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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덩 Oct 21. 2023

이 세계의 온갖 것들은 의지를 갖고 있어<날이콩팥돌>

하루키의 한마디

※ 이 글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맨손으로 롯데타워를 오르던 남자가 붙잡힌 해프닝이 있었다. 20대 영국 남성인 그는 암벽 등반가였다. 72층까지 등반한 그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체포됐다. 전망대가 있는 123층까지 51층만 남겨둔 상태였다. 그는 롯데타워에 올라 비행하는 것이 꿈이었다고 밝혔다. 고소공포증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유난히 높은 곳에 오르는 걸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목숨을 건 스릴이 주는 도파민에 중독된 걸까?


그는 왜 안전장비도 없이 고층건물을 올랐을까   사진 출처 : 강은 <경향신문>


(일반적인) 스릴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위험한 행동에 치를 떠는 사람도 있다. 나로 말하자면, ‘그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어렸을 때는 확실히 전자였다. 중학생 때, 친구들과 높은 곳에 올라가서 했던 장난을 돌이켜보면, 뉴스에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미친 짓을 했었다. 그 행동이 너무나도 괴이했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길 수는 없고, 여러분에 상상에 맡긴다(순전히 운이 좋았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서 글을 쓸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런 짓을 했던 걸까? 단순히 어린 나이의 과시욕이라기엔, 혼자서 높은 곳에 올랐던 적도 많다. 내가 그런 짓을 하게끔 무언가 나를 뒤흔들었던 건 아닐까? 롯데타워를 맨손으로 오르려 했던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의 나는 공포 영화는커녕 스릴러도 잘 보지 않고, 놀이기구를 탄 지 몇 년이나 지났으며, 유튜브를 통해 익스트림 스포츠 영상을 볼 때 오금이 저리고는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도쿄기담집』, 「날마다 이동하는 콩팥 모양의 돌」

"남자가 평생 동안 만나는 여자 중에 정말로 의미 있는 여자는 세 명뿐이야. 그보다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아." 준페이가 열여섯 살 때,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어째선지 그 말만큼은 준페이의 뇌리에 박혀, 일종의 저주가 된다. 첫 번째 '의미 있는 여자'를 만나지만, 그의 가장 친한 친구와 결혼해버린다. 그는 여자를 만날 때마다 그 사람이 '정말로 의미 있는' 두 번째 여자인지 아닌지 고민하게 되고, '아니다'라는 판단이 서면 더 이상 관계를 진전시키지 않았다.


소설가가 된 준페이가 파티에서 만난 여자 기리에는 자신의 직업으로 수수께끼를 낸다.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원했던 일이고, ‘균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녀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 그녀의 별자리 역시 천칭자리이다. 그녀의 일에서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완전하거나 아니면 제로'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하며, 일요일에도 근무한다. 도둑도, 히트퍼슨도, 비밀수사관도 아니다.


준페이는 그녀에게 현재 쓰고 있는 ‘날마다 이동하는 콩팥 모양의 돌’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행을 떠난 여의사가 콩팥 모양의 돌을 발견하고, 문진으로 사용하기 위해 사무실로 가져온다. 그런데 출근할 때마다 돌의 위치가 바뀐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랬을 가능성은 없다. 돌은 스스로 움직였다. 기리에는 그 콩팥 모양의 돌이 의지를 가지고 있고, 여의사를 뒤흔들고 싶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준페이, 이 세계의 온갖 것들은 의지를 갖고 있어."


콩팥 모양의 돌을 찾아보자. 사진: Unsplash의Jake Anderson


준페이는 기리에로부터 영감을 받아 소설을 완성한다. 여의사는 콩팥 모양의 돌에 점점 더 매료되고, 다른 일에는 흥미를 잃는다. 결국 그녀는 불륜 관계를 정리하고 콩팥 모양의 돌을 바다에 버리지만, 다음날 사무실에서 여전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돌을 발견한다. 소설은 끝냈지만 기리에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 어느 날, 준페이는 택시 안 라디오에서 우연히 그녀의 인터뷰를 듣는다. 기리에의 직업은 높은 건물 사이에 밧줄을 걸고 그 위를 건너가는 사람이었다. 안전장치도 없이, 기다란 봉 하나만 들고서.


