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전기차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살펴봤다.
어디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전기차 4대가 현대 모터스튜디오를 찾았다. 포니 헤리티지 시리즈, 그랜저 헤리티지 시리즈, 쏘나타 EV(Y2), 싼타페 EV(SM)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차들은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현대차를 대표하는 모델인 동시에 현대차 전기차 개발 역사를 상징하는 모델이다. 쏘나타 EV와 싼타페 EV는 1990년부터 진행된 현대차의 전기차 개발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며, 포니 헤리티지 시리즈와 그랜저 헤리티지 시리즈는 레트로를 주제로 미래 전기차 실내 공간에 대한 연구를 담고 있다.
이 차들이 현대 모터스튜디오를 찾은 이유는 전문가와 함께 다양한 주제를 토론하는 현대차의 토크 프로그램, ‘마스터 토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현대차 EV(전기차) 헤리티지’라는 주제로 총 3부에 걸쳐 진행된 이번 마스터 토크 헤리티지는 현대차 전기차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조망했다. 자동차 산업의 중심에 있는 전기차가 갑작스레 등장한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렸으며, 현대차 또한 30년이 넘는 연구로 지금의 전기차 라인업을 완성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여러 연사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한 현대차 전기차의 역사를 소개한다.
1부에서는 자동차 저널리스트 출신인 한장현 대덕대학교 겸임교수와 현대차 권규혁 책임매니저가 전기차의 역사를 정리했다.
요즘 자동차 시장의 흐름을 보면 전기차가 최근에 생긴 신문물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전기차의 역사는 100년도 넘었다. 자동차의 역사는 마차에 증기기관, 내연기관 등의 새로운 동력원을 더하면서 시작됐는데, 이 당시 전기차는 내연기관 자동차보다 더 많이 팔렸다.
일례로 1900년에 미국은 약 4,000대의 자동차를 만들었는데, 이를 동력원으로 구분하면 증기차 40%, 전기차 38%, 가솔린 엔진차 22%였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증기차가 1위였다는 사실이 생소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당시 증기기관은 다양한 연료를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시동을 걸고 움직이기까지 30분이나 걸릴 정도로 시간이 오래 걸렸고, 물을 계속 보충해야 한다는 단점도 있었다.
반면 전기모터는 조용한 데다 운전이 쉽다는 장점이 있었다. 특히 작동과 동시에 최대토크를 내는 특성 덕분에 큰 힘이 필요한 버스에 유용했다. 그래서 뉴욕 시내에서 전기 버스를 운용하던 회사도 있었다. 하지만 당대 기술로는 넘을 수 없는 한계 또한 분명했다. 당시의 배터리로는 완충해도 100㎞ 이상을 달릴 수 없어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운송수단이 될 수는 없었다.
한편, 가솔린 엔진차는 약점을 기술의 발전으로 극복하여 승자가 됐다. 당시 가솔린 엔진차는 증기기관이나 전기모터에 비하면 힘이 약하고 몰기에도 복잡했다. 시동을 걸기 위해선 쇠꼬챙이를 꽂아 돌려야 했는데, 쇠꼬챙이가 튕겨 다치는 일도 빈번했다. 하지만 변속기를 더하며 힘 부족을 해결했고, 스타터 모터를 도입해 시동의 불편함을 없앴다. 게다가 가솔린 엔진차의 대량 생산이 완전히 판도를 바꿨다. 규모의 경제로 가격이 낮아지면서 많은 이들이 자동차를 샀고, 이에 맞춰 도로가 늘어나면서 도시와 도시가 연결됐다. 가장 편하게 먼 거리를 달릴 수 있는 가솔린 엔진차가 절대적인 선택으로 떠오른 이유다.
이후 자동차 제조사들은 엔진 개량에 힘썼다. 전기차의 상업화 시도가 종종 있었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어디까지나 전기차는 미래를 대비한 시험 대상이었다. 당대의 기술로는 가솔린 엔진이 자동차에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계속 시험대에만 오르던 전기차가 1990년에 캘리포니아 대기환경청에서 무공해차 의무화 법안이 통과되면서 극적인 변화를 맞았다. 1998년부터 판매되는 자동차의 일정 비율을 무공해차로 채워야 한다는 내용을 준수하려면 전기차를 만들어야만 했다. 이후 해당 법안은 수정됐지만, 전기차를 꼭 개발해야 한다는 위기감을 남겼다.
2부에서는 현대자동차 연구개발본부장을 역임한 이충구 사장을 비롯해 이봉호 전 현대모비스 전무, 이성범 전 현대차 엔지니어 등 90년대 당시 전기차 개발 담당 주역들이 등장해 현대차의 전기차 개발 역사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전했다.
