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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MG 저널 Jun 19. 2018

자동차, 그 시각,
우리 일곱 개의 따뜻한 순간들

예기치 않게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 감동의 에피소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은 결국 그 시간이 완벽하게 아름답다고 확신하는 마음에서 오는 걸지도 모릅니다. 방금 우리가 나눈 대화가 완벽하게 아름다울 수 있고, 지금 카페 창 밖으로 흘러가는 장면이 오늘 하루 가장 완벽한 장면일 수 있음을 믿고 인정하는 거죠. 믿으면, 그 확실한 행복이 내 것이 됩니다. 하루의 일부를 보내는 자동차 안에서, 우리는 아름답고 완벽한 순간을 많이 경험해 왔을지도 모릅니다. 자동차와 함께한 소확행, 일곱 가지 따뜻한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샤워보다 뜨거운


눕지도, 서지도 못하고 비행기에서 열 시간을 버텼다. 무빙워크를 지나자마자 보이는 화장실에 들러 찬물로 세수를 하고, 턱 끝에 맺힌 물기를 대충 털어냈다.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면 당장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할 텐데. 컨베이어벨트에서 파란색 띠를 두른 캐리어가 나타나길 기다리는 동안에도 줄곧 그 생각뿐이었다. 나만큼 피곤해 보이는 캐리어를 게이트 밖으로 주욱 밀어냈다. 밖에는 상기된 얼굴들이 저마다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 틈에, 그녀가 있었다. 회사에 있어야 할 시간에, 온다는 말도 없이, 그녀가 천사처럼 서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나왔네!” 자동차 키를 까딱이며 장난스런 표정을 짓는 그 사랑스러운 얼굴이란. 그녀의 차가 주차장에서 대기 중이다. 생각보다 일찍, 뜨거운 샤워를 할 수 있게 됐다.


친절하지도 않으면서


“가는 길에 같이 가던가.” 같은 말을 해도 꼭 그렇게 재미없게 한다. 아니, 밉살맞게 한다. 부서 사람 말에 따르면 세상 가장 착실하고 믿음직한 일꾼이라는데, 그럼 뭐하나. 마주칠 때마다 목례는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는데. 친절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가 나와 같은 동네에 산다고 했다. 가는 길에 태워준다는 제안이 영 내키지 않았지만 거절했다가는 더 어색해질까봐 “그럼, 가시죠.” 낚아채듯 답했다. 역시나 별 말은 없고 음악 센스도 없고, 뭐 아무것도 없었다. 마른 기침만 두어 번 했다. 돌아나가기 어렵다는 경고를 주었음에도, 기어코 골목 안까지 들어와서 우리집 문 앞에 데려다 준 수고 빼고는, 다시 생각해도 밉살맞고 정이 안 가는 사람이었다. “가는 길에 같이 가던가.” 젠틀함이라고는 1도 없던 그 말투, 그게 우리 연애의 첫 단추였다.


다음 번에도 부탁할게


벌써 한 달째다. 혼자 있고 싶은데, 혼자 있기 두려운 기분이 계속됐다. 아무도 눈치채지 않기를 바라면서 누구 한 사람은 공감해주길 바랐다. 모순적인 감정은 커지고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일상은 무료하게 흘러가고만 있었다. 바다내음이라도 들이키면 어느 노랫말처럼 낭만적인 기분이 드려나 싶어, 제주도행 비행기를 끊었다. 제주에 도착해 창이 크고 밝은 분위기가 나는 쏘울을 렌트했다. 사방이 큼지막하게 뚫린 통창으로 하늘과 땅의 경계를 바라봤고, 땅거미가 질 때까지 달렸다. 마음의 파동을 닮은 굴곡진 땅을 오르내리는 시간은 생각보다 외롭지 않았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조수석에 앉혀둔 복잡한 심경도 창 밖으로 아예 날아가버린 것 같았다. 아무도 모르게, 바람과 나만 아는 맑은 순간들이 쌓였다. 또 와야지. 그때도 이 차와 함께 해야지.


모두 파이팅입니다


내 인생만 이렇게 팍팍할 순 없다. 출근길 발걸음은 하도 무거워, 나한테만 중력이 배로 작동하는 것 같다. 퇴근까지 10시간도 안 남았으니 너무 조급해하지는 말아야지. 매일 같은 시각에 올라타는 버스기사 아저씨의 얼굴도 팍팍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아저씨가 웃음을 잃은 것도 팍팍한 세상과 중력 때문일지 모른다. 인생의 고통에 동감하는 의미에서, 단말기에 교통카드를 찍으며 비장하게 인사를 건넸다. “기사님 굿모닝입니다!” 그냥 한 번, 소리 내 인사해보고 싶었다. “예, 안녕하세요.” 머쓱한 대답이 돌아왔다. 운전 중의 오랜 침묵 때문인지 갈라진 목소리에는 당황스러움 같은 것이 묻어있었다. 안쪽 빈자리를 보며 걸어 들어가는데 배시시 웃음이 났다. 아저씨도 나도 오늘은 다른 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작정하고 힘 내면 굿모닝이다. 별 거 아니다. ‘모두 파이팅입니다!’ 


