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WRC 스페인 랠리에서 현대 월드랠리팀이 더블 포디엄을 달성했다
스페인 랠리는 랠리 카탈루냐(Rally Catalunya)라고도 불린다. 이 랠리의 특징은 WRC 유일의 그레이블-타막(포장-비포장) 복합 노면이라는 점. 잠시 다른 노면을 달리는 경우는 드물지 않지만, 스페인의 경우는 첫날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나머지는 포장도로에서 경기를 치르는 독특한 방식이다. 덕분에 첫날을 마친 후 서스펜션과 댐퍼, 드라이브 트레인까지 타막용으로 완전히 교체하는 작업은 스페인만의 독특한 볼거리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로 인해 번거로움을 피해야 하는 상황이라 올해는 전부 타막 랠리로 구성을 바꾸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스페인 랠리는 2002년부터 2009년까지 타막 랠리였다.
1957년 시작돼 1975년 유럽 랠리 챔피언십(ERC)의 일부가 된 스페인 랠리는 1991년부터 WRC에 편입되었다. 이 경기에서 가장 많이 우승했던 드라이버는 2005~2012년을 휩쓴 세바스티앙 로브 (Sebastien Loeb). 현역 중에서는 도요타팀의 세바스티앙 오지에(Sebastien Ogier)가 3번 우승했다. 코로나 사태로 지난해 중단됐던 스페인 랠리에서 가장 최근의 2019년 우승자는 현대팀의 티에리 누빌(Thierry Neuville). 2019년 당시 포디엄에는 당시 도요타팀 소속이었던 오트 타낙(Ott Tanak), 현대팀의 일원인 다니 소르도(Dani Sordo)가 있었다. 바로 올해 스페인에 출전하는 현대팀 3인방이다.
현대팀에 있어 2019년 스페인 랠리는 기분 좋은 랠리로 남아 있다. 당시 누빌과 소르도의 활약으로 더블 포디엄을 달성한 현대팀은 2위 도요타팀을 18점 차이로 앞서며 시즌 최종전을 앞둔 상황에서 제조사 타이틀 종합우승의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최종전이었던 호주 랠리가 산불로 취소되면서 현대팀은 WRC 진출 이후 최초의 제조사 타이틀 종합우승을 확정지을 수 있었다.
2년 만에 부활한 스페인 랠리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지중해와 맞닿은 카탈루냐의 아름다운 항구도시이자 휴양지인 살로우(Salou)에서 열렸다. 서비스 파크는 살로우의 관광 명소 중 하나인 포트 아벤투라 월드 테마파크(PortAventura World theme park) 바로 옆에 마련됐다.
엄청난 스피드 경쟁이 벌어지는 타막 랠리는 서킷 경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코너를 효율적으로 커팅해야 기록이 단축되지만,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몰았다가는 도로 가장자리에 긁혀 타이어가 터지기도 한다. 또한, 앞서 달린 차들이 코너 주변의 흙과 자갈을 긁어 올리기 때문에 오후에는 뒤에서 출발할수록 나쁜 컨디션에서 달려야 한다. 매끄러운 아스팔트는 타이어 마모도 극심한 편. 이번 경기에서는 피렐리가 새로운 타막 전용 하드 컴파운드 타이어 P 제로 RA HA를 준비했다.
현대팀은 현대 C2 컴페티션팀을 포함해 무려 5대의 월드랠리카를 투입했다. 드라이버 챔피언 타이틀과 제조사 타이틀 방어는 사실상 어려워졌다. 하지만 누빌과 타낙 그리고 스페인 출신으로 홈그라운드를 밟은 다니 소르도는 더블 포디엄을 목표로 심기일전했다.
내년에 현대팀의 3호차를 타게 된 올리버 솔베르그(Oliver Solberg)는 현대 C2 컴페티션팀으로 출전해 월드랠리카로 WRC 타막 랠리에 첫 출사표를 던졌다. 나머지 한 대는 피에르-루이 루베(Pierre-Louis Loubet)가 교통사고를 당함에 따라 긴급 영입한 스페인 출신의 ERC 드라이버 닐 솔란스(Nil Solans)가 운전대를 잡았다. WRC2 클래스의 i20 N 랠리2 두 대는 야리 후투넨(Jari Huttunen)과 티무 수니넨(Teemu Suninen)이 운전대를 잡았다. 올해 초 M-스포트 포드팀을 떠난 수니넨은 아직 구체적인 내년 계획이 알려지지 않았다.
핀란드 우승으로 챔피언 타이틀에 한층 가까워진 도요타팀에서는 오지에, 엘핀 에반스(Elfyn Evans), 칼리 로반페라(Kalle Rovanpera), 다카모토 가츠타(Takamoto Katsuta)가 엔트리했다. 오지에는 8번째 드라이버즈 챔피언 타이틀을 향해 순항 중으로, 이번 경기에서 에반스와의 차이를 6점 더 벌릴 경우 자력으로 챔피언을 확정짓게 된다.