현대차는 1990년부터 전기차 개발을 시작했다. 이후 지금까지 전기차 개발을 멈추지 않고 이어왔다. 1998년부터는 수소 연료전지차와 전기차를 같이 개발할 정도로 친환경차 개발에 열중했다. 우리 삶의 터전을 생각하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현대차는 시작부터 분명한 꿈과 목표가 있었다. 우리의 자동차를 개발해 수출하는 것이었다. 현대차가 1976년에 출시한 한국 최초의 고유 모델, 포니는 세계 곳곳에 수출됐다. 이는 현대차의 모두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겼다. 1982년 포니는 캐나다에도 수출되며 북미 시장 진출에 물꼬를 텄다. 이에 탄력을 받은 현대차는 1986년 후속작인 포니 엑셀로 미국 수출에 나서기로 했다.
1986년 1월, 현대차는 포니 엑셀을 미국에 수출하며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에 뛰어들었다. 이후 미국 시장 안착에 집중했다. 그러던 중 1990년에 캘리포니아 대기 환경 위원회에서 무공해차 의무화 법안이 통과됐다. 배기가스 배출 정도에 따라 저공해차의 급을 나누며, 1998년부터 판매되는 자동차의 일정 비율을 무공해차로 채워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즉, 현대차가 미국 수출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는 전기차를 꼭 개발해야 했던 것이다.
당시 현대차는 첫 독자 엔진인 알파 엔진의 적용을 앞두고 있었다. 새로 개발한 알파 엔진을 얹은 차를 미국에 수출하면 저공해차 등록이 가능하단 계산이 섰다. 법안에 있는 무공해차 또한 무조건 개발해야 하고, 미래를 위해 전자기술을 확보할 필요도 있었다. 현대차가 전기차 개발에 착수한 이유다.
현대차는 기존 생산 모델을 기반으로 전기차 개발을 시작했다. 엔진 등 구동계를 모두 제거하고 전기차를 만드는 방법이다. 현대차 최초의 전기차 연구이기에 개발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첫 시제차를 만드는 데만 8개월이 걸렸다. 그렇게 개발명 Y2의 쏘나타 EV가 1990년 연구소를 달리기 시작했다.
개발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부품 수급이었다. 당시에는 전기차 부품 시장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간단한 부품은 직접 만들고, 구동 모터 등 중요한 부품은 산업용 부품을 활용해야 했다. 따라서 여러 산업용 부품을 들여와 하나씩 시험하고 가장 뛰어난 조합을 고르는 과정이 필요했다. 전부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기를 수도 없이 반복한 끝에 현대차는 전기차 개조에 성공했다.
이어 1993년에는 울산시청에 공해단속차로 엑셀 전기차와 그레이스 전기차를 기증해 실증 시험에 들어갔다. 이후에는 전기차의 중심이 되는 구동 모터 기술 확보를 위해 미국의 구동 모터 제조사인 이노바에 대대적 투자를 하며 함께 전기차를 개발했다. 덕분에 2001년에는 미국 하와이주에 정부 공식업무용 차량으로 싼타페 전기차를 공급하는 성과도 올렸다.
현대차는 1990년부터 전기차 개발을 시작한 이후, 단 한 번도 개발을 중지한 적이 없다. 친환경차 시장의 빠른 변화에 대처하고 미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친환경차 개발을 계속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30년 넘게 전기차를 개발해온 현대차는 이제 아이오닉 5를 비롯한 다양한 전기차 라인업을 갖추고 있다. 물론 쉬운 길은 아니었다. 전기차 부품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부터 연구를 거듭해 거둔 성과이기 때문이다. 만약 중간에 포기했다면 지금의 현대차 친환경차 라인업은 없었을 것이다. 현대차의 전기차 라인업이 30여 년의 결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3부에서는 현대차 내장디자인팀 하학수 실장이 미래 자동차에 대한 디자인 연구에 대해 설명했다.
자율주행 시대의 자동차 실내 디자인은 달라져야 한다. 자율주행이 시작되면 자동차의 실내는 운전이 아닌, 휴식을 위한 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점에서의 디자인이 필요하다. 시트 또한 마찬가지. 그래서 현대차 내장디자인팀은 사람이 가장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무중력 자세와,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시트를 연구했다. 해당 기술은 ‘롱 리클라이닝 시트’로 현재 아이오닉 5에 적용되어 있다. 휴식 공간으로 또는 충전을 위해 차 안에서 긴 시간 머물러야 할 수도 있는 고객을 위한 배려인 것이다.
