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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G 저널 Aug 16. 2017

추억의 차, 엑셀을 돌아보다

최초의, 최초에 대한, 최초를 위한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묘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세피아 톤의 흐릿한 느낌이지만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도 사진처럼 찍혀 있는 선명한 장면, 귓가에 울리는 소리, 코를 간질이는 냄새가 있죠. 이것들이 한 데 어울려 과거의 한 시대가 머릿속에 인화됩니다. 그리고 저의 기억 속에는 항상 자동차가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낚시를 좋아하셨던 저의 아버지는 ‘승용차=세단’의 공식이 강했던 당시로써는 파격적이었던 포니 엑셀, 그것도 짙은 자주색 모델을 타셨습니다.

차의 뒷자리에 앉으면 트렁크에서 스물스물 넘어오던 고무보트의 냄새, 저수지에서 한참을 살았을 붕어와 잉어의 비릿함이 섞여 이루던 묘한 냄새가 솔솔 피어올랐습니다. 밤새 수면을 응시하며 사투를 벌였지만 물고기 얼굴도 구경하지 못했던 일요일 아침,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졸음을 쫓기 위해 크게 틀었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음악까지, 모든 것이 하나의 장면처럼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기억은 펄이 들어가 화려한 오렌지색이었던 프레스토로 이어집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앞바퀴굴림 자동차로 1985년 데뷔했던 포니 엑셀은 해치백이었고, 그 해 8월에 나온 세단형 모델 프레스토의 최고급 1.5 수퍼 모델이 그 해 겨울 우리 식구가 되었습니다. 새 차를 샀다는 즐거움도 잠시, 아버지는 포니 왜건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좁은 트렁크 때문에 고무보트를 실을 수 없다고 하셨고, 그걸 핑계 삼아 자주 가시던 강원도 파로호(화천호)에 낚시 배를 사야 할 당위를 주장하셨습니다. 몇 번의 투덜거림 끝에 결국 얻어낸 나무배를 자랑스럽게 보여주던 아버지를,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복잡 미묘한 얼굴로 바라보던 어머니의 표정은 아마 그 이전에도 혹은 그 이후에도 볼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반면 자동차라는 기계로 봤을 때 포니 엑셀/프레스토는 이전의 차와 비교해 여러 첨단 장비들을 장착하며 확실히 한 등급이 올라간 자동차였습니다. 겉모습을 보자면 지붕 주변에 물받이가 없어 보디 전체가 매끈했고, 엔진을 가로로 얹은 구조 덕에 차 바닥 위로 솟은 드라이브 샤프트가 없어 실내가 넓었습니다. 조명식이 아니라 투과식이었던 계기판에는 엔진 회전수를 나타내던 타코미터가 있었고, 스위치로 창문을 올리고 내릴 수 있는 파워 윈도우도 있었죠. 소형차에서는 처음 보는 장비들이었습니다.




특히 엔진 동력을 앞바퀴에 전달하는 방식은, 눈 쌓인 겨울철에 확실한 효과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더 좋아진 연비는 5단 기어를 만나 확실한 우위를 보여줬죠. 고속도로를 질주하며 ‘5단 기어여서 확실히 빠르단 말야’라며 한 마디를 던지시던 아버지의 그 목소리. 포니 왜건을 탈 때와는 달리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흐릿하게 흘러가는 창 밖 풍경이 그 말을 증명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후 아버지는 북미 수출형의 두툼한 5마일 범퍼(충격 흡수력이 월등한 폴리우레탄 재질을 내장한 범퍼. 시속 5마일(약 8km/h)의 속도로 부딪혀도 범퍼가 모든 충격을 흡수하면서 원상태로 복귀된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를 끼우는 등 최신 모델의 분위기까지 내려고 노력했습니다. 당시 유행이었던 휠 하우스와 도어 스텝 아래를 감싸던 크롬 장식은 ‘화려하면 천박해 보인다’는 지론을 가졌던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튜닝이었을 겁니다.