속도는 달라도 된다


나는야 만년 초보운전자. 아빠를 들볶아 같이 연습 좀 해보려 했는데, 너무 중심가로 왔나 보다. 한적한 길에서는 순탄하게 잘 달렸건만 이제는 겁이 나서 다 그만두고 싶어졌다. 여기저기서 재촉하는 경적 소리에 뒷목이 서늘하다. “어떡해? 지금 느려? 이렇게 달려도 되는 거 맞아?” 아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빵빵거려도 겁 먹지 마. 조급해 말고 안전 속도를 유지해. 법만 잘 지키면 되는 거야.” 듣고 보니 그 말이 맞았다. 주위에서 호된 소리 하면 겁먹고 초조한 거, 어디 도로에서만 그랬던가. 조바심 난다고 확신도 없이 가속 페달을 밟았다가는 사고 나기 십상이다. 아빠 말이 맞다. 쫄아서 무작정 밟으면 다친다. 차근차근 내 페이스를 믿고, 꿋꿋이 나아가야지. 내게 맞는 속도를 믿어보기로 했다.


어머니가 말했다


모처럼 어머니를 모시고 외식했다. 입맛에 맞았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신이 난 표정이었다. 그리 훌륭한 집도 아니고 가성비가 좋아 선택한 것인데, 아이처럼 좋아하는 얼굴에 괜히 미안해졌다. 식사를 마치자 늘 그렇듯 형 내외는 어머니를 모셔드리겠다고 했다. “아니, 내가 모실게. 같은 방향이잖아.” 그만 나도 모르게 평소 안 하던 제안을 했다. 어머니는 머쓱한 얼굴로 미소를 짓고 조수석과 뒷자리 문 사이를 머뭇거리다 뒷자리에 오르셨다. 차가 출발하고 나서도 한동안은 어색하셨는지 애꿎은 핸드백 지퍼만 여닫으셨다. “그… 어릴 때 살던 빌라 앞 할매칼국수집 할머니 기억하니? 엊그제 마트 가는 길에 우연히 마주쳤는데…”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 어린 시절을 휘휘 둘러 고장 난 세탁기 같은 최근의 사건을 지나 세상 이야기까지 아울렀다. 묵혀둔 길을 밟으며 오랫동안 달렸다. 우리 모자의 대화는 언제부터 이렇게 끊겼을까. 진작 내가 모셔다 드릴 걸 그랬다.


아들딸은 능력자


“목포역으로 부탁합니다.” 택시운전사는 룸미러로 이쪽을 힐끗 쳐다봤다. “우리 아들은 지금 미국에 있는디.” 말씨도 다르고 기차역에 간다 하니 타지 사람임을 알아본 거다. 아들이 내 또래 정도 되는지 다짜고짜 아들 자랑이다. “과외를 받거나 유학을 가 본 적도 없는디, 한 푼 쥐어준 것도 아니고… 내는 잘 모르지라. 뻘짓 않고 지 알아서 한 것이제.” 기사님의 아들이 어디서 무얼 하는지는 내 알 바 아니나, 아들을 자랑하는 아버지 마음은 알겠다. 우리 아버지도 그러니까. 내가 부산에 내려갈 때면 아버지는 식당에서나 쇼핑몰에서 괜히 “우리 딸이 지금 멀리 서울 살거든요.” 하시곤 했다. KTX로 2시간 남짓한 거리를, 뭐 대단히 훌륭한 사람들만 떨어져 지내는 것처럼 으쓱하셨다. 지금도 어디선가 서울에 있는 딸 얘기를 하고 있겠지. 궁금하지도 않을 사람들에게, 별 볼 일 없는 나의 역사를 몇 배로 부풀릴 것이 뻔하다. “아드님이 정말 능력자네요!” 목포역에 도착할 때까지 열심히 경청하고 반응했다. 자꾸만 내 아버지가 생각나 뭉근한 뜨거움을 느끼면서.

따뜻한 이야기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지거나, 전에 없던 마법 같은 하루가 펼쳐져야 행복해질거라 생각하진 마세요. 확실한 행복은 스스로를 믿고, 만들어가는 거죠. 매일 경험하는 자동차 안에서 오늘은 어떤 특별한 행복을 만들어 볼까요? 



글. 안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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