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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덩 Oct 20. 2023

증권사 트레이더였던 내가 이세계 용사?<어됐그발장>

하루키의 한마디

‘이고깽’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 있다면, 당신은 라이트 노벨(주로 애니메이션 삽화가 그려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소설과 만화)에 관심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계로 간 고등학생이 깽판을 친다.’의 줄임말인 이고깽은 평범한 고등학생 주인공이 사고를 당하거나(주로 트럭에 치인다) 소환에 의해 이세계(주로 중세 판타지가 배경이다)로 넘어가고, 우연히 강력한 능력을 얻어 그 세계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스토리를 일컫는다. 단순한 서사와 평면적인 인물, 선과 악의 이분법적 판타지 세계관은 서투른 작가 지망생들에게 매력적인 선택지였고, 수많은 아류작이 탄생했다. 결국, 지나친 클리세와 매너리즘으로 ‘양판소(양산형 판타지 소설)’라는 비판과 노골적인 섹슈얼리즘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웹소설 플랫폼 '문피아'에서 연재된 소설 <이고깽 이후 천년>


그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세계를 중심으로 하는 판타지 소설이 꾸준히 공급되는 이유는, 물론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마니아뿐만 아니라, 한때는 대중적인 인기를 끌 정도였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이세계물’에 열광했을까. 사실 이세계물은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공양미를 받고 바다에 빠진 심청이는 용궁이라는 이세계에 갔고, 앨리스가 온갖 기묘한 모험을 겪은 곳도 이세계다. 이세계라는 곳은 결국 지루한 현실을 떠나 도착한 꿈과 희망이 가득한 네버랜드라고 할 수 있다.


‘이고깽’은 먼치킨(사기적인 능력을 지닌 캐릭터)적 능력으로 고난, 역경은 물론 갈등까지 간단하게 해결해 버리기 때문에 손쉽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주로 마왕을 퇴치하기 위한 여정을 떠나며, 그 과정에서 하렘(한 남자가 많은 여자를 거느리는 상황을 일컫는 속어)을 만들며, 때로는 현세계의 지식을 전수하며 이세계의 영주나 왕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 ‘이세계물’은 남성 독자들의 모든 욕구가 담겨 있는 커다란 크리스마스 선물상자와도 같다. 그렇다면 왜 하필 '깽판'을 치는 것일까? 답답한 현실에 대한 저항과 일탈 욕구이자 힘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우월감을 느끼려는 인정 욕구 때문일 것이다. 결국, 현실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이세계에서의 '깽판'을 통해 해소하는 대리만족이라고 할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도쿄기담집』, 「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


마흔 살, 증권사에 근무하는 구루미자와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같은 멘션, 2층 아래에 살고 있는 어머니의 상태를 확인하고, 아내에게 돌아온다는 전화를 남긴 직후다. 삼 년 전 비 오는 날, 아버지가 술에 취해 전차 선로에 누워 있다 죽은 뒤로 그의 어머니는 불안신경증에 걸렸다. 그날은 새벽부터 비가 쏟아졌고, 구루미자와의 골프 약속이 취소됐으며, 어머니의 증세 역시 심해졌다. ‘비좁고 밀폐된’ 엘리베이터를 싫어하는 구루미자와는 항상 계단을 이용했다. 어머니를 진정시키고 난 뒤, 아내에게 '계단으로' 집에 올라가겠으니 아침을 준비해 달라며 전화했다. 그리고, 24층과 26층 계단 어딘가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나’는 '개인적인 자원봉사'로 구리미자와의 사건을 접수한다. 24층과 26층 계단 사이를 오가며 면밀하게 관찰한다. 25층 층계참에는 거울과 소파, 재떨이와 화분이 있지만 구루미자와의 흔적은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운동 겸 계단을 오르는 남자, 건강을 위해 끽연을 하는 노인을 마주치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없다. 어느 날, 소파에 앉아 거울을 보며 노래 부르는 여자애를 만난다. 뭘 하냐는 여자애의 질문에 '나'는 '문 같은 걸' 찾고 있다고 대답한다. “어떤 문인데요?”라고 아이가 질문하자 '나'는 생각에 잠긴다. 그건 어쩌면 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산이나 도넛이나 코끼리 모양을 하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구루미자와 씨.” 나는 천장 한 귀퉁이를 향해 소리내어 인사말을 건넸다. “현실 세계에 잘 돌아오셨습니다. 불안신경증의 어머님과 아이스피크 같은 하이힐의 부인과 메릴린치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삼각형의 세계에.”


어느날 구루미자와의 아내에게서 갑작스러운 전화가 걸려 와 구루미자와를 찾았다고 전한다. 그는 센다이역 대합실 벤치에서 자고 있었으며, 이십 일만큼의 수염이 자랐고 몸무게는 10킬로쯤 줄었으며 안경은 어디선가 잃어버렸다고 한다.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실종되었던 이십 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혼잣말로 위와 같은 환영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어디가 됐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 있는 문인지 우산인지 도넛인지 코끼리인지 모를 것을 계속 찾겠다고 다짐한다.


구루미자와는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사진: Unsplash의Sasha  Freemind


(지극히 개인적인 해석으로)이 이야기는 이세계물을 하루키 식으로 독특하게 풀어낸 작품이 아닐까 싶다. 정확히는 이세계를 다녀온 사람 주변 인물 시점의 이야기다. 구루미자와는 계단에서 발견한 어떤 ‘문’에 의해 이세계를 다녀왔고(마왕을 무찔렀는지, 깽판을 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부분의 작품에서 그렇듯 돌아올 때 기억을 잃었다. ‘나’는 어떤 이유에서건 그 문을 찾아다니는 사람이다. 그걸(문) 오래 찾고 있었냐는 여자애의 질문에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쭈욱.”이라고 대답한다. 어쩌면 '나' 역시 이세계를 다녀왔고, 소중한 무언가를 두고 왔을지도 모른다.


까지가 나만의 망상이었고, 사실 사람이 사라지는 사건은 미스터리에서 빠질 수 없는 소재다. '배니싱'이라고도 부르는 이 현상에서 사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공통점은, 사라진 사람들이 사라질 낌새를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리가 차려져 있거나, 아끼는 애완동물이 방치되어 있거나,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마치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해 갑작스럽게 사라진 것처럼. 결국 미제로 남는 실종 사건이 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한때 일본에서 '인간증발'이라고 불리던 현상도 떠오른다. 빚에 의한 야반도주나 실직, 이혼 등 사회적 지위에서의 실패 때문에 자발적으로 사회에서 '증발'해버리기를 택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구루미자와 같은 증권사 직원들이 실적에 대한 압박과 투자 실패에 의한 스트레스 때문에 자살을 택하거나 증발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레나 모제, 『인간증발』, 2017


아버지는 만취해 전차에 깔려 죽고, 어머니는 신경증에 걸렸으며, 골프를 치러 가기로 예정된 날 새벽부터 비가 쏟아져 내렸다. 모르긴 몰라도 구루미자와에게 현실은 엘리베이터보다 좁고 밀폐된 공간이었을 것이다. 답답함에 울분이 터져버릴 때쯤 계단에서 이세계로 전생! 그는 그곳에서 모험과 사랑과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고 왔을까? 알 수 없다. 궁금하다면, 오늘 귀갓길에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계단을 이용해 보자. 문이든, 우산이든, 도넛이든, 기린이든 뭐든 간에 발견하기를 고대하면서.


간절히 원한다면, 이세계로 향하는 문을 찾을지도 모른다  <트루먼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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