물론 포니 엑셀과 프레스토는 우리나라에서만 인기를 끈 것은 아니었습니다. 데뷔한 다음해인 1986년, 현대자동차 모델 중에는 최초로 미국에 수출된 차기도 했습니다. 당시 미국에 거주하시던 저의 작은 아버지는 여러가지 이유로 현대 엑셀에 놀라셨다고 했습니다. 고향인 대한민국의 그 현대자동차라는 사실에 한 번, 합리적인 성향의 미국인들이 싼 값에도 적당한 크기의 차체와 연비가 좋아 일본차보다 낫다고 할 때 또 한번 놀라셨다고 말이죠. 한국에서는 아버지에게, 미국에서는 작은 아버지에게 프레스토와 엑셀은 다른 의미의 자랑거리였던 것이지요.




1989년, 경제 성장에 따라 더 큰 차를 원하던 아버지께서는 쏘나타를 구입하셨습니다. 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며 ‘나도 출퇴근에 차가 필요하다’는 강력한 주장을 펼친 어머니는 그 이듬해 본인만의 차로 엑셀을 들이셨죠. 특히 보트 사건 이후 잔뜩 벼르던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의 쏘나타 수준의 편의장비에 더해 자동 변속기를 필수로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서 엑셀 세단 중에서도 가장 높은 등급의 TRX(Top Range Excel)을 선택하게 되었죠. 그렇게 어머니의 엑셀은 앞뒤 파워 윈도우와 자동 변속기, 전자식 오디오와 파워 스티어링 같은 첨단(?) 사양이 포함된 TRX 모델에 짙은 회색으로 중후한 멋을 뽐냈습니다. 

엑셀은 그런 차였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앞바퀴굴림 자동차였던 포니 엑셀/프레스토의 뒤를 이어 3년 만인 1989년에 데뷔했죠. 요즘 같으면 한 모델이 7~8년은 족히 이어지지만 당시에는 이렇게 짧게 새 차가 나와야만 했습니다.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 올림픽을 거치며, 5월의 장미처럼 경제는 화려하게 피어 올랐고, 이런 활황에 힘입어 다양한 경쟁 모델이 나오면서 포니 엑셀과 프레스토로는 돌아서는 소비자를 사로잡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 후반의 소형 자동차 시장을 이끌고 있었던 건 현대 포니 엑셀, 기아 프라이드, 대우 르망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포니 엑셀과 프라이드는 여전히 ‘해치백’이라는, 차체 형식에 대한 사람들의 불신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좀 나아졌습니다만) 해치백 스타일은 패밀리 카라는 느낌보다 짐차의 느낌이 강했고, 당시만 해도 꼬리(트렁크)가 없어 안전도가 불리할 것이라는 선입견도 있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해치백인 포니 엑셀보다 세단형인 프레스토를 선호했고, 신형 엑셀 역시 세단형 모델이 더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1989년 출시된 2세대 엑셀은 1988년 출시되어 큰 인기를 끌었던 Y2 쏘나타를 닮은 스타일, 기본에 충실한 인테리어와 주행력으로 시장에서 큰 호응을 얻습니다. 이 모든 요소들이 소형차인 엑셀을 꽤 고급차로 보여지게 했죠. ‘중후하고 고급스런 디자인’으로 오너의 신분을 업그레이드시켜 주는 것, 바로 그 점이 2세대 엑셀의 포지셔닝이었고 전략은 성공했습니다. 경제 성장으로 마이카 붐이 일면서 구매력 있는 3-40대 소비자들이 첫 차로 엑셀을 선택하기 시작했고, 중형차의 크기와 값이 부담스럽지만 소형차를 뛰어넘는 고급스러움을 소유하고팠던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특히 겉모습은 정통 세단의 모습을 갖춘 3박스 스타일에 모서리를 다듬은 에어로 다이내믹(Aero Dynamic)을 적용했습니다. 당시 큰 인기를 끌었던 쏘나타를 닮아 ‘리틀 쏘나타’라는 별칭으로 불린 엑셀 세단은 몬드리안의 추상화가 떠오르는 테일 램프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빨간색과 노란색, 흰색 사이를 굵은 검정색 선이 가르는 그 형태는 지금 보아도 독특한 디자인입니다.




