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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G 저널 Oct 12. 2017

내연기관 자동차의 미래를 보다

이동수단에서 감성적 기호품의 영역으로

ⓒ concorso d'eleganza villa d'este



제 필름 카메라는 지금 어디 있을까요?


70년대 초반에 태어난 저는 대학 들어가 사진 동아리 활동을 시작하며 카메라를 알게 됐습니다. 당연히 필름 카메라였죠. 필름 끼우는 법, 노출 보는 법을 배운 다음 아버지 카메라를 들고 출사를 나갔습니다. 그날 이후 사진은 저의 자랑스런 취미가 됐습니다. 선배들로부터 혹독하게 교육 받은 다음에야 암실에 들어가 필름을 현상하고 사진을 인화할 수 있었습니다. 흑백 사진은 신세계였어요. 정신 없이 암실 작업을 하다 보면 어느새 새벽 닭이 울었죠. 


그리고 21세기와 함께 디지털 카메라 시대가 열렸습니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사진 찍는 재미에 눈을 떴죠. 하지만 전 꿋꿋하게 가방에 ‘똑딱이’ 필름 카메라를 넣어다녔어요. 필름으로 이미지를 만들고 그걸 인화지로 뽑아 보관하는 방식이 익숙했고, 즐거웠기 때문이죠.


하지만 결국 디지털 카메라를 구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필름을 파는 곳도, 그걸 현상하고 인화해주는 곳도 찾기 힘들어졌거든요. 저도 변했죠. 시간과 돈을 들여 필름으로 만든 사진을 앨범에 꽂는 것보다 디지털 카메라로 여자친구를 찍어주고 LCD창으로 그걸 함께 넘겨보는 게 더 즐거워졌으니까요. 제가 사용했던 마지막 필름 카메라는 지금 어디 있을까요?





LP 역시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아직 수십 장의 LP가 서가에 꽂혀 있으니 LP를 완전히 버린 건 아닙니다. 하지만 턴테이블이 없으므로 제 LP는 필름 카메라처럼 겨울잠에 들어 있는 셈입니다. 고등학생 땐 LP를 한 장 두 장 늘려가는 재미로 살았습니다. 얼마나 소중했으면 LP를 살 때마다 비닐 커버에 견출지를 붙이고 일련번호, 구입처, 가격까지 적어 넣었을까요. 처음 LP를 보기 힘들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던 건 군대였습니다. 저희 내무반에는 휴가자가 복귀할 때 최신 가요 LP를 사오는 전통이 있었죠.

그런데 언젠가부터 휴가 복귀자들은 ‘음반 가게에서 LP를 안 팔아 CD를 사왔다’고 보고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제대하고 나서야 그들의 말이 사실임을 알았죠. 음반 가게마다 빽빽하게 꽂혀있던 LP가 잘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저도 어쩔 수 없이 LP대신 CD를 구입하기 시작했습니다.

LP와의 이별은 필름 카메라와는 달랐어요. 카메라는 제 의지로 필름에서 디지털로 이동한 거였지만 음반은 더 이상 LP가 나오지 않았기에 CD로 바꾼 거니까요. 하지만 LP가 계속 생산됐다 해도 재생, 보관, 휴대가 더 편하고 객관적인 음질도 더 뛰어난 CD 대신 LP를 구입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토매틱 시계는 더 애용하고 있습니다

저의 음반과 카메라 편력은 기술 진보에 따른 산업 변화와 발을 맞춰왔습니다. 그런데 시계는 제가 처음 손목 시계를 찼을 때부터 달랐습니다. 손톱보다 작은 톱니바퀴들과 태엽의 힘으로 돌아가는 수 백 년 역사의 오토매틱(기계식) 시계와 액정의 숫자로 시간을 보여주는 20세기 기술의 디지털 시계가 공존했습니다. 저의 첫 시계는 독수리 5형제가 그려진 빨간색 나토 스트랩의 오토매틱 시계였어요. 하지만 그때 초등학생 사이에선 카시오의 전자 시계가 ‘짱’이었습니다. 중동에서 돌아오신 작은아버지는 제 손목에서 투박한 독수리 5형제 시계를 벗긴 후 유행하던 카시오 전자 시계를 채워주셨습니다.