이처럼, 미래 자동차를 위한 새로운 디자인에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차의 헤리티지 시리즈는 과거에서 미래를 찾는 새로운 관점을 담고 있다. 미래에는 지금의 자동차를 구성하는 요소가 대부분 사라질 수도 있다. 현대차만의 독특함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유산에서 고유의 요소를 찾아내 현대차만의 미래를 디자인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과거에서 미래를 찾는, 현대차의 특별한 여정은 헤리티지 시리즈 포니로부터 시작됐다. 이를 위해 포니 2대를 완전히 분해한 뒤 다시 만들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옛날 상태 그대로의 복원이 아닌, 디자이너의 감각을 추가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헤리티지 시리즈 포니는 익숙하면서도 새롭다.
과거 모델에 미래의 감각을 더하는 디자인은, 과거의 틀이라는 제약이 있어 더욱 어려운 시도일 수 있다. 하지만 현대차 내장디자인팀은 이를 멋지게 해냈다. 포니의 원형을 유지하면서 픽셀 스타일 램프를 더해 전기차 감각이 물씬하다. 실내 또한 과거와 미래를 넘나든다. 진공관 시계를 떠올리게 하는 대시보드, 손으로 패턴을 그리는 햅틱 방식의 변속 레버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전혀 다른 시대를 가리키는 요소가 한자리에서 조화를 이룬다.
두 번째 현대 헤리티지 모델은 1세대 그랜저다. 헤리티지 포니 EV와 마찬가지로 전기 구동계를 얹고 픽셀 디자인의 램프를 달아 미래지향적인 감각을 강조했다. 이 차의 백미는 실내다. 1세대 그랜저는 당대 최고의 고급차로 명성을 쌓았지만 지금의 자동차와 비교하면 작게 느껴진다. 따라서 현대 내장디자인팀은 실내에서 당대의 고급스러움과 특별함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이들이 찾은 답은 바로 빛과 소리다.
가령 헤리티지 시리즈 그랜저의 대시보드는 사운드바 역할을 한다. 통합 모니터와 터치스크린을 달고, 내부는 소리를 키우는 울림통으로 만들어 좋은 소리를 들려줄 수 있도록 했다. 대시보드부터 도어까지 이어져 승객을 감싸는 불빛도 제공한다. 천정에는 평행 거울을 이용해 빛을 반사하는 ‘인피니티 라이팅’을 달아 공간감을 강조했다. 이처럼 헤리티지 시리즈 그랜저는 고전적인 디자인과 디지털 기술의 융합을 높은 수준으로 이뤄냈다.
현재 현대차 내장디자인팀은 또 다른 헤리티지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다. 1980~90년대 현대차의 대표 모델이었던 갤로퍼와 스텔라다. 갤로퍼 헤리티지는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라는 콘셉트로 제작되고 있다. 도심을 벗어나 자동차에서 캠핑과 원격 근무를 할 수 있는 공간 구성을 선보일 예정이다. 스텔라 헤리티지는 스몰 럭셔리(Small Luxury) 콘셉트로, 작은 사치와 개인 경험을 중시하는 MZ 세대를 위한 새로운 공간을 제시할 계획이다. 그리고 가상 세계를 통해 과거의 스텔라와 지금의 스텔라 헤리티지 시리즈를 연결하는 멋진 아이디어도 준비되어 있다.
급변하는 시대에 맞춰 자동차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익숙한 버튼이 사라지고 터치스크린이 자리를 채우듯, 자동차에서 누리는 경험 또한 바뀌고 있다. 현대차는 자동차뿐만이 아니라 로봇과 웨어러블 또한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있으며, 이 또한 미래 자동차에 접목될 것이다. 이처럼 급변하는 미래를 알기 위해서는 지금의 경향을 읽으며 과거 또한 바라봐야 한다. 현대차가 헤리티지 시리즈로 과거에서 미래에 대한 단서를 찾는 이유다.
현대차의 EV 헤리티지를 주제로 한 이번 마스터 토크는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통찰하는 시간이었다. 특히 현대차의 전기차 개발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이들의 증언은 시간 여행과도 같았다. 헤리티지 시리즈의 실물을 보고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현대차가 선보일 미래 자동차의 모습에 대해 생각할 수도 있었다.
포니 헤리티지 시리즈, 그랜저 헤리티지 시리즈, 쏘나타 EV, 싼타페 EV 등 4대의 전기차가 전하는 메시지도 인상적이었다. 과거에서 미래를 찾는다는 새로운 시도를, 미래 모빌리티의 공간에 대한 현대차의 해석을 피부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쏘나타 EV와 싼타페 EV는 현대차의 전기차 개발사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이처럼 4대의 전기차는 전기차에 대한 현대차의 자부심을 담고 있다. 30여 년의 연구 끝에 지금의 다양한 전기차 라인업을 완성했음을 입증하는 결과물이자, 지금도 멈추지 않고 자랑스러운 과거에서 미래를 향하는 길을 찾고 있다는 증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사진. 최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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