물론 2세대 엑셀은 포니 엑셀/프레스토와 비교해도 기계적으로 한 단계 더 발전한 차였습니다. 경쟁 모델들이 기계식 3단 자동변속기를 얹던 시절, 엑셀은 중형차에서나 볼 수 있었던 전자식 4단 자동변속기를 최고급형인 TRX에 갖추고 있었으니까요. 여기에는 고속 주행 때 엔진 회전수를 낮춰 연비를 높이는 것은 물론 조용하게 달릴 수 있게 하는 오버드라이브(Over Drive) 기능도 있었습니다. 자동변속기 레버에 달린 오버드라이브 온/오프 스위치를 보고 ‘이게 무슨 기능일까’ 싶었던 궁금증은 제게 자동차 공부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MPI 역시 소형차에서는 최초로 쓰였던 기능입니다. 엔진을 좀 더 정밀하게 제어하기 위해 컴퓨터가 각 실린더마다 따로 연료를 분사하는 방식으로 연비를 높이는 것은 물론 뛰어난 출력을 발휘했죠. 제가 운전 면허를 취득한 후 공식적인 첫 운전은 아버지의 Y2 쏘나타 수동이었지만 어머니가 타셨던 엑셀 세단은 대학 시절을 포함해 사회 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 저와 함께 하며 더 많은 추억을 남겼습니다. 비록 ‘엄마 차’기는 했지만, 수동 기어를 얹은 데다 더 가벼웠던 경쟁사 해치백을 타던 친구 차를 가볍게 추월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팔당에서부터 양수리를 지나 청평으로 이어지는 드라이브 코스를 달리며 엑셀을 통해 운전의 즐거움까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엑셀/프레스토는 ‘최초로 미국에 수출된 현대자동차’라는 타이틀도 가지고 있습니다. 1985년 판매를 시작해 그 해 16만대가 넘게 팔리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죠. 이는 데뷔 첫 해를 기준으로 아직까지 깨어지지 않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으며 판매량이 날로 늘어갔습니다. 1984년 총 123,110대를 생산했던 현대자동차는 포니 엑셀과 프레스토가 데뷔한 85년에는 225,970대를 생산해 무려 10만대가 늘어났고, 본격 수출을 시작한 86년에는 408,177대, 87년에는 544,648대까지 늘어 무려 300% 이상 성장했습니다. 엑셀과 프레스토가 지금의 현대자동차를 있게 한 주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최초’라는 이름의 무게를 생각해 봅니다. 남들이 가지 않았던 길을 처음으로 개척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낯선 것을 싫어하는 소비자의 성향은 물론이고 제조사 내부에서도 수많은 설득의 과정을 거쳐야 하죠.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의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엑셀은 ‘최초’라는 단어가 통과해야 할 지난한 과정을 잘 헤쳐나온 모델입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앞바퀴굴림 자동차이자 최초의 MPI 다중 분사 엔진, 최초의 4단 전자식 변속기 등 우리나라 자동차 역사에서 ‘최초’라는 이름이 붙을 수 있는 많은 기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 기억 속의 첫 자동차라는 개인적인 의미는 그보다 50배쯤 더 큽니다. 엑셀은 아버지에게는 낚싯배를 선물해준 차였고, 어머니에게는 혼자만의 공간을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운전의 즐거움과 자동차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게 만든, 고마운 차였습니다. 하긴, ‘최초’가 또 뭐 그리 중요한 일일까요. 저에게 이만큼의 추억을 남겨줬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죠. 차곡차곡 쌓여 있는 그 추억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니까 말입니다.






글. 이동희

필자는 <자동차생활>에서 자동차 전문 기자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티뷰론 일기”, “69년식 랜드로버 복원기” 등 큰 화제를 불러모았던 기사를 쓰며 이름을 알렸다. 이후 크라이슬러 코리아와 재규어 랜드로버 코리아 등에서 영업 교육, 상품 기획 및 영업 기획 등을 맡았으며 딜러로 자리를 옮겨 영업 지점장을 맡았다. 현업의 경험과 이론을 모두 갖춘 칼럼니스트 및 컨설턴트로 활동 중이다. 


◆ 이 칼럼은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이며, HMG 저널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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