“[...] 나와 바람뿐, 그밖에 다른 것은 끼어들 여지가 없어요. 내가 좋아하는 건 바로 그런 순간이죠. 공포감은 없어요. 일단 높은 곳에 발을 내딛고 그 집중 속에 빠져버리면 공포감은 사라집니다. 우리는 친밀한 공백 속에 함께 존재해요. 나는 그런 순간이 세상 무엇보다 좋은 거예요.”


기리에가 외줄을 타는 이유이자, 준페이와의 관계를 끊은 이유다. 콩팥 모양의 돌이 의지를 가지고 여의사를 뒤흔들어 놓았듯, 바람이 기리에를 뒤흔들었다. 바람과 함께하는 친밀한 공백, 그 순간의 만족감이 그녀로 하여금 다시 외줄에 오르게 한다. 그녀는 바람과 그녀 사이에 준페이가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았다. 이는 그녀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외줄 위에서 그녀는 완전무결해야 하며, 실패는 용납되지 않는다. 결국 그녀가 준페이를 떠난 이유는, 준페이의 존재가 그녀를 뒤흔들 만큼 커졌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준페이는 이미 기리에에게 뒤흔들렸었다. 그녀가 준페이를 떠난 뒤에도, 그녀가 남기고 간 결락은 사라지지 않았다. 버려도 사무실로 돌아오는 콩팥 모양의 돌처럼, 준페이의 마음 한편에 늘 자리 잡고 있었다. 준페이는 고민 끝에 그녀를 '정말로 의미 있는' 두 번째 여자로 정한다. 아버지의 저주대로라면 이제 마지막 여자만 남은 셈이지만, 그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숫자나 카운트다운이 아니라 "누군가 한 사람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같은 무렵, 여의사의 사무실에서 콩팥 모양의 돌도 자취를 감춘다.


나는 몇 명의 '의미 있는 여자'를 만났을까  사진: Unsplash의Paul Cusick


아버지의 저주 때문에 비극적인 연애를 이어가던 준페이가 '백마 탄 공주'가 아닌 '외줄 탄 기리에'를 만난다는, 다소 진부할 수 있는 전개였지만, 결말은 역시 참신했다. 저주는 대게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한다. 저주를 깨뜨리면 해피엔딩이고 그렇지 못하면 배드엔딩이다. 준페이의 경우는, 조금 애매하다. 이도 저도 아닌 것만 같다. 왠지 다른 여자를 만나서도, 혹은 결혼하고 나서도 아버지의 저주를 되뇔 것만 같다. 그렇다면 무엇이 참신한가? 개인적인 해석이지만, 그 저주는 수단으로써는 작동하지만,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게 됐다. 다시 말해서 준페이는 그 저주를 깨뜨리지는 못했지만, 그 속에서 해피엔딩을 찾았다. '마녀의 저주를 받아 개구리로 변한 왕자님은, 개구리로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와 같은 느낌이다. 왕자님만 행복하다면야, 개구리든 송충이든 무슨 상관일까. 저주를 축복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이야말로 저주를 내린 상대에게 선사하는 최고의 복수다.


수영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번 하루키의 한마디에 공감하기 더 쉬웠을 것이다. '바람'을 '물'로 바꾸면 바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수영을 처음 배울 때, 물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는 게 가장 어렵다. 숨을 쉴 수 없고, 그래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실로 엄청난 두려움이다. 수영장 물을 절반 정도 마시고 나서야 공포에서 벗어나 수영다운 수영을 할 수 있다. 다리로 물을 박차고, 팔로 헤엄을 치며 집중 속에 빠져버리면, 어느새 공포감은 사라진다. 물은 나를 이해하고, 동시에 나는 물을 이해한다. 물속을 미끄러지듯이 나아가다 보면, 마치 물과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 든다. 수영은, 어쩌면 물의 언어를 배우는 방법이다. 그 대화에 익숙해지면, 물과 나만의 친밀한 공백을 느낄 수 있다. 일종의 트랜스(Trans) 상태에 빠지는 것과 같다. 그 경지에 이르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힘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그 순간이 '세상 무엇보다' 좋아진다.


집중 속에 빠져버리면 공포감은 사라집니다   사진: Unsplash의Joe Byr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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