사실 이건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수백년 시계 기술의 진보가 찰나에 일어난 셈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 제 손목 시계들은 시계 기술의 진보를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GPS를 장착한 디지털 시계가 망가지면 그 이전 세대 기술로 만든 쿼츠 시계를 구입하곤 했으니까요. 외려 사회인이 된 후로는 시계 기술 역사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21세기 초의 저는 타임 슬립이라도 한 것처럼 오토매틱 손목 시계에 빠지기 시작했어요. 사실 오토매틱 시계는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물건일지도 모릅니다. 전자식 시계보다 훨씬 무겁고, 때마다 크라운을 돌려 태엽을 감아주지 않으면 멈춰버리고 말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왜 오토매틱 시계에 빠지게 된 걸까요. 

시계 산업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은 효율과 첨단 기술이 아닙니다. 첨단 디지털 시계는 더 정확하고 더 가볍지만 오토매틱 시계만큼 비싼 값을 받지 못하죠. 저를 비롯한 많은 남자들이 훨씬 더 비싼 가격을 치르면서 오래된 기술로 만든 오토매틱 시계를 사는 건 그 안에 기계적인 감성, 흥미로운 스토리, 사회적인 인정, 더 높은 환금성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내연기관 자동차와 헤어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엔진을 얹은 내연기관 자동차는 어떻게 될까요? 저는 필름 카메라와 LP가 그랬던 것처럼 내연기관 자동차를 떠나게 될까요? 아니면 오토매틱 시계처럼 더 애용하게 될까요? 사실 자동차는 음반이나 카메라, 시계와는 좀 다릅니다. 같은 기호품으로 분류하더라도 훨씬 비싸죠. 저에게는 집 다음가는 재산 목록 2호인만큼 버릴지 말지를 취향, 감성, 실용성, 경제성 등 다양한 관점으로 따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세 달 전에 직렬 4기통 엔진을 가진 자동차를 구입했습니다. 평소에는 부드럽지만 엑셀러레이터를 꾹 눌러 밟으면 ‘그르렁’ 소리를 내며 맹렬히 폭발하는 엔진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요. 하지만 저는 요즘 어렴풋이 느끼고 있습니다. ‘나의 다음 자동차는 아닐지 모르지만 그 다음 자동차는 엔진이 없는 순수 전기 자동차가 되겠지?’ 

네, 저에게 내연기관 자동차는 제2의 필름 카메라가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제가 아련하거나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아닙니다. 전기 모터를 만나는 게 기대되기도 하거든요. 얼마 전 아이오닉 일렉트릭을 타봤는데, 무척 신기하고 재미있었습니다. 연료 걱정 없이 오른발에 마음껏 힘을 줘도 되고, 그때마다 전기 자동차는 마치 우주선처럼 ‘슈웅’ 소리를 내며 앞으로 달려나가더군요. 새로운 체험이었어요. 전기 모터에도 나름의 재미와 맛이 있더군요. 때맞춰 시대에 발빠르게 대응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전기 자동차는 내연기관 자동차보다 환경에도 좋고, 가격도 이제 내려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아마 저는 적당히 슬픈 표정은 짓겠지만 결국 엔진에게 손수건을 흔들고 전기 모터를 만나러 갈 겁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완전히 잊혀질까요? 

카메라가 필름에서 디지털로 바뀌고, 음반이 LP에서 CD로 넘어간 뒤 이제 파일로만 남게 된 건 새로운 기술이 더 높은 효율을 만들었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모든 비효율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그 비효율적인 기술과 함께 감성과 애착을 키워온 사람들은 그걸 쉽게 못 잊죠. 저도 그렇습니다. 