포드팀의 엔트리는 거스 그린스미스(Gus Greensmith)와 아드리안 포모(Adrien Fourmaux). 그린스미스는 이번 경기를 마친 후 코드라이버 크리스 패터슨(Chris Patterson)과의 결별을 발표했다. 포모는 월드랠리카로는 스페인 랠리 첫 출전이다.
10월 14일 목요일, 아침 4.31km 구간의 콜로 데 라 티엑세타(Coll de la Teixeta) 스테이지에서 쉐이크다운 테스트가 열렸다. 서비스 파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콜로 데 라 티엑세타는 사실 최종 스테이지의 일부 구간을 자른 것. 여기엔 유명한 원형 로타리가 포함돼 있다. 이후 살로우 해안으로 돌아와 오프닝 세레모니를 치렀다.
금요일 아침 일찍 북서쪽으로 이동한 참가자들은 코스타 다우라다 언덕에서 본격적인 경기를 시작했다. 이날은 3개 스테이지를 반복해 달리는 SS1~SS6 112.02km 구성이다. SS3, SS6의 리바-로자(Riba-roja)는 금요일 코스 중 가장 짧은 14.21km지만, 끝없는 헤어핀 코너를 헤치며 산을 오르내리는 고난이도 스테이지다. 10여 년 만에 다시 달리게 된 빌라플라나(Vilaplana), 리바-로자와 달리 SS2, SS5에 해당하는 21.8km의 라 그란델라(La Granadella)는 완전히 새로운 무대다. 초반에 완만한 고속 구간으로 시작해 후반 격렬한 와인딩으로 이어진다.
경기 초반, 신형 타이어로 인한 언더스티어가 많은 참가자들을 괴롭혔다. 가장 먼저 적응한 에반스가 20km 길이의 오프닝 스테이지 빌라플라나에서 종합 선두로 올라섰다. 누빌은 에반스를 맹추격하며 SS2에서 에반스와 타이기록(11분 46초)을 세우며 선전했지만, SS3를 마쳤을 때는 7.9초 벌어져 있었다. 가츠타는 SS1에서 가드레일을 들이박아 왼쪽 앞부분이 대파됐다.
서비스를 받고 다시 달린 오후 세션. 서스펜션 셋업을 바꾸며 오전 내내 괴롭히던 언더스티어에서 벗어난 누빌이 3연속 톱타임으로 종합 선두로 올라섰다. SS5 라 그라나델라에서는 에반스보다 7.9초나 빨랐다. 타낙은 SS4에서 고속 코너를 살짝 벗어나며 나무와 충돌, 차체가 크게 손상되어 경기를 포기했다. 격렬한 스피드 경쟁 끝에 누빌이 종합 선두로 금요일을 마쳤다. 에반스와의 시차는 불과 0.7초. 3위 오지에보다 5.4초 뒤처진 소르도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로반페라가 5위. 포모, 그린스미스, 솔베르그, 솔란스가 6~9위다.
토요일은 살로우 북동쪽에 마련된 SS7~SS13의 7개 스테이지 117.54km 구간을 달렸다. SS8, SS11의 쾨롤-레스 포블레스(Querol-Les Pobles)는 일부 구간이 예전과 겹치기는 하지만 새로운 구성의 코스다. 참가자들은 저녁에 살로우로 돌아와 해수욕장 앞에 마련된 2.24km의 단거리 스테이지 SS13에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인파가 가득 모인 해안도로는 백사장에서 날려 온 모래로 미끄러웠다.
금요일에 탄력을 받은 누빌의 질주는 토요일에도 멈추지 않았다. SS7 톱타임으로 아침을 상쾌하게 시작한 누빌은 SS10까지 4개 스테이지를 연달아 잡으며 추격자들과의 거리를 벌렸다. 2위 에반스와의 격차는 11.1초. 반대로 에반스는 정돈되지 않은 노면을 고려해 세팅을 손보았다가 오히려 밸런스가 무너졌다. 오후에는 오지에가 SS11과 SS12 톱타임을 달성하면서 턱밑까지 따라붙었던 소르도로부터 필사적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SS13 헤어핀 코너에서 엔진이 꺼지는 바람에 둘의 차이는 다시 1.2초까지 줄어들었다.
토요일을 마치는 시점에서 누빌이 SS13까지 톱타임을 기록하며 종합 선두를 유지했다. 16.4초 뒤에 에반스가 있고 오지에, 소르도, 로반페라, 그린스미스, 솔베르그, 솔란스 순으로 순위권이 형성됐다. 30여 초 차이로 로반페라를 추격하던 포모는 SS11에서 타이어와 서스펜션에 손상을 당해 득점권에서 멀어졌다. 솔베르그는 이때 6위로 부상했지만 클러치 트러블에 발목이 잡혀 막판에 그린스미스에게 추월을 허용했다.
10월 17일 일요일. 9.1km의 산타 마리나(Santa Marina)와 16.35km의 리우디카니예스(Riudecanyes)를 두 번씩 달리는 SS14~SS17 50.9km 구간에서 마지막 결전이 시작됐다. 아직 어둠이 짙은 아침 7시, 산타 마리나 스테이지를 출발한 참가자들은 리우디카니예스 스테이지를 이어서 달렸다. 출발선에서 약 4km 지점에 위치한 로터리 교차로의 360° 드리프트 구간은 스페인 랠리에서 가장 많은 관중이 모여드는 핫 스폿이다.
홈그라운드 팬들의 응원에 보답하듯 소르도는 마지막 순간에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줬다. 일요일 오프닝 스테이지인 SS14에서 톱타임을 기록한 소르도가 오지에를 기어코 따라잡아 종합 3위로 올라선 것이다. 소르도의 파죽지세는 스페인 랠리 최종 스테이지이자 파워 스테이지를 겸하는 SS17 리우디스카니예스까지 이어졌다. 누빌 역시 SS16을 제외하고 마지막 날 모든 코스에서 2위를 기록하며 에반스와의 격차를 벌렸다.
결국 누빌이 스페인 랠리 최후의 승자로 등극하며 스페인 랠리 2연패의 업적을 달성했다. 에반스는 24.1초 뒤처진 2위. 소르도가 오지에와 6.8초 차이로 3위를 차지함에 따라 현대팀이 더블 포디엄을 달성했다. 2019년 스페인 랠리에 이은 연속 더블 포디엄이었다. 게다가 최종 파워 스테이지에서 소르도와 누빌이 5점과 4점의 추가 포인트까지 챙겼다. 오지에, 로반페라, 그린스미스, 솔베르그, 솔란스, 그리고 WRC2의 카밀리(Eric Camilli)와 그리야진(Nikolay Gryazin)이 득점권을 마무리했다.
현대팀은 이번 스페인 랠리에서 49점의 대량 득점에 성공하며 도요타팀과의 차이를 47점까지 좁혔다. 하지만 한 경기만 앞둔 상황에서 이 차이를 메우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다만 WRC 팬들은 11월 18~21일에 열리는 최종전 이탈리아 몬자 랠리를 기대할 이유가 생겼다. 에반스가 스페인 랠리에서 오지에보다 7점을 더 많이 획득하며 드라이버즈 챔피언 타이틀 결정전의 향방이 아직 묘연하기 때문이다. 현재 오지에와 에반스의 포인트 차이는 17점으로, 만약 몬자 랠리에서 에반스가 1위를 거둔다 해도 오지에가 3위 이상의 성적을 거둘 경우 파워 스테이지 포인트와 상관없이 오지에가 챔피언에 등극하게 된다. 결국 오지에 본인의 활약과 현대팀의 활약, 그리고 파워 스테이지 등 많은 변수가 남아 있는 것이다.
참고로 스페인 랠리 전후로 2022년 시즌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발표가 있었다. 우선 현대팀은 누빌과 타낙의 투톱 체제를 유지하면서 3번째 차에 다니 소르도와 올리버 솔베르그를 나눠 태우기로 했다. 2001년생인 스웨덴 출신의 솔베르그는 월드 챔피언 출신의 아빠 페터 솔베르그(2003년 WRC 챔피언)의 지도 아래 어릴 때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아왔다. 지난해 말 현대팀 소속이 되어 WRC2 클래스에 참전해 온 솔베르그는 틈틈이 월드랠리카 적응 훈련에 힘써왔다. 이에 따라 다음 시즌 현대팀 드라이버 라인업은 누빌, 타낙 그리고 소르도와 솔베르그라는 구성이 된다. 풀 시즌 출장을 원했던 크레이그 브린(Craig Breen)은 현대팀을 떠나 포드팀에 둥지를 튼다. 브린이 그린스미스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며 나머지 한 대의 차는 아드리안 포모가 담당한다.
도요타팀은 에사페카 라피(Esapekka Lappi)의 영입을 결정했다. WRC 이외에 다양한 활동을 원하는 오지에가 더 이상 풀 시즌 참전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취한 조치다. 엘핀 에반스와 칼리 로반페라를 1, 2호차에 태우고 3번째 차에 오지에와 라피를 나눠 태운다. 현대팀과 같은 방식인 셈이다. 오지에가 어떤 랠리에 참전하게 될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글. 이수진 (자동차 평론가)
1991년 마니아를 위한 국산 자동차 잡지 <카비전> 탄생에 잔뜩 달아올라 열심히 편지를 보냈다가 덜컥 인연이 닿아 자동차 기자를 시작했다. <카비전>과 <자동차생활>에서 편집장과 편집 위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자동차 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전기차와 커넥티드카, 자율주행 기술 같은 최신 트렌드를 열심히 소개하면서도 속으로는 기름 냄새 풍기는 내연기관 엔진이 사라지지 않기를 기원하는 ‘자동차 덕후’이기도 하다.
현대자동차그룹 뉴스 미디어, HMG 저널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