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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G 저널 Aug 25. 2017

어두워지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심야의 드라이빙을 좋아하세요?

헤드라이트 불빛이 닿는 곳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깜깜합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라는 게 이런 거였군, 싶습니다. 계기판이 가리키는 속도는 시속 95km.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지만, 누군가 밖에서 저를 본다면 굉음과 함께 쌩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겠죠. 라디오에서는 마침 듣기 좋은 음악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볼륨을 조금 높여봅니다. 지금은 새벽 2시. 너무나 한적한 평일의 새벽입니다.




심야에 혼자 운전하는 걸 좋아합니다. 특히 평일 밤에 어디론가 멀리 떠나는 걸 좋아합니다. 이유를 묻는다면 글쎄요, 그저 혼자 있는 그 시간이 좋다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코스는 다양합니다. 경부고속도로를 탈 때도 있고 46번 국도를 따라 강원도를 향할 때도 있습니다. 국도보다 고속도로를 더 좋아하긴 합니다. 심야의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정말로 혼자 남겨지는 때’가 오거든요. 서울 톨게이트를 지나친 후 주위를 둘러보면 오로지 나 홀로 이 캄캄한 어둠 속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새삼 알아차립니다.




저는 그 순간이 정말 좋습니다. 속도를 높여 질주하는 느낌으로 달리기보다 일정한 속도로 30분, 한 시간, 혹은 두 시간 내내 달릴 때의 그 느낌 말이죠. 그러다가 휴게소에 들르게 되죠. 새벽 2시 혹은 3시의 고속도로 휴게소에 가면, 굉장히 황량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거기엔 낮의 활기와 분주함 대신 피로한 정적이 가득합니다. 우동을 파는 가게 하나만 달랑 영업중이거나 그마저도 없는 경우도 많죠. 손님은 한 손에 꼽을 만큼 적습니다. 다들 테이블에 조용히 앉아 무언가를 먹거나 졸음에 지친 얼굴로 잠시 쉬고 있죠. 저는 이 새벽의 고속도로 휴게소 풍경을 꽤 좋아합니다. 낮에는 드러나지 않던 사연들이 머물고 있는 것 같아서입니다. 밤이란 참 신기한 시간이라서, 종종 우리가 낮에는 보지 못하던 것들을 슬쩍 엿볼 수 있게 합니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묘한 기분이 마음을 잘 쓰다듬어줍니다.

 

서울에서 출발한 지 이제 3시간. 목적지는 전남 완도입니다. 완도에서 차를 배에 싣고 제주도에 갈 생각이거든요. 앞으로 3시간은 더 가야 하는데, 새벽이다 보니 더 빨리 갈 수 있을지, 좀 더 늦게 도착할 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제주도로 가는 배는 아침 7시에 출항하기 때문에 적어도 그 전까지는 완도항에 도착해야 합니다. 빠듯해진 시간 탓에 긴장되는 마음이 새벽의 느슨한 기운에 빠져 있던 제게 각성제가 됩니다.




심야의 고속도로에는 가로등이 없는 구간이 꽤 많습니다. 그 어둠 속을 달리다 보면 간간히 몇 대의 차량을 만나기도 하죠. 상황이 상황인지라 왠지 동료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무슨 일 때문에 이 시간 이 곳을 달리는지 알 수 없지만, 그저 함께 달리는 것 자체만으로 왠지 모를 유대감 같은 것이 생겨납니다. 그렇게 나란히 달리던 차가 고속도로 출구로 슥 빠져나가면 혼자 중얼거리기도 하죠. “잘가라, 안녕” 나도 모르게 저 차가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하기를, 내일도 잘 달리기를 응원하게 됩니다.




운전하는 동안에 음악은 크게 틀어 둡니다. 지역의 경계를 넘어서거나 산을 돌아갈 때면 라디오의 주파수가 바뀌게 됩니다. 채널을 돌려가며 심야를 깨우는 DJ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나같이 낯선 목소리지만 괜히 친근합니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어둠 속을 달려나갑니다.


새벽의 고속도로는 어째서인지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인생은 어떤 트랙에 올라서면 웬만해선 쉽게 내려갈 수 없습니다. 속도를 조금 늦추거나, 차선을 바꿔타는 것 정도가 대부분이죠. 올라탄 이상 쭉 가야만 합니다. 계속 그 길을 달려나가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상황에 대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정말로 빠질 때가 다가오면 그 길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름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표지판을 보고 속도를 점검하며 전방 5km 앞에 있는 출구를 향해 나가야 합니다. 그곳을 놓치면, 다음 출구가 나올 때까지 또 앞으로 계속 달려야 합니다.




애정과 미움을 주고받으며 어쨌든 여기까지 오게 된 시간들이 어쩐지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이제까지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 내가 사랑했음에도 함께 하지 못했던 사람들, 내게 상처를 줬던 사람들, 내가 상처를 줬던 사람들, 오해하고 오해받은 사연들. 낮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입니다. 그러다가 피로해지면 졸음쉼터에 차를 세우고, 차 밖에 나가 기지개를 켭니다. 그러는 동안 또 몇 대의 차량이 빠른 속도로 나를 지나칩니다. 저는 이 길에 혼자 서 있습니다.


심야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일이란, 자기 자신을 쓰다듬어 껴안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글. 차우진

차우진은 1999년부터 <씨네21>, <보그> 등 다양한 매체에 글을 쓰며 음악 및 문화평론가로 활동했다. '딩고'로 알려진 메이크어스의 콘텐츠 이사였으며, 현재는 다양한 모바일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사진. 주태환



◆ 이 칼럼은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이며, HMG 저널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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