음악 파일은 손에 잡히지 않으니 도무지 내 것 같지가 않아 CD를 구입해 음악을 듣습니다. 턴테이블도 들여놓고 싶어요. 그 위에 LP를 올려 놓고 아날로그 감성에 푹 빠지고 싶습니다. 사진도 그래요. 더 나이 들어 은퇴하면 집안에 흑백 필름 현상, 인화 장비를 설치해놓고 흑백 사진 찍는 재미에 다시 한번 빠지고 싶어요. 마찬가지로 자동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친환경차 시대에도 기꺼이 엔진 자동차를 즐길 겁니다. 한 40년 후 엔진 자동차를 타는 건 요즘 클래식 자동차 관리하는 것만큼 돈이 많이 들고 수고로울지 모르죠. 엔진 오일도 귀하고 각종 부품도 미리 사둬야 하니까요. 그러니 미래의 엔진 자동차는 호사스러운 취미, 오너의 우아한 취향을 보여주는 도구, 부의 상징이 될 지도 모릅니다. 





스위스 시계 업계의 사례를 생각해보죠 

하지만 저는 엔진 자동차가 더 화려하게 날아오를 수 있다고 봐요. 자동차 회사들이 스위스 시계 업계의 사례를 잘 벤치마킹 하면 산업 규모는 어쩔 수 없이 작아지지만 이윤은 더 높아지는 반전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예컨대 1980년대 일본 쿼츠 시계의 공습으로 스위스 오토매틱 시계 업계는 고사 위기에 처합니다. 쿼츠 시계는 오토매틱 시계보다 훨씬 가볍고, 정확하고, 저렴했기 때문이죠. 오토매틱 시계가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스위스 시계 메이커들은 오토매틱 시계를 ‘현대적인 공예 작품’으로 부활시키며 힘든 시기를 넘겼고 많은 이윤을 남기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스마트워치의 공세도 꿋꿋이 버티며 한편으로는 아날로그 시계에 디지털 기술을 이식하고 있지요. 

스위스 시계 브랜드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동차 회사들도 엔진을 하나의 작품으로 조명하고, 그 작품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온갖 노력과 흥미로운 이야기를 알리고, 내연기관만의 감성에 공감하게 하면 엔진 자동차가 ‘제2의 스위스 아날로그 시계’가 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을까요? 슈트 소매 사이로 언뜻 명품 오토매틱 시계가 보이면 그 사람을 다시 보게 되는 것처럼 가까운 미래의 우리는 힘찬 배기음을 내며 올림픽도로를 달리는 엔진 자동차 운전자를 부러워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언제 돈 벌어서 저렇게 멋진 엔진 자동차 한 대 사지?”



ⓒ Pebble Beach Concours d'Elegance



내연기관 자동차는 맞춤형 슈트가 될 지도 모릅니다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이제 곧 전세계의 도로를 누빌 친환경 자동차는 대중을 위한 기성복이 되고 엔진 자동차는 소수를 위한 맞춤복이 되는 겁니다. 내연기관 자동차는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몸에 딱 맞게 만들어주는 비스포크 슈트(Bespoke Suit)가 되는 거죠.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 제가 많은 돈을 벌면 한 30년 후쯤에는 이런 흐뭇한 풍경을 연출해보고 싶네요. 

베테랑 자동차 장인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모터 아틀리에’라는 가상의 공간에 가서 엔진 자동차를 주문하는 겁니다. “여기 엔진 장인이 잡지에 나오신 거 봤소. 난 예전부터 6기통 3.0리터 가솔린 엔진을 좋아했지. 적당히 부드럽고 힘도 모자라지 않거든. 시내 주행을 많이 하니까 낮은 rpm에서 마력 좀 쓰게 세팅해줘요. 아내가 변속 충격을 싫어하니까 변속기는 10단 이상으로 물려주시고.” 그렇게 주문을 넣고 수공으로 만든 엔진 자동차를 타고 그 옛날 델리스파이스의 노래를 듣는 기분은 어떨까요? 

“기다릴게 언제라도 출발할 수 있도록 항상 엔진을 켜둘게.” 







글. 송원석
필자는 <에스콰이어>, <지큐>, <루엘> 피처 에디터를 거쳐,  <젠틀맨> 의 편집장을 지냈다. 세상의 온갖 좋은 것들을 두루 경험했지만, 정작 오래된 것들이 주는 고전적인 낭만을 더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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