브를 가고, 7번 국도를 따라 첫 번째 장거리 여행을 하고, 운전석에 몸을 구긴 채 쪽잠을 자고,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들어가 큰 소리로 음악을 듣고, 그러면 새삼스레 몇 년 전 대학 동기의 차를 얻어타고 변산반도까지 가서 이름모를 손바닥만한 해변에 앉아 석양을 보던 저녁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이 차는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나만의 방 같아’라던 친구의 말을 기억하곤 피식 웃기도 했군요. 




그래서인지, 제게 ‘차를 가진다는 것’은 조금 다른 의미였던 것 같아요. 보통은 자동차가 이동이나 생계 혹은 과시를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지만 제게 자동차는 ‘공간’ 혹은 ‘장소’였단 생각을 합니다. 저는 운전석에 앉아 정말로 편안하고 안락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딱히 운전을 하지 않아도, 운전석에 홀로 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안정감을 줬습니다. 


네, 저는 정말 차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게 보통의 뜻과는 조금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누군가가 타는 자동차를 통해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경차, 세단, SUV, 스포츠카, 캠핑카... 혹은 스테디셀러 차량, 튜닝카 등의 방식들을 통해 오너의 라이프스타일 뿐 아니라 가치관까지 짐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게 자동차는 나를 설명하는 수단이라기보다는 내가 존재하는 그 자체에 대한 개념에 가깝습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리나요? 




이렇게 생각해보죠. 우리는 늘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마트폰 얘기가 아니에요. 가족, 직장동료, 연인, 알고 있는 사람과 알 것도 같은 사람이 온통 주위에 있습니다. 그들과 대화를 하고, 감정을 나눕니다. 그게 인생이죠. 네, 종종 피로하고 힘겹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우리는 잠시라도 오로지 혼자 있어야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인간이란 그런 존재입니다.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야 세상과 연결될 수 있는 존재. 누군가에게 그건 자기만의 방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낯선 장소이기도 할 겁니다. 제게 그것은 자동차의 운전석이에요. 거기에 앉아 있으면 단단한 프레임 안에 안락하게 갇힌 기분이 듭니다. 물론 스마트폰도, 내비게이션도, 인포테인먼트 시스템도 모두 켜져 있지만 어째서인지 운전석에 앉아 스티어링 휠을 잡으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한 줌 시간을 손에 쥔 것 같습니다.


그와 동시에 저는 제 몸이 자동차와 연결된 것 같은 기분도 느낍니다. 다소 뜬금없겠지만, ‘마징가 제트’를 창조해낸 나가이 고라는 만화가는 자신이 운전하던 차가 앞 차와 충돌하는 위기의 순간에 ‘기계와 인간의 결합’이라는 개념을 고안했습니다. 마징가 제트의 머리 위로 작은 비행선이 도킹되면서 인간과 로봇이 연결되는 그 장면을 말이죠. 


실제로 비좁은 조종석과 운전석은 닮았습니다. 손만 뻗으면 스위치를 온오프할 수 있는 전자 시스템과 약간의 힘만으로도 고속으로 움직일 수 있는 머신. 물론 우리가 조종하는 것은 거대 로봇이 아닌 자동차입니다. 저는 운전석에 고독하게 앉아있을 때 내 감각이 확장되는 걸 느낍니다. 시속 60km 혹은 500km로 질주하는 위험한 기계장치에 들어가 있지만 역설적으로 ‘안전함을 느낀다’는 건 아마 그런 감각 때문일 겁니다. 여기에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말이죠. 




그런 점에서 저는 차를 좋아합니다. 제 차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제 마음에 쏙 드는 차를 가졌다는 사실에 만족합니다. 주말이나 휴가에 혼자 차를 몰고 서울에서 강원도로, 강원도에서 경상도로,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옮겨다니는 시간들이 그저 좋습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자동차로 유럽을 한 바퀴 돌고 싶다는 꿈도 그래서 꾸게 됩니다. 갑자기 어느 자동차 회사가 주창했던 ‘자동차에서 삶의 동반자로(Lifetime partner in automobiles and beyond)’라는 슬로건이 생각나네요. 21세기의 자동차는 단순한 이동수단이 아닌 삶을 위한 또 하나의 공간이자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저는 차가 없으면 정서적으로 만족할 수 없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15년 전 쯤, 헤어진 애인에 대한 분노를 적금통장에 꾹꾹 눌러담아 대리점으로 달려가 현찰로 한 방에 새차를 사버렸던 바로 그 친구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날 변산반도에서 노을을 보고는 저녁 밥도 안 먹고 곧장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하마터면 어두컴컴하고 지저분한 모래사장에서 다시 고백할 뻔했는데, 참으로 다행이었죠. 그녀는 몇 년 뒤 그녀밖에 모르는 바보를 만나 결혼해서 잘 살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운전을 하지요. 뒷좌석에 아이들을 태우고 말입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후배들, 특히 여자후배들이 ‘결혼해서 독립하고 싶다’고 하면 ‘결혼 따위 하는 대신 그 돈으로 좋은 차를 사라’고 조언하는 아저씨가 되었습니다. 







글. 차우진(문화평론가)
차우진은 1999년부터 <씨네21>, <보그> 등 다양한 매체에 글을 쓰며 음악 및 문화평론가로 활동했다. '딩고'로 알려진 메이크어스의 콘텐츠 이사였으며, 현재는 다양한 모바일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 이 칼럼은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이며, HMG